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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미, 북한의 ‘주체’, 김성배, 북한의 ‘자주’ 개념사 연구
 

2015-03-28 

2015 3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5년 3 28() 1:00-3:00

장소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하영선, 손열, 전재성, 김상배, 구갑우, 김성배, 이헌미, 도종윤, 용채영, 조채은

발표이헌미, 북한의 주체개념사 연구

김성배, 북한의 자주개념사 연구


1. Yong-Ho Choe, “Reinterpreting Traditional History in North Korea,”
Journal of Asian Studies, 40(3), 1981.
2. 최영호, “북한 역사학의 특성과 문제점,” 한국사 시민강좌 20(서울: 일조각, 1997)
3. Han S Park, "Perceptions of Self and Others: Implications for
Policy Choices," Pacific Affairs, 73(4), Winter 2000-2001.
4. 이종석, “주체사상의 내용과 역사,” 제2부 제1장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서울: 역사비평사, 2000)
5. 서재진, “주체사상의 형성과 변화에 대한 새로운 분석,” 통일연구 연구총서(서울: 통일연구원, 2001)



발표내용 


발제문 참조


토론내용


손열: 수령과 주체. 수령이 개인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는데, 수령과 주체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

 

이헌미: 사회주의 구조의 권력구조를 잘 모른다.

 

김성배: 주체사상에서 수령관 부분은 철학적 논거를 갖고 도출한다기 보다 혁명수령이 있음으로써 인민수령이 더 잘할 수 있다는 비약이 나온다. 수령제 자체는 프로레탈리아 독재의 필연적 귀결이다. 소련도 그랬고, 중국도 집단지도체제는 조금 다르지만 프로레탈리아 독재, 공산당 독재를 유지하는 한 탁월한 영도자로 귀결되었다.

 

이헌미: 인민--수령이 있어서 수령으로 수렴되게 되어 있는데 이를 가족적 구조로서 얽혔다고 생각했다. 수령-인민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라고 본다.

 

김성배: 프로레타리아 독재 처음에 나올 때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보았었는데 현실적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가지 않았다. 중국의 정치개혁도 문제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정치적인 경직성으로 갈 수 밖에 없다.

 

하영선:비슷한 문헌들을 볼 텐데 주체-자주는 어디까지 비교, 공유되나?

 

이헌미: 주체사상기의 자주 개념에서 자주가 자주성으로 보편적인 이론으로서 나온다. 주체사상의 체계로서 자주성이 나올 때는 다르다. 역사발전의 주체와 자주의 문제가 어떻게 논리를 구성하는지를 봐야할 듯하다.

 

하영선: 자주도 포괄적이다. 자연으로부터, 사물로부터의 자유권도 포함한다.

 

이헌미: 자유, 해방과 자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김성배: 자유, 해방을 다 자주성으로 수렴한 듯하다.

 

이헌미: 개인의 자유는 아닌 듯하다. 윤리적인 개인성이라는 것은 인정을 안 하는 것 아닌가?

 

하영선: 50년 서술의 문제인데 텍스트를 보면 55년 텍스트는 위작 같았다. 와다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근거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위작 여부에 따라서 시작시기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 중요파트가 될 듯하다. ‘사상 사업에서의 당면문제앞의 부분과 뒷 부분은 문체도 다르다. 50년대, 60년대, 70년대까지 서술하는데 어떻게 해야할지를 두 사람이 다 고민해야 한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전쟁을 통한 조국통일3대 혁명역량을 공식적으로 할 때 했다. 엄밀하게 문헌사로는 64년 당대회 문서에서 처음 3대 혁명역량을 김일성이 보고를 했다. 당시 문건으로 보면 대남혁명 부분은 삭제라고 나왔다. 65년 인도네시아 사회과학원에서 삭제했던 부분을 김일성이 읽었다. 그 내용들이 66년에 full text로 나오므로 사실은 64년이다. ? 이것이 이 때 들어갔다고 하면, ‘조선의 평화적 통일과 전쟁을 통한 조국통일이라고 하면 64년으로 당겨져야 한다. 이 내용들보다는 소략하지만 기본 개념, 틀은 같다. 두 개의 평화통일, 전쟁통일이 존재한다는 것은 조심스럽다. 위작은 아닌데 읽고 느낀 기분은 덧칠을 하는 것이 아닌가였다. 앞의 이야기는 55년 이야기인데, 뒤의 이야기는 사후적으로 덧칠한 것이 아닌가? 와다는 60년대 덧칠이라고 하는데, 64년 당보고가 첫 보고라고 하면 그 언저리에 나온 것이 아닌가?

