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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회과학개념형성2: 김용직, <민주주의>
 

2003-08-16 

2003년 6월 전파모임

 

일시 : 2003년 6월 23일 (월) 오후 3시
장소 : 경기도 수지 하영선 교수님 서재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신욱희, 김영호, 김용직, 김상배
발표 : 김용직 박사, "개화기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전파.수용에 관한 소고"

 


 

김용직 박사 발표
- 발표문 참조

 

토론

 

장인성 교수

다루는 테마가 다소 광범위. 공동연구의 일부로서 전체적 맥락에서 각자의 몫을 생각할 필요. 민주주의 개념의 전파수용을 제도/개념(사상)/운동의 측면 종합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방법론이나 시각에 대한 부분은 책 서두에서 한 챕터로 고민하고 공유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 놓고, 각개의 논문에서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반복되지 않도록 정리할 필요 있음. 일단은, 그 개념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쓰여졌는가, 텍스트 속에서의 사용에 초점. 그 결과로서 제도를 논할 수 있되 일단 쓰임새에 면밀히 주목하고, 그에 걸리는 사회사적 맥락을 살피는 것이 바람직.

 

시기의 문제. 역시 전체적으로 논의해봐야 할 문제. 일단은 식민지 시기 이전으로 매듭. (비록, 식민지 시기가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1880년대에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서양 근대정치에 대한 지식을 피력하는 단계. 90년대에는 특정 지식인 집단들이 민(民)을 상대로 지식을 전파하려는 위에서 아래로의 확산의 단계. 1900년대, 학회활동 시기에는 지식인 네트워크가 일어나면서 지식인 간의 수평적 확산 단계. 식민지 시기에는 그러한 확산이 민(民)의 단계로. 그러므로 진정한 확산은 1920년대에 일어나는 것 아닌가. 근대적 예술양식(소설, 미술)과 교육을 통해서. 그러므로 해방공간에서 나오는 민주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들은 오히려 192,3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연구의 실제적 필요상 식민지 이전까지 다룬다고 하고, 정리.

 

자유주의와의 관계 문제. 188,90년대 일본, 유길준 양자에게서 모두,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 권리와 맞물려서 논의됨.

 

최정운 교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너무 커짐. 19세기까지 유럽 전체적인 분위기는 민주주의는 위험하다, 는 것. 선거권을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마지못해 양보. 일본에서 '문명'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통선거권에 반대. 그러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자유주의와 연결시켜 논의하더라도, 나머지 맥락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곤란. 19세기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의회설립 주장이 반드시 민주주의 옹호라고 해석할 수 없음.

 

그런데,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최초로 사용?

 

김용직 교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조차도 민주주의 개념 전파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의회를 소개하고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로 봐야 함.

 

최정운 교수

영국에서 의회의 역사는 오래되지만 의회의 민주화에는 반대. 의회설립한다고 해도 왕권중심이냐 민주적이냐 전혀 다른 이야기. 민주주의 최초 사용은 누가?

 

장인성 교수

말 자체의 최초사용자는 모르겠는데, 민주정치 행태, 공화정에 대한 아이디어는 <해국도지> <영환지략>에 소개.

 

하영선 교수

유길준도 전적으로 미국적 아이디어를 설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체제구분법 부분을 가토오 것(독일계열)을 베끼기 때문. 민본->민주로 가는 과정을 따질 때, 군이 주냐 민이 주냐 할 때, 유길준이 감히 민주를 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민공치'라고 쓴 것이 아니냐. '군민공치'는 이미 중국 일본에서 쓰던 개념이었는데, 유길준이 이 말을 사용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상황이 매우 어려운 때라는 점을 감안.

 

장인성 교수

군민공치, 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미 민주주의 아이디어를 알았다는 것. 박재경, <근세조선정감>을 보면 갑신정변 전 1883년경에 미국 정치체제 논하고 있음.

 

김용직 교수

한성순보 두 번째 호에도 이미 나옴.

 

최정운 교수

민주주의 이전에 공화제에 대한 역사는 오래 됨. 중국 전통에서는 부정적 의미였던 것이 긍정적으로 변화. 유길준이 군민공치라고 했을 때, 신변위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민주주의가 조선에서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다분. 민주와 민권은 다름. 민권은 정치보다는 부국강병 차원에서 경제적 권리. 민주는 정치적 측면을 가리키는 말.

