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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근, "유길준, <문명론지개략>을 읽다?"
 

2004-01-22 

일시 : 2003년 8월 30일 (토)
장소 :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김봉진, 신욱희, 김상배, 전재성, 손열, 김석근
발표 : 김석근 박사, “한말개화사상과 일본: 유길준, <문명론지개략>을 읽다?”

 


 

발표내용

 

서론
-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지개략이 유길준에게 미친 영향
-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을 읽었을까?

 

1,2장 생략


3장. 유길준과 후쿠자와의 관계
- 후쿠자와의 시사신보에 “신문의 기력을 논함”을 투고
- 유길준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후쿠자와로부터 어떤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는가? 1880년대 후쿠자와의 사상적 변이를 유길준이 그대로 담지했을까?
- 유영익 선생의 연구 인용
- 유길준이 미국에서 유학, 일본에 망명한 동안 모스에게 보낸 영문서신에서 드러나는 후쿠자와와의 관계

 

4장. 서유견문과 문명론지개략의 관계

- 유길준이 문명론지개략을 언제 어떻게 읽었는가, 에 관한 직접적 사료 없음
- 정용화 박사의 박사학위논문 인용: 유길준의 문명, 개화 개념은 유학을 완전히 부정하는 후쿠자와의 논지와는 차이를 보임
- 장인성 교수의 박지향 교수의 발표에 대한 논평 인용: 자신의 주체적입장을 세우고 거기에 비추어 서양을 본다는 점에서 <서유견문>은 <서양사정>보다 <문명론지개략>과 유사.

- 발표자 본인은 유길준이 분명히 문명론지개략을 읽었다고 봄. 동시대 박영효의 <상소문>을 봐도. 다만, 발표자의 관심사는, 문명론지개략 10장 자국의 독립을 논함, 부분이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가 하는 점.
- 개인과 국가의 관계 파악 문제. 후쿠자와는 그 10장에서 개인들의 관계와 국가들의 관계를 분명히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음.
- 후쿠자와가 서로 다른 차원의 문명과 독립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자국의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서 문명을 논함. 목적은 독립, 문명은 수단.

- 발표자의 쟁점들: 개인과 국가의 유비, 국가간 평등과 독립, 국제사회의 본질, 만국공법관
- 일인과 일국의 유비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 또한 개인들 사이의 관계를 규율해주는 국법의 존재, 국가 사이의 권리를 조정해주는 만국공법의 존재. 이같은 인식은 후쿠자와의 인식과는 분명히 구별됨. 그래서 발표자 본인은 유길준이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구심을 품었으며, 따라서 유길준에 대한 평가가 상대적으로 낮았음.
- 다만, 유길준이 “국제정치에 관해 ‘낙관적’이라기보다는 ‘규범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고 보임. 현실주의적 통찰도 다분하다고 봄. (한청관계, 양절체제 등) 유길준의 글에서 개인과 국가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 확연히 인지되며,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강력이 정의가 된다는 점 간파.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

- 후쿠자와에 있어서 문명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 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수준의 문명에 단시간 내 도달하기가 조선으로서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유길준은 만국공법과 조약을 통한 독립을 주장. 약소국 입장에서 공법질서에 기대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 이와 더불어 유길준이 생각한 또 하나의 독립방안은 중립. 문명화를 통한 독립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비관적.

 

5. 결론: 도리의 재발견. Power of Morality
- 서유견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14편 개화의 등급.
- 개화의 내용 중 ‘행실의 개화’에 대해 논하고 있다는 점.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그대로 통용되는 오륜으로 요약되는 사람의 도리를 아는 것. 이 부분이 후쿠자와와 가장 대별되는 부분. 후쿠자와가 그토록 비판했던 유교 오륜으로 복귀하는 모습. 유길준 독해가 어렵고 ‘복합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 유길준의 도리 중심론은 현실외면 낙관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현실인식의 결과 고심끝에 나온 결론.

 

토론

 

장인성 교수

만약 유길준이 <문명론지개략>을 읽었다고 하면, <문명론지개략>에서 공감하고 수용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이 논문에서 한 챕터쯤 나와줘야 한다고 봄. 발표에 따르면 유길준은 <문명론지개략>과 두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임. <문명론지개략>을 염두에 두고 유길준이 그런 차이를 드러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명론지개략>과는 상관없이 후쿠자와의 전작 서양사정 등이 유길준에게 보다 더 의미가 있었을 수도 있음. 또는, 후쿠자와의 텍스트와는 관계없이 유길준이 처해있던 상황에서 규범 의식 하에서 표출된 것일 수도 있음. 그렇다면, 유길준에게는 <문명론지개략>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음.