 

김성배: 65년이나 55년 것이나 잡지에 실은 것. 그 해당시기의 것이 없다. 근로자만 full text가 있고 노동신문의 full text도 없다. 55년 문건은 목차도 없다. 55년의 뒤 부분이 수상하다.

구갑우: 누구는 원본, 황장엽은 위작이라고 한다. 그 때를 중심으로 다른 텍스트를 볼 필요가 있다. 비슷한 키워드들이 어느 정도 등장한다면, 비슷한 이야기들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점이 중요한 이유는 당 대회 전에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적으로 중소갈등이 있기 이전에 자생적인 의식의 발로로서 주체를 이야기한 것이다. Samuel Kim55년 문건을 인정하면서 공산주의 분열이 나타나기 이전에 북한은 주체의 길로 갔다고 해석한다.

 

하영선: 북한의 개념사는 무엇인가? 북한에서는 개념사들이 없고, 남한은 그런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음. 그런 틀로 생각하면 스탈린, 한국전쟁이 끝나고 죽은 뒤에 문장의 시작이 당 사업에서 주체는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는 당사상사업이 이제 문제가 생긴 것임. 당 사상사업의 문제는 왜 발생했는가? 소련, 중국이 한국전쟁에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거의 대신 싸웠는데 자주를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싸워줬다. 이 시기 주체를 이야기하려면 밖의 세력들에 weight를 두는 것을 치기 위해서. 국제적 분열이 공개화되지 않아도 국내적으로는 외세를 업는 과정을 치기 위한 서술을 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읽은 것 중에 놀란 것은 두 개의 방도가 있다는 똑같은 문장이 나오는 것이다. 75년 허정오. “통일의 두 개의 방도가 있습니다의 텍스트가 표절처럼 들어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허정오가 이를 20년 뒤에 그대로 베꼈단 이야기인가? 덧칠이면 언제 덧칠일까? 5512월 연설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게 된 연설은 주체, 자주가 중요하다는 것은 국내갈등에서 외세를 업는 것보다는 주체를 강조하는 쪽으로 노선정리를 한다고 하고 사상사업도 56년 되면 역사를 다 다시쓸 것이다. 김옥균, 다산연구도 다 56년이 분기점이다. 그러면 사실 3대 혁명역량이라는 포지션이 60년대 초반에 구체화되는데 그것이 50년대의 서술에서 60년대 초반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60년대 문건들을 보면 김일성의 이야기 중의 하나가 중-소가 분리되기도 했지만 전쟁해도 더 이상 안도와 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주체의 자주론이 60년대에는 3대 혁명역량과 결합되는 모습이다. 64년의 당대회보고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중요한 것 같다. 비밀문건으로 되어있어서 65년은 인도네시아 것이 밖에서 볼 수 있었고 65년은 이미 64년에 나온 문건을 구경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중소분쟁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 60년대 말 70년대에서는 이를 철학수준으로 올려야 되어서 황장엽이 일조했다. 본격적인 철학적인 일조의 드라마가 그려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김일성-이후락 사이의 대화록 등은 70년대에는 필독일 것 같은 생각이다.

 

구갑우: 영문표기를 어떻게 하는지? 아마 주체를 identity라고 썼을 것 같다. 지금은 Juche라고 쓰는데 그것이 변화되는 과정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자주도. 국제관계사적으로는 반동선언이 중요했을 듯하다. 55년 즈음 이른바 제 3세계라는 것의 등장이 주체, 자주의 개념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가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비동맹 국가들에서 주체사상 비슷한 것이 다 등장했었다. 전형적인 노동력 착취사상인데 노동력의 절대적 투입이외에 다른 것들이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도 있다. 경제원조를 하면서 공공외교 식으로 주체사상을 수출했다고 보기도 한다.