 

김용직 교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개념전파에는 선후관계 분명 존재. 자유주의 개념전파가 선행해야만 민주주의 개념 전파 가능.

 

신욱희 교수

발표문 서론 부분에서 언급한 표층/심층의 구분이 개념 전파에서 의미하는 것은?

 

김용직 교수

제도 수용까지 되어야 개념 전파된다고 보아야 함. 제도 수용 안 되면 개념은 사장, 차단되기 때문.

 

장인성 교수

구성주의적으로 개념, 인식 있어야 제도가 되는 거 아닌가?

 

하영선 교수

1기는 표층적으로 일단 도입. 2기는 제도화 과정. 3기는 민 전체가 입수 확산. 글을  쓸 때, 1기를 안 쓸 수는 없음.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개념은 80년대에 초보적으로 자리잡기 시작. 그것을 김용직 박사가 비판적으로 볼 자유야 있겠지만, 전혀 생략한 채 독립협회부터 쓸 수는 없음.

 

김용직 교수

최정운 교수님 지적대로, 자유주의와의 관계를 논하지 않고는 민주주의 논할 수 없음. 그런데 1880년대 이전에 민주주의 개념이 제대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자유주의 개념이 전파되지 않은 상황.

 

최정운 교수

그렇다면 전파의 기준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김용직 교수

도입, 수용, 확산까지.

 

최정운 교수

어떤 수준의 대중매체에 의한 확산까지를?

 

장인성 교수

일반 잡지에 사람들이 많이 얘기한다, 그런데 제도는 성립 안 되었다면?

 

김용직 교수

대한제국기의 개혁이 문제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번역을 아무리 해도 실제 정당이 설립되지 않음. 그러므로 정치적으로 실현이 차단된 용어, 예를 들어 인민주권 등은 전파가 안 되었다고 보아야.

 

하영선 교수

너무 이분법적. 분석틀 자체는 넓은 의미에서 공유한다고 생각. 아시아판-한국판 코젤렉. 좁은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개념전파. 국제적 언어경쟁+국내적 언어경쟁을 dynamics로 보려는 것. 따라서, 어느 한 시점의 전파 이전/이후로 이분할 수야 없음. 지금 김용직 교수는 제도화. 민에 체화된 완성태로 전파의 모습을 봐야 하지 않느냐고 하고, 이쪽 최정운 교수나 장인성 교수는 초보적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의 언어전쟁, 담론의 전쟁에서 전파의 모습을 보는 것. 그 흐름을 process로 서술해주면 되는 것. 반드시 충돌할 필요 없음.

 

장인성 교수

민주주의 뿐 아니라 개념 전체에 있어, 한성순보와 서유견문이 초보 단계.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이 보다 진전된 형태. 애국계몽기 잡지가 그 다음.

 

최정운 교수

아까 김용직 박사가 윤치호의 의회설립운동 지적했는데, 그것은 민주주의하자는 얘기 아니었다고 봄. 민주주의가 현실 제도로서 전파되기에는 시기상조. 그렇게 볼 때, 독립신문에서 반복한 민주주의라는 말의 정치적 의미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

 

김용직 교수

일본의 경우에도, 민주주의라는 말이 거의 사용되지 않음. 1898년 7월의 상소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 박정양 등이 잡혀가 있는 상황. 독립협회의 이의제기로 친러파 정치인들도 법정으로 소환. 싸움.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상소에서, 상하원을 만들어 하원을 독립협회에서 가져가려는 심산. 이에 대한 비답은, '불경한 생각'이었다는 것. 젊은 독립협회원들이 2차 상소. 고종에 대한 반대감정은 관례적 만세삼창을 거부하는 것으로 드러남. 독립신문은 사설상으로는 "하원은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보수적 논조를 드러내는데, 이는 일종의 전략적 포석이었다고 봄.

 

김영호 교수

발표논문의 출발수준이, 민주주의=정치적 지배형태로 본다는 점에서 너무 높음. '민주'라는 개념이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보면 됨. 가설 5개의 순서는 합당. 아이디어->정치문화적 배경(문화)->수용 혹은 도입주체(개화파)->법적 제도적 장치. 그 중 첫부분에 해당하는 민주라는 개념, 아이디어가 어떤 식으로 흘러들어왔는지를 보자는 것이 우리 프로젝트의 목적. 일본의 지식인들이 문명 등등을 계속 들고 나오는 이유도, 사람이나 제도로 가기 이전의 정치문화적 토대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기 때문. 유길준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자료 속에서의 개념의 사용을 보는 데에서부터 출발. 표층적이라고 할지라도.