 

김석근 교수

유길준이 <문명론지개략>을 읽었을까, 하는 직접적 증거를 찾기 위해 많이 노력했는데, 결국은 찾지 못했음. 유영익 선생이 ‘읽은 것 같다’ 정도 언급하셨고, 이후 연구자들은 읽은 걸 당연히 전제.

 

김봉진 교수

유길준이 <문명론지개략>을 읽었느냐, 읽었다면 어떻게 읽었느냐는 좋은 텍스트비교 연구감. 제 단견으로는 분명히 읽었음. 후쿠자와의 상대주의적 사고는 유길준의 여러 저작에서 반복되고 있음. 그런데 문제는 3장에서 9장까지의 화두 언설을 거의 발견할 수 없음. 그리고 10장을 어떻게 읽었겠는가? 하는 문제. 3장에서 9장 내용의 생략에 대해서는 ‘무작위의 비판’이라고나 할까 즉, 스승의 글을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글을 비판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문명론지개략>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속국권론, 병론 등을 읽고 분명히 유길준이 읽고 일부를 이용했는데, 후쿠자와의 주의/주장을 빼고 생략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의 문제가 모두 걸려있음. 궁리 끝에 제가 생각해낸 것이 ‘무작위의 비판’. 한마디로, 유길준은 후쿠자와를 비판적으로 읽었다는 것.

 

당시 후쿠자와의 생각이 정당했다, 고 하는 근대주의적 시각으로 보게 되면 유길준이 현실을 잘 모르는 규범주의에 떨어져있거나 뒤떨어졌다고 평가 가능하지만, 역지사지해서 ‘근대’ 내지는 ‘현실’을 상대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유길준이 3장에서 9장까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후쿠자와의 3장에서 9장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고 볼 수도 있음. 3장-9장까지의 내용은, 지와 덕에 관한 것. 덕보다 지가 더 중요하다. 덕이라는 것은 공적인 영역보다는 사적인 영역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주장. 공의 영역=국제영역에서는 덕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덕 경시론. 이것에 대해 유길준이 비판 내지 반감을 가졌을 가능성 있음. 그래서 언급하지 않을 가능성.

 

10장은 현실주의, 제국주의 긍정론. 유길준이 이에 대해서도 분명 비판적으로 읽었을 것. 일국 내지 자국의 독립만을 주장하는 후쿠자와에 대해서, 유길준은 일신의 독립과 연장선상에서 논하고, 자국 뿐 아니라 타국의 독립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음. 타자에의 시선이 차이남. 그러나, 본격적 비교는 또 하나의 논문거리.

 

장인성 교수

3장에서 9장까지의 인용은 서유견문에 전혀 없는지? 장황한 인용의 여지가 다소 부족한 부분이기 때문은 아닌지?

 

김봉진 교수

그것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은 건데, 그 부분을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쓰지 않았다는 가정이 가능. 

 

장인성 교수

공덕, 사덕 부분은 아직 조선에서는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은 부분. 1800년대 조선에서는 허명개화/ 실상개화가 더 절실. 공덕, 사덕은 1900년대 후반에 가서야 논의. 그렇게 보면 유길준은 조선이라는 현실을 의식하면서 글을 쓰거나 책을 만드는 입장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작위의 비판’이라고 보기 어려움.

 

김봉진 교수

3장-9장 인용하지 않음과 더불어, 유길준은 후쿠자와의 병론 등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음. 적어도 서유견문까지는 유길준은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약육강식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음. 그러한 시각은 1905-7년경에 가서야 드러남. 규범주의가 반드시 이상주의가 아니라, 규범주의적 현실주의, 현실주의적 규범주의도 가능. 유길준도 글에 따라 매우 현실주의적 논리를 펴고 있음. 예를 들어 중립론.

