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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근대식 접견례와 궁중연회" (10.08.26)
 

2012-02-29 
일시: 2010년 8월 26일(목) 오후 3시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자: 하영선, 강상규, 구대열, 김준석, 손열, 윤비, 양승태, 이정희, 김종학, 정연, 남민욱, 송지예, 송규민(대학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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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이 정 희 박사님,  "근대식 접견례와 궁중연회"
     현 한국 예술종합학교 박사후 과정, 서울대학교 박물관 객원연구원(예정)
     박사학위논문: "개항기 근대식 궁정연회의 성립과 공연문화사적 의의"


이정희: 저는 조선시대의 禮, 樂을 다루고 싶었음. 테크닉하고 도식화된 것 보다는 살아있는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禮記 樂記 편을 보면서 樂에 대한 정신적인 면을 발견하고 조선시대 음악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됨.

“근대식 접견례와 궁정연회”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전통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어느 한 시기를 연구한다고 했을 때, 그 기준점이 어디가 될지, 즉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을 어떻게 잡을 지가 문제가 된다. 현재 시점에서 고종대를 바라볼 때는 당시의 궁정연회가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파티문화나 테이블 매너가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음을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진연의궤(進宴儀軌)>(1902)를 보면 전통적인 궁정연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데, 무대나 자리 배치, 좌식, 남녀 내외하는 것 등이 앞으로 말씀드릴 근대 궁정연회와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저는 이 시기까지 전통적 연회가 이어지다가 개항이후 서양인들과 만나면서 어떻게 그 형식이 근대식으로 바뀌게 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됨.

지금까지는 서양인도 똑같이 전통식 잔치를 참가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 있었고, 기록으로도 전통적인 연회에 대한 기록만 있음. 저는 근대식 연회가 있었다는 가설을 갖게 되었는데, 문제의식은 여기서 시작된 것. 즉 서양인들이 참여한 <근대식 파티의 모습>을 밝히는 것이 논문의 주제가 되었음. 이 의궤를 보면 참석자 명단이 있는데, 여기에는 서양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부러 빠뜨렸는가? 아니다, 참석하지 않았기에 그 명단에 없었던 것. 서양인들이 참여했던 근대적인 스타일의 궁정연회가 따로 있었다. 그렇다면 그 모습이 어땠을까, 하는 것이 제 논문의 중심.

양승태: 그렇다면 전통적인 연회와 근대적인 연회가 따로 존재했다는 것인가?

이정희: 전통적인 연향과 근대식 연회를 구분해야 하는데, 전통적인 연향에서는 자리배열이 엄격했으며, 예와 악이 같이 어우러지는 형태로 절차에 따라서 왕에게 술과 꽃을 올리고 궁중 음악과 궁중 무가 있었음. 이것이 예와 악의 완성이었다. 엄격한 의례의 개념으로 보아야 하고, 樂 은 수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양인들에게 전통식을 강요할 수 없었을 것.

사실 음악학과에서는 樂이 의례에 부속된 것이었다, 라고 하는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고, 樂 자체를 부각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제목이 좀 길어진 부분이 없지 않은데, 한마디로 근대식 파티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

근대식에 있어서도 사실은 의례와 음악이 함께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접견례와 궁정연회였다. 접견례란 고종황제를 뵙는, 예식이 강조된 것이고, 궁정연회는 파티로서 만찬을 즐기고 공연무를 즐기는 것이었다.

양승태: 제목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근대식 접견례와 궁정연회의 관계를 설명하시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식 접견례 및 궁정연회를 설명하시겠다는 것인지?

이정희: 접견례와 궁정연회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인데, 실제로 나눠져서 행해지기도 했고, 때로는 시간적으로 뒤이어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저는 이 둘이 합해져야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 내용은 발표문 참고


양승태: Franz Eckert를 초빙하여 1901년 황실군악대를 결성한 이후 전통적인 궁중악은 없어졌나?

이정희: 두 가지 형태가 공존했다. 군악대는 외국과의 각종 예식, 조약체결이나 서양 외교관이 모였을 때 연주됨. 고종실록을 보면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Eckert에게 태극훈장이 하사됨. 그는 이미 일본에 성공적으로 군악대를 양성시켰음. 그 영향은 한편으로는 일본의 음악이 유입되는 계기가 되기도 함.

구대열: 1883년 보빙사 갔을 때 미국 국무성 파티에 초청받는데, 이 때 파티 참석한 여자들이 누구인지 묻고 관리들의 부인이나 딸이라는 답을 들음. 그들과 춤을 춰도 되느냐고 묻는 것으로 봐서 이미 춤을 배웠을 가능성이 있음.

이정희: 반대로 서양인들이 참여한 궁중연회를 보면, 그들을 배려하여 화려한 군무 중심으로만 구성함.

하영선: 정치학적 시각에서 보면, 당시 전통과 근대의 연회가 병행되다가 점점 근대의 -일본 형태의- 연회로 통일되는 시기였을 것. 세 유형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1. 강한 정치적 갈등관계, 2. 부드럽게 흡수, 3. 이상적 복합이다. 우리 경우 부드럽게 들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중국, 일본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저항이 많았을 것으로 보임. 예를 들어, 거가잡복고 같은 경우 상당한 저항이 있었다. 겉으로는 문화적인 유입이나 전파로 보이지만, 내부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적 갈등 연구가 함께  진행될 필요가 있다..

강상규: 의궤에 대한 연구는 일상사, 문화사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 앞서 이경미 선생님의 의복체계의 변화에 대한 발표와 연결지어 보면, 결국 로쿠메이칸 외교,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가 문명국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가시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탄생과 상징을 보여주는 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한 흐름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힘든 작업이지만 이와 같은 분야의 연구가 더 많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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