 

지금도 공자, 북한판 ODA. 박승덕 글을 찾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상 최고의 이론가. 30년인가? 31년에 김일성이 중공에 들어갔다. 그 전후, 코민테른에 중국 공산당에서 고생하던 시기이므로 그 때를 역사적 기원으로 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영선: 주체사상 10권 나온 것이 80년대. 이는 완성작이므로 꼭 봐야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나오는 주체사상 교과서들도 있다. 오히려 국제관계사 쪽으로 들여다봐도 재밌을 듯하다. 종파사건에 팽덕회 직접 들어갔다. 내정간섭의 극단을 보여줬고 가보니까 김일성 세력이 만만치 않았고, 총대를 맨 것이 최현익 아버지이다. 김일성에게 직접 사과했는데 내정간섭의 경험도 중요하다. 54년 전시작전권 뺐겼던 것도 중요하다.

 

하영선: 1975년은 다 봐야 할 듯 하다.

 

구갑우: 82년 글은 다르게 봐야 할 듯. 가장 체계화되어있고, 마르크스주의와 명확히 관계설정이 되어 있다. 철학의 근본문제가 왜 중요한가? 엥겔스가 한 이야기들을 다시 정리하면서 체계를 재정리하다. 82년의 글이 한국적 맥락에서도 중요하다. 관념론이라고 남한에서 비판하니까 북한이 간첩을 파견함. 왜 그런 것에 간첩을 보내나? 그만큼 그들 사회에서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하영선: 더 강력해지려면 북한 개념사와 냉전개념사가 되면 같은 언어가 남북에서 다르게 갈라지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자주’. 김일성과 박정희의 자주가 얼마나 달랐냐고 하는 경우, 그것이 냉전개념사의 하이라이트이다. 지금 북한이 잘 안 되어있고, 박정희의 자주개념, 주체개념도 잘 안되어 있다. 민족주체성. 김종필을 비롯하여 훨씬 복잡한 이야기이다.

 

이후락-김일성의 만남도 90%도 박정희가 자주에 동의했다는 것이 엄청난 의미이다.

 

구갑우: 중앙정보부도 7.4 공동성명에서 합의 결정한 것 반대했다. 김일성 이야기 그대로인데 왜 받는가? 이후락이 그냥 진행한 것인가?

 

하영선: 김종필의 버전에는 사실 국내정치적인 투쟁이었다. 이후락이 오바했다. 국내정치적 2인자로서. 그 시기를 보면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들이 있다. 국회반대도 있었다. 왜 이렇게 이후락이 독주하는가? 3대 혁명역량,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갔다. 그 중에 자주를 굉장히 방점을 찍었다. 이것을 받으면 모든 것이 풀린다고 김일성이 하는데 이후락은 저희 대통령도 같은 생각이십니다라고 받았는데, 사후적으로 김종필은 그것이 국내정치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7.4를 성사를 하면 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락도 정권 주도권 장악을 했는데 결국 7.4 직후는 북이 남의 덫에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한 달 뒤부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내정치세력들이 이후락의 독주라고 반발하니까 9월이 일본신문과 김일성의 대담에서 이후락과 남쪽세력들의 이야기가 다르지 않는가라고 한다. 박대통령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는데 뭐냐? 그런 국내정치적인 암투가 있었다는 것이고 김종필의 입장에서는 더 그렇게 보였을 것임이다. 박 대통령은 급했음. 7.4 공동성명, 73년 신년사, 74년 신년사를 보면 이미 자주에 동의할 수 없다는 쪽으로 갔다. 박 대통령의 자주가 논쟁적인 것이 1.21 사태 이후에는 미국놈들 믿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한미동맹 깰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북의 자주의 첫 키는 한미동맹 깨는 것이다. 왜 이후락의 생각이 그랬냐고 하면 우선 남북, 남이 열세였다. 일단 묶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락-정홍진은 일단 남북 중지시켜야 한다고 보았고 박 대통령도 시간벌기를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벌기가 너무 짧게 끝났다.