 

하영선 교수

<문명론지개략>을 유길준이가 어떤 자세로 읽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 한국의 19세기 연구에 논쟁을 제기하는 것은 의미있음 (김영작, 유영익, 이광린 선생의 연구에 대한 문제제기. 김석근 박사 논문에서는 유영익 선생 입장에 대해 유길준을 현실주의자로 보는 시각 제기)

유길준을 사상가로 보아야 하나, 실천가로 보아야 하나. 단순한 사상가는 아님. <문명론지개략>을 읽고 그 자체를 열심히 이해하려는 태도가 오늘날 책읽기의 태도라면, 유길준의 독서는 현실을 타개하려는 목적의식이 확실한 책읽기임. <문명론지개략> 3-9장이 빠진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 가능함. <문명론지개략>을 쓸 때 후쿠자와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특히 3-9장의 경우 기조와 버클임. 그렇다면 조선의 암담한 1880년대 현실과 후쿠자와가 기조, 버클을 읽고 일본도 문명이다, 라고 말했던 글과는 잘 맞지 않음. 80년대 유길준 자신도 유폐되어 있고, 조선 자체도 문명사적 차원에서 유폐되어 있는 상황에서, <문명론지개략>의 3-9장보다는 <서양사정>의 내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조선 문명론은 14편 2절 정도 아니었을까.

 

유길준에게 <문명론지개략>이 얼마나 중요했는가? 상당부분 중요했지만, 핵심은 유길준이 풀려고 했던 조선의 현실에 있었다고 보아야 함. 그렇게 보면, <중립론>부터 <서유견문>까지, 김영작 선생 의견처럼 유길준의 국제정치 해석이 순진했다고 보기는 어려움. (<중립론>, 그리고 <서유견문>의 방국의 권리는 현실주의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음. 전통적 천하질서와 새로 들어오는 근대국제질서 양쪽에 대한 인식 속에서, 우리가 힘이 있으면 가장 좋지만, 힘이 없기 때문에 균세와 만국공법을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음. 김윤식 등 동도서기론자들의 경우 거문도사건 처리과정에서 보듯 여전히 부회론을 견지한 채 서양의 국제정치 논리 자체를  보편 논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비해, 박영효의 건백서와 유길준의 글들은 만국공법과 균세를 현실 국제정치의 논리로 받아 들임) 즉,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과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컨텍스트가 전혀 다름. 근대와의 접합 모습도 일본과 조선은 전혀 다른데, 유길준이 후쿠자와를 인용했다고 하더라도, 유길준이 관념적 사상가가 아닌 마당에야, 조선의 현실을 우선적으로 고민했을 것임. 

 

장인성 교수

주체적으로 현상을 해석하려는 것. 그것은 후쿠자와와 유길준이 같지만, 현상의 내용은 다름. 후쿠자와는 서양을 전체로서, 전면적으로, 최고의 문명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려 했다면, 유길준은 그것을 부분 부분으로 인식했던 것 같고, 따라서 서양문명에 대해 후쿠자와처럼 논하지는 않되, 서양정치에 대해서는 논하고 있음. 서양정치에 있어 규칙과 공론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서양의 정치와 모든 사회집단이 룰과 여론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보고 있음. 조선현실에 있어서 가장 급한 것은 그러한 룰,을 가지는 것-->독립신문의 문제의식. 유길준에게 있어서도 정치의 공론성을 가지는 것이 조선의 가장 큰 관건이되, 그것이 서양문명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실상/허명, 진짜/가짜를 가려 부분적으로 본 것.

 

최정운 교수

후쿠자와가 말하기를 문명은 정신. 온 국민의 정신. 그러나, 기조는 문명을 총체적인 것, 학문, 과학, 예술, 과학, 정치 등으로 보고 있음. 전혀 다름. 유길준은 문명은 ‘행실’이라고 보고 있으니 세 사람이 다 다름. 후쿠자와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문명을 대규모로 다 받아들여야 한다, 고 하고 있고, 유길준은, 우리가 살아남는다는 문제의식은 매우 적고,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우리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하고 있음. 유길준은 서양문명의 본질을 보고, 그 본질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고, 후쿠자와의 문명에 관한 입장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 다 배워야 한다는 식으로, 서양문명을 도구화하고 있음. 유길준은 우리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하면서 서양문명의 본질을 배워야 한다고 하고, 후쿠자와는 서양문명이 일본생존을 위한 도구이니 모두 다 배워야 한다고 함. 유길준을 오늘날의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해석해서 규범적 현실주의자로 만들어내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 아닌가. 오히려 중립론이나 80년대 전반에는 민족주의적 사고를 했겠지만, 서유견문에서는 갑신정변 때 가졌던 전략적 사고가 억압되어 있는 상황 아닌가. 현실주의적으로 전략적으로 살아남는 생존방법에 대해 책을 쓰고 싶지만, 우리는 그럴 수준이 안 된다, 그래서 말을 못하고 있는 묘한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영선 교수