 

신욱희 교수

발표문에서 가설 4,5,6 부분은 언급되는데 상대적으로 1,2,3 이 없음. 아마도 전파의 수준을 높게 보셨기 때문.

 

김용직 교수

민주주의의 구체적 개념들이 다른 분들의 연구테마와 겹칠 것을 고려해서 쓰다보니 논의가 커진 측면 있음. 개념전파에서 근대적 권리개념이 들어와 완성되는 것은 법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근대적 민법전 수용은 통감부 시대에 가서야 이루어짐. 근대적 민법체계 없이 '권리'를 받아들이고 소개하는 것은 곤란한 점들 분명 있음. 개념 전파사 쓸 때에 그러한 현실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

 

김영호 교수

가설 5에서 결정적 계기를 1898년으로 보았는데, 그 이전의 계기를 찾는다면?

 

김용직 교수

한성순보라고 하겠음. 그러나 외국제도, 외국얘기를 하면서도 '민주'라는 말을 직접 쓰는지는 의문.

 

김영호 교수

정치문화적 토대 없이 개념이 들어왔을 때 어떠한 충돌이?

 

김용직 교수

정치의 객체로서의 민. 민본. 서양의 민주는 민이 정치적 주체. 국민. 그런데 이 개념정립이 독립신문에서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 서재필이 고별연설에서 국민, 이라는 말을 씀. 독립신문에서도 전국인민이라고 쓰지 국민이라는 말을 쓰지 않음.

 

김영호 교수

고종은 민본(民本)이 아니라 민주(民主)라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보았을까?

 

김용직 교수

반란, 이라고 보았을 것.

 

김영호 교수

민주라는 아이디어가 현실적으로 힘을 얻어간다면, 고종은 어떻게 했을까?

 

김용직 교수

역사적으로 그렇게 안 갔음.

 

장인성 교수

국민, 이라는 말이 일본에서 1880년대 후반에 사용. 국수주의 나오면서 국민주의 나옴. 국제정치론도 나옴. IR 인식하면서 '국민' 쓰임. 조선에서도 '국민소학독본'이 갑오경장 이후 나옴.

 

김용직 교수

일본의 개념이 조선에 자동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님.

 

최정운, 장인성 교수

갑오경장에 의해 일본 영향력이 급대화되는 것은 사실.

 

김용직 교수

민에게 소개할 수 있는 출판매체의 대중화가 없기 때문에, 도입 전파될 수 없음.

 

장인성 교수

대한제국에 들어가면 당연히 소개됨. 현실이 뒷받침되어야 언어나 개념이 수용될 수 있다는 일반론을 인정하지만, 한국의 경우, 서양제도 수입에 있어 항상 언어가 먼저 들어오고 그 개념을 배우는 과정에서 그러한 현실이 빚어짐. 따라서 표층과 심층의 구별이 어려워지고 혼란스러워지는 측면 다분.

 

김용직 교수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 보면 일본에서 번역을 할 때 중국에서 쓰고 있는 번역을 보면서 중역. 예를 들어, 흠차대신. 의 경우.

 

김영호 교수

민주, 라는 개념이 들어왔을 것 아닙니까?

 

최정운 교수

민주, 와 공화, 라는 개념이 미국 쪽으로부터 들어오지 않았을 가능성 다분함. 독립신문이 사설에서 하원설치에 반대한 것은 당시 유럽의 사상적 전통과 일치.

 

장인성 교수

민주, 입헌정치, 군민공치는 이미 일본 막말 185,60년대에 확립. 가토 히로유키도 <인초>에서 민주정치가 제일 바람직하지만, 입헌제로 가야 한다고 논함.

 

김용직 교수

유길준이 똑같이 얘기하고 있는데, '민주'라는 용어는 정면으로 사용 안 함. 그 이유는?

 

장인성 교수

유길준은 미국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

 

김용직 교수

구체적 국가명을 거명하고 있지 않음. 국민공치하는 나라, 전단하는 나라, 라는 식. 말 못할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영선 교수

1881년 일본번역-1912년까지도 democracy의 번역은 '민정'. '민주'는 안 쓰고 있음.