 

하영선: 해석학적으로 쓴다고 하는데 최영이 교수 등은 사상사업으로 보았다. 치열한 국내정치, 국제정세의 암투 속에서 방향결정이 먼저 되었다. 김옥균도 김일성이 구축하는 것을 보면 55년 이런 것이 나오고, 직후 이나영을 불러서 김옥균을 살리라고 함. 그로 인해 역사가 완전 다시 쓰여진 개연성이 있다. 다산, 김옥균 공부 시에는 60년대는 남한사학계가 북한 사학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주체가 들어서면서 저쪽은 망했고, 우리는 북한이 그렇게 한 것에 기반하여 이광린 등이 나와서 70년대부터 역전되었다.

 

김성배: , 자주를 너무 극단적으로 갔다. 김정은 비판.

 

김상배: 북한, 자주, 주체는 ANT로 분석해보면 좋을 듯하다.

 

김성배: 북한의 전쟁개념을 하면서 한국전쟁 전환시기에 전쟁론 다시 썼다.

 

전재성: 주체사상이 개념이 실제로 사상이냐 아니면 대외, 대내적 필요로 인해 ad hoc하게 만드는 지배계급의 이념 정도인가? 사상이라면 맑스주의, 레닌주의와의 사상적 연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55년 이후의 배경을 보면 외교적, 현실적 필요, 대내적으로도 사대-자주노선이나 이후의 발전과정을 봐도 omni-balance와 같이 대내, 대외적 위협에 대한 정책적 개념에 머무른다는 생각이다. 황장엽. 인간-주체철학에서도 보면 정교한 논리는 아니다. 맑스레닌주의는 인간존재가 사회구속적이라고 봐서 인민대중이 혁명하기 어렵다. 정확히 정리가 안 된 이론적 문제들이 많다. 인민대중과 수령의 관계, 인민대중이 갖는 계급으로서의 자율성 등 이론적으로 사상이라면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많다. 주체사상이 사상이냐, 대내외적 정치적 필요에서 나온 개념인지 밝혀야 개념과 현실 사이의 긴장관계를 볼 수가 있다. 주체사상의 사상적 지위를 밝힐 필요가 있다. 근대적 주권이 대외적 자유와 대내적 최고성인데, 주체사상도 사회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근대정치이념을 넘어서서 도래해야 하는데 김일성 사상을 보면 근대적 주권을 확보하고자 하는 변형된 형태이다. 강대국에 소속된 약소국이 스탈린 이후의 주권을 찾으려고 하는 초보적 근대적 대외적 주권론 비슷하다. 국내적으로는 독재이전의 대내적 사상적 기반이다. 사회주의의 독특한 개념으로 봐야할지, 남한과 비슷하게 근대적 주권국가로 가는 과정의 변종인지? 스탈린주의와 사회주의가 생산요소를 집중투입한 다른 요소의 사회주의라고도 보는데 자주노선도 냉전기의 사회주의적 색채보다 근대 초기의 독재국가적 성격이 강한 부분이 있지 않나.

 

주체라는 것도 맑스사상에서는 탈주체, 탈근대가 출현한다. 주체는 맑스사상과 잘 안어울리는 개념인데 지금은 좀 후진적이다. 이미 주체는 많이 철학 등에서는 부정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헌미: 주체사상이 대표문건을 읽으면 공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정치적인 것이 설명된다기 보다는 기본적으로 교조화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용어들을 기본으로 가정하고 쓰고 있는데, 그 층위를 못 읽어서 그렇게 간단하게 못 읽는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많은 종류의 좌파이념, 이론, 사상이 그렇게 original 마르크스의 이론적인 통합성을 갖는 것이 다 많은가? 사상이 그렇게 가볍게 접근이 되나? 주체사상을 밝히는 문건 내재적 분석을 통해서는 주체의 개념사를 구성하기 어렵다면, 사상으로 보는가 정책적 개념, 레토릭으로 보는가가 달라지는 것은 그 논문에서 구현되는 것이 달라진다. 개념사를 적절히 구성하려고 할 때, 설득력있게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이다. 이를 대외정책적으로, 국내정치-대외정책과 관련된 이야기로 구성해야 하나? 인류학, 사회학자들이 하는 방식은 정치언설도 중요한데 정치문화 등 각종 만들어낸 제의들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는 근대적 주권개념과 대비해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데 두 개를 나누어서 생각할 때 개념사 논문을 design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영선: 대내외적인 정세는 컨텍스트로서 실제 사용언어는 이미 55년에도 맑스-레닌주의의 창조적 적용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창조적 적용을 했는데, 전 코멘트는 파괴적 자기부정의 언어가 아닌가? 이는 이헌미 박사가 평가해줘야 할 문제인 듯 하다.