80년대 유길준의 고민을 이해할 필요. 고민의 구조는 <서유견문>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제3편 방국의 권리에서 보여주는 양절체제와 같은 국제정치 문제가 앞서 있으며, 다음으로 제4편 인민의 권리에서 보여주는 군민공치와 같은 국내정치 문제가 있으며, 문제의 밑바닥에는 14편 개화의 장에서 보여주는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 문제가 깔려 있음.

 

최정운 교수

양절체제 부분도 전체 흐름 속에서는 돌출적인 부분. 80년대 유길준이 그 책을 왜 썼냐 생각해보면, 84년 갑신정변의 실패가 크지 않을까 싶음. 너무 성급했기 때문에 실패했으니 완전히 기초로 돌아가 생각해보자는 문제의식. 서유견문 1장이 태양계로부터 시작.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구조.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아주 체계적으로 온 우주를 묘파하려는 구조를 취함. 국가를 논하는 부분에서는, 먼저 서양을 논하고, 그 다음엔 동양 고전. 언어가 파이처럼 섞이지 못하고 층을 이루고 있음. 우리가 사는 우주를 자기가 배운 서양적 지식으로 구성을 하고, 정치, 국내문제를 서양식/동양식으로 나눠서 논해보고 있음. 동서양의 보편적 시각을 나름대로 통합해보려는 시도.

 

하영선 교수

유길준이 “양절체제”라는 말을 쓰고 있기는 하나,. 주로 “양절”이라고 부르고 있음. 김석근 박사가 양절을 설명하면서 주로 수공국의 양절을 얘기하고 있지만, 서유견문은 수공국과 증공국의 양절을 모두 얘기하면서, 증공국인 조선이 겪고 있는 양절에 비중을 두고 있음. 한국국제정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다시 치밀하게 읽을 필요 있음. 3편의 양절론, 4편의 군민공치론 속에 들어있는 유길준의 고민을 제대로 읽어 주어야 함. 1880년대 청의 압도적 영향속에서 군주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첨예한 상황 속에서 현실을 직접적으로 쓸 수는 없었음. 유길준을 후쿠자와 비교해서 평가 절하하는 것은 한일양국의 컨텍스트를 경시하고 텍스트만을 병렬 비교한 결과 아닌가.

 

최정운 교수

사상사 작업에서 contextualism vs. textualism의 오랜 문제. 유길준이 지구로부터 시작한 것은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시도.

 

하영선 교수

서유견문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문명론지개략> 3부작을 하나로 묶어낸 셈.

 

장인성 교수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은 연역적인데 비해 서유견문은 귀납법으로 매우 전통적 스타일. 14편이 나온 것도 그러한 스타일의 결과가 아닌가.

 

최정운 교수

<문명론지개략>은 언제나 ‘I'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 자체가 다름.

 

하영선 교수

Karl Rathgen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한 <정치학>(1894)을 보면, 편제가 비슷. 1장은 정치지리로부터 시작해서 근대 서양적 의미의 시공간을 소개하고, 뒤이어서, 방국의 권리, 인민의 권리를 서명했으며, 결론으로14편 개화의 등급을 논하고 있음. 15편부터 20편까지는 부록같은 체제를 갖추고 있음. 

 

최정운 교수

부록이라고 잘라버리는 것은 폭력. 15장부터는 자신의 기준을 세워놓고 풍속을 평가하고 있음.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음.

 

김봉진 교수

서유견문의 1/3 정도의 서양사정의 번역. 서유견문에서 서양사정을 1/3이나 옮겨쓰고 있는 것은, 그만큼 공감하기 때문. 그러나, 그대로가 아님. 바꿔쓰거나 삽입된 부분의 의미를 해독하는 것이 관건. 약간의 차이가 나중에 큰 차이로 이어짐. 후쿠자와도 국권론, 풍속-를 계기로 전후기로 나누는데, 후기에 나오는 생각이 이미 전기에 들어가 있다고 하겠음. 다만, 전기에는 자연권론이 더 강조, 후기에는 약육강식론이 더 강조. 어디까지나 한정된 의미에서의 전환이라는 점에 유의. 후쿠자와도 전기 3부작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연권론만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약육강식 주장 드러난 글들도 있음. 후쿠자와 <문명론지개략>의 경우, 1,2,10장은 당시 후쿠자와가 기조와 버클을 강의하면서 쓴 것.