 

최정운 교수

'주권'이라는 말은 유길준 서유견문에서 사용되는데, 이것은 국제정치관계에서 국가가 가지는 것. 그렇다면 민'주'는 곤란함이 당연지사.

 

장인성 교수

민주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말고, 그러한 사고를 보이고 있다...로 접근해야.

 

하영선 교수

그러므로 '군민공치'가 중요한 단어. 청에서 만든 군민공치 단어, 일본에서의 사용, 유길준의 사용....유길준은 가토 히로유키 책 체제를 본떠서 쓴 책 속에서 군민공치,를 논한다는 점. 개화사상가들의 글만 봐서는 전파의 실상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박영효의 상소문 읽어보면, 임금, 군이 주가 되는 것에 대한 의식이 여전히 다분. 그에 반해 독립신문은 윤치호를 대통령을 시키겠다는 젊은 축들. 그런 묘한 분위기를 어떻게 리얼하게 재구성하느냐가 중요.

 

김영호 교수

천부인권론 등의 자유주의 사상과 유교적 사상의 양립가능성?

 

최정운 교수

자유주의 사상이라면 단연 개인을 얘기해야 하는데 그 당시 민권론에서 개인이 중심인지 매우 의심스러움. 주자학에서는 기본적으로 왕권과 신권의 관계.

 

김영호 교수

그렇다면 사실상 군민공치, 라기보단 군신공치에 가까움.

 

김용직 교수

유길준은 조선정치에 해박. 조선정치는 실제로는 왕의 권리가 신의 권리에 의해 제한되는 측면 매우 컸음.

 

장인성 교수

'민주'의 의미가 몇가지 있을 수 있음. 유교와 맞닿는 부분은 드 베리가 이야기하는 강학과 토론이 가능한 여지공간이 있었다는 것. 자유주의와 연결. 해국도지 이후 쭉 나오는 이야기들. 미국예찬의 이유는 두가지. 하나는 민본. 개인을 정치적 주체로 생각해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요순삼대가 했던 민본정치를 워싱턴이 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계승을 하지 않고 정권을 선양했다는 것.

 

하영선 교수

민주, 라고 했으면 우리는 지금 데모크라시를 생각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民主를 처음봤을 때는 쇼킹했을 것. 다산에서 억지춘향격 해석에 의해 민주주의를 발견하려는 측이 있는데, 다산은 홍경래 난에 대해 절대반대.

 

최정운 교수

공화는, 왕을 쫓아낸다는 문제가 걸림. 민주는 반드시 그렇지 않음.

 

하영선 교수

군민공치->입헌군주제 가능. 80년대에 유길준이 이를 키컨셉으로 잡았다는 것은 본인으로서는 매우 궁리했다는 것.

 

최정운 교수

자유주의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갑신정변 이후 알렌 등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오는 것이며, 일본이나 중국에 의해 들어올 여지 없음

 

김용직 교수

알렌은 목사가 아니라 왕의 주치의로 들어와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 1885년 입국. 86년경부터 학교사업. 선교사들이 조선의 정치현실 분위기에 맞추었을 것.

 

최정운 교수

당시 선교사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나중에 배재학당 만들어졌을 땐 수업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논했을 가능성이 다분함.

 

김용직 교수

민주주의는 19세기 유럽에서 중요한 컨셉이 아니었다, 는 최교수님 지적 중요. 미국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민주주의는 오늘날 20세기형 미국민주주의 아니었을 가능성 많음. 교회사 쪽 자료들은 매우 정교하게 남아있음. 민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목소리 높이지 못하다가 서재필이 귀국해서 민주주의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아펜젤러 등도 따라간 측면 있다고 봄.

 

최정운 교수

서재필이 당시 얘기한 민주주의의 의미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승만처럼 급진적인 사상가를 배출했다는 점에서 배재학당에서 민주주의가 논의 안 되었을 리가 없음.

 

김용직 교수

서재필은 항상 다양한 주의와 주장을 소개하면서 선택하라, 는 식으로 논설. 고종 입장에서 반란의 명분으로 사용될 여지가 있는 것은 스스로 피함. 독립신문이 발행될 수 있었던 이유. 윤치호도 마찬가지. 그런데 이승만까지 내려가면 정면으로 들이받기 때문에 지명수배까지 되는 것.