 

도종윤: 이 작업의 이유가 주체관념을 복원하겠다는 것인지 주체 사상의 관념을 복원인지, 북한의 주체개념에 대한 해석을 하겠다는지 잘 안 잡힌다. 개념사면 북한의 주체개념의 복원인데, 실제 주체 개념은 서양 철학에서는 definitional 하기 어렵다. 이제 주체에서 뭘 이야기하기보다는 행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좀 더 본다. 관념의 복원은 한계에 다다를 수 밖에 없다. 정치용어이고 철학용어가 아니다. 해석의 관점을 넘어가면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넘어감. 정치적인 이유로 산출된 언어이고 서구의 혁명이론에서 근거한 철학적 기반을 가진 관념이라면 이데올로기적으로 길게 이야기하기 어렵다. 김정일의 주체 발언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해석으로 들어가면 조악한 문제가 서재진, 자주개념으로 가다가 인간의 개념을 이야기한다. 서양에서는 이미 안 간다. 행위로 드러나는 주체로 보는데 말로 관념화시킬 것이 아니라고 들어간다. 그런데 글을 쓰는 것이 주체발언사를 말뭉치를 연결한 것처럼 보이고 김상배 교수님들처럼 문헌들을 연결해서 추출하면 개념사인데.. 그 발언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북한은 담론이 있지 않은 사회이므로. 주체 사상 속의 주체를 이야기하고 해석하려면 이데올로기적 한계가 있다.

 

주체에 대해 아시고 싶은지 주체 사상에 대해 알고 싶어하시는 것인가, 정치학적인 것이 아닌 주체개념들도 보려고 하는가? 개념사는 그런 한계를 지워서 보는 것인지? 평화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종교적인 담론에서 현대의 담론도 변화하고 있고 문건의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연구는 말뭉치의 조합인 것이다. 그 안에서 어떤 주제들을 추출해서 시대배경과 맞춰주는 정도인데 낮은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주체를 알고 싶다면 더 담론적인 접근을 해야하는데 현실의 한계가 있다.

 

전재성: 주체개념을 뭐였는지를 정확히 정의해서 북한을 알기보다는 개념사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바뀌니까 정의가 완전히 안 되는 것만이 개념이다. 시대적으로 바뀌어나가는 과정의 다이나믹스를 보여주면서 북한의 어느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체가 뭐였을까에 너무 초점두면 어려울 듯하다. 연설문들 보면 인접 단어, 컨텍스트들이 있다. 사상사적 맥락에서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고 대부분 구체적인 사건들에서 나온다. 사건 추수적인 것도 있고, 사건 선도적인 것들도 있다. 개념을 통해 북한 사회의 변화를 보는 것이 목적이므로, 개념 자체를 해석적으로 발굴해내면 어려울 듯하다.

 

김성배: 자주는 개념사적으로 어프로치가 용이한데 주체는 어렵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는 것이 왜 태동했고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도 다뤄야 한다.

 

도종윤: 주체를 어떻게 영문 번역? 서구에서는 subject의 이야기. identity의 이야기는 아니다. identity는 그 사람의 다른 면모를 여러 각도로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identity로 주체를 이야기했다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던 것을 볼 수도 있다.

 

구갑우: 영문표기가 Juche로 변화하는 시점이 있음. 번역할 때 자신의 생각의 개념의 사고들이 투사되므로 왜 그렇게 영문으로 번역시키는지 보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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