 

최정운 교수

후쿠자와가 문명은 정신, 이라고 재정의해야 했던 이유는 후발국가로서 선진문명을 단숨에 따라잡는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임. 그 다음 걸음은 국가주의로 이어지게 됨.

 

김봉진 교수

유길준은 ‘문명’이라는 단어를 한성순보 창간사, 세계대세론에서 딱 1번 씀. 서유견문에서는 쓰지 않음.

 

하영선 교수

서유견문은 당시 기준에서는 불온서. ‘문명’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한 것 아닌가.

 

김봉진 교수

문명, 이라는 단어를 굳이 피한 이유가 뭔가가 있었을 것. 외적 요인은, 서양 문명, 이라고 얘기하면 기존 봉건 보수층 및 중국의 영향권 속에서 문명이라는 것은=서양 문명이기 때문에 외적 압력을 느꼈기 때문일 수 있고, 내적 요인은, 일본에서 문명, 이라는 단어가 유행해서 서양문명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데, 유길준은 서양문명만을 목적으로 삼아서 도입하는 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의지가 있었던 것 아닐까. 후쿠자와가 서양문명에 대해 시간적으로만 상대화했던 데 비해 유길준은 서양문명에 대해 공간적으로도 상대화함으로써, 수단으로서의 서양문명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게 되는 후쿠자와 식의 상대주의적 오류에 빠지지 않음. 그렇게 볼 때, 후쿠자와에 비해 유길준의 문명론이 오늘날 근대민족주의의 제국주의 경쟁 관점에서 현실주의적이지 않다고 폄하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음.

 

최정운 교수

오늘날과 그 당시는 에피스테메가 다르다는 점.

 

김봉진 교수

애국계몽운동이 소위 현실주의적 입장에 설 때 제국주의 논리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는 것과 동일 맥락. 김영작 선생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민권론에서 적자생존 제국주의론으로 전환했다고 비판하면서, 유길준에 대해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가서 다다른 그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고 현실주의적이지 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모순.

 

최정운 교수

후쿠자와가 문명을 정신, 이라고 했을 때는 일본을 끌고 가는 문제를 논한 것이고, 유길준이 문명을 지선지미, 라고 했을 때는 밖에서 조선문명을 보았을 때, 라는 미적인 관점에서 논한 것으로 문제의식이 전혀 다름.

 

김봉진 교수

그런 점에서 현실적이지 못하다, 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규범주의적 현실주의를 생각해 볼 수 있음.

 

김석근 교수

일본 정치사상학회에서 발표했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나왔음. 중국의 지식인들은 당시 일국이 독립함으로써 오히려 일신이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에 대한 유길준의 입장은? 후쿠자와와 같은 상황주의적 모습이 유길준에게도 발견되는가? 그리고 제 발표 말미의 규범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는, 그러한 규범주의가 현실적으로 과연 얼마나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논평이 나왔음.

 

장인성 교수

규범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일본이 더 심함. 규범의 도구화.

 

김봉진 교수

전적으로 동감. 전전에 일본 정치철학에서 국가나 천황에 의한 규범의 도구화 작업이 상당부분 진척. 그러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일본인들이 규범을 불신하게 만든 측면 있을 것.

 

최정운 교수

그런데, ‘독립’이라는 말은 후쿠자와가 가장 먼저 썼는지?

 

김봉진 교수

알려지기로는 후쿠자와가 가장 먼저.

 

최정운 교수

중국 쪽에서는 그말을 안 썼나?

 

하영선 교수

중국에서 그 말을 쓸 일이 있나.

 

김봉진 교수

1900년대 양계초가 활동할 무렵엔 사용됨.

 

장인성 교수

일본에서는 ‘자주’보다는 ‘독립’이 더 사용됨. 중국과 떨어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처럼 ‘자주’를 강조할 상황이 없고, 오히려 서양으로부터 ‘독립’이라는 문제의식 강했음.

 

최정운 교수

서재필이 ‘독립’ 말 할 때는 어디에서?

 

김봉진 교수

일본에서. 갑신정변 때 이미 ‘독립’ 어휘 사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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