 

하영선 교수

첫 번째 세대, 그 다음 세대라는 식으로 쓰면 될 듯. 애국계몽기 학회잡지까지 오면 오늘날 학회지의 모습을 꽤 갖추고 있음.

 

장인성 교수

독립신문은 나름대로 소화하고 쓴 논설들인데 비해, 학회잡지들은 일본 글을 그대로 갖다 쓴 것 많음. 더불어, 일본과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타자인식도 언급해 줄 것.

 

최정운 교수

이승만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인식, 이 중요한 문제.

 

김용직 교수

재작년 영문판이 작년에 국문으로 해석되면서 가필된 이정식 교수의 책에 따르면, 미국의 <Outlook> 잡지를 이승만이 감옥에서 봤음. 그 잡지 편집자인 미국 유명목사 애벗의 독특한 계몽론에 이승만의 구국론이 영향을 받았음. 미국이나 영국 식 정치제도를 도입하기 이전에 인간개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면의 각성. 이승만의 나라살리기 방법론이 정치에서 종교로 바뀜. 이승만은 미국에서 돌아와서 YMCA 활동하면서 전국 돌아다니면서 강연. 이승만 사상에 있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이미 옥중에서 결합.

 

장인성 교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으로서 민주주의의 의미!

 

최정운 교수

이승만이 감옥에서 열심히 읽은 번연의 <천로역정>. 프로테스탄티즘과 individualism의 관계. 이승만이 나중에는 독재자가 되는데,

 

하영선 교수

이승만 입장에서는 선각자의 외로운 길.

 

최정운 교수

신채호는 <꿈하늘>이라는 소설에서 번연의 천로역정 이미지 그대로 가져옴.

 

김용직 교수

이승만 연구에 있어서는 상해와 권력투쟁을 벌이는 1920년대가 매우 중요. 해방 후 이승만은 상해 임정이 식민지 기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라고 비난함.

 

최정운 교수

이승만과 신채호. 당시 인물들의 에고의 충돌.

 

김용직 교수

권력투쟁의 일환으로 읽어야 함.

 

최정운 교수

권력투쟁도 있겠지만, 1900년대의 영웅론의 영향.

 

김용직 교수

일본모델이 러일전쟁을 통해 더 이상 들어오기 힘들어지면서 청 쪽을 통해 개념 및사상이 전파됨. 사회진화론의 영향. 집단적 해법. 후쿠자와 유키치가 인권소개에 있어 개인의 권리 대신 집단의 권리를 강조하는 '민권'으로 감으로써  국권론으로 가는 길을 터줬음.

 

최정운 교수

서양의 개인주의 개념은 두가지 차원 있음. 개인이야말로 정당한 이성의 주체. 개인은 개인의 힘으로 고독을 극복하고 초자연적 영웅으로 간다는 것과, 개인은 비참하고 힘이 없는 존재라는 것. 조선은 전자만 들어오고, 일본은 후자만 들어온 케이스.

 

장인성 교수

집단적 한계를 뛰어넘어 기존질서를 변혁시키는 개인이 영웅. 그러므로 반드시 민주와 연결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체제전복적 역할 한다는 점에서 개인과 연결.

 

최정운 교수

미야모토 무사시.

 

김영호 교수

마키아벨리 군주론도 전형적 영웅론.

 

최정운 교수

포르투나.

 

김용직 교수

영웅론도 권력, 파워가 문제 되는 것 아닌가?

 

최정운 교수

권력론이라기보다는 인물론.

 

장인성 교수

워싱턴 예찬의 경우 민주주의 체제를 예찬하는 의미 있음.

 

최정운 교수

나폴레옹 전기가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

 

장인성 교수

이미 막말에. 피터 대제.

 

하영선 교수

국민경쟁시대로 모두가 인식하는 20세기 들어서면서, 1900년대에 그런 영웅론들이 쏟아져나온 셈.

 

최정운 교수

삼국유사가 초기영웅전. 식민지 상황에서 영웅전에 관심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음.

 

하영선 교수

안외순, 강정인 등의 선행연구가 존재하지만, 정면으로 민주주의 개념도입사 천착한 연구 없음. 잘 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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