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문명의 국제정치학: 근대 한국의 문명 개념 도입사"
 

2003-04-01 

2002년 11월 세미나 기록

 

일시 : 2002년 11월 30일 (토) 오후  3시 6시
장소 :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장인성, 신욱희, 김영호, 손열
내용 : 하영선 교수 "문명의 국제정치학: 근대 한국의 문명 개념 도입사" 발표

 


 

하영선 교수 발표


- '개념도입사'와 관련, 전파, 변용 등 많은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명칭에 대한 합의 필요. Koselleck에 주목. 1998년에 나온 영어본 , 2002년에 나온 . Kari Palonen은 "The History of Concepts as a style of Political Theorizing: Quentin Skinner's and Reinhart Koselleck's Subversion of Normative Political Theory"에서 코젤렉의 이론틀을 가지고 핀랜드의 사회과학개념도입사 서술 시도. 사회사와 개념사의 접합 모색. 우리의 경우 이중의 번역작업의 수고가 요구됨. 입체적인 접근. 국내/국내적인 언어전쟁의 모습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 이 논문의 경우 유길준으로부터 시작, 여기에 살을 덧붙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함. 서구에 대한 대응의 초기모습은, 1. 위정척사: 화서 이항로, 서구는 금수. 유인석, 1913년 <우주문답>까지도 기본자세는 견지됨. 2. 동도서기: 김윤식, 위정척사보다는 西에 열려있으나 여전히 베이스는 東에 있음.


 

- '문명'. 1860-70년대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civilization을 번역. 1881년 유길준이 일본유학 가서 후쿠자와 밑에서 수학하면서 이를 도입. 후쿠자와의 <시사신보>에 쓴 "신문의 기력을 논함"에서 최초로 사용.


 

- '문화'. 발제문 5페이지. 1883년 <한성순보 창간사>에서 '문명' 매우 자연스럽게 빈번히 사용됨. 그런데 흥미롭게도, '문화'가 더불어 사용되고 있음. (박영효가 원문의 '문명'을 '문화'로 고쳤다는 주장이 있음: 이광린 선생)


 

- 결국, '문명'이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880년대. 1883년, <세계대세론>, <경쟁론>. 그러나 1880년대 후반은 이미 개화세력이 망한 때. 유길준은 유폐되어서 <서유견문>(1887-89) 집필. 개화세력이 정치세력으로서 상대적으로 밀리고 있는 때 문명의 표준을 쓴다는 것은 조심스러웠을 것. 서구일변도의 근대화는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따라서 전통과 근대의 복합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는 추측 가능. 유길준이 후쿠자와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것은 사실이나, 각각의 담론이 놓이게 되는 정치사회관계는 매우 달랐다.


 

- 유길준의 <서유견문>. 여기에서 '행실(行實)'의 의미? '양절(兩截)'의 의미? 1880년대의 국제질서로 파악하고 있는 '양절'의 의미가 무엇인가? 한 쪽에는 증공국-수공국 관계가 존재하고, 다른 쪽에는 기타 국가와의 관계(서구근대국제관계)가 존재한다. 만국공법에 대한 일정한 기대가 보임. 그렇다면, 이 시기 1880년대에 과연 외교에 있어 balance of power냐 만국공법이냐. 유길준은 어느쪽이었는가? 국제법 쪽에서는 유길준이 1890년대 들어서면 만국공법->bop 쪽으로 현실주의화된다고 말하는데, 정변의 좌절에 의해 만국공법->bop로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재구성해내야 함. 


 

- 유길준의 현실과 '문명' 개념 사이의 관계. 현실적으로는 개화의 좌절. '중국'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君民관계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러한 고민이 개화의 병신/원수/은인이라는 주장을 낳은 듯. 갑오개혁에 들어서면 유길준은 실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 1900년대에는 4대신문 등장. 유길준을 매개로 1880년대에 들어온 '문명'개념이, 1890년대에서 1900년대 초기까지 신문지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됨. 양계초 라인의 개신유학자들이나 일본 라인의 유학생들이나 양쪽이 똑같이 1890-1900년대에 들어오면 어느정도 '문명'개념의 사용에 있어 수렴된다는 점에 주목.


 

- 문명 개념의 동아시아 전파. 중국은 1876년까지 civilization에 대응하는 역어가 존재하지 않음. 최초번역자는 1896년의 양계초로 사료됨. 일본이 훨씬 일찍 '문명' 역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의 식자들은 양계초 라인의 개신유학자 층이 넓었으므로, 조선에서 문명개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음빙실자유서>가 들어오는 1890년대 말-1900년대 초중반.


 

- 일본의 '문명' 개념 수용. (발제문 14페이지)


 

- 청.일본.조선의 문명 개념 수용에 있어, 거부/전면적 수용/선택적 변용의 세가지 태도로 준별할 수 있음. 그런데 갈등의 양상과 지속 정도는 삼국이 꽤 다름. 중국의 경우 저항이 큼.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문명' 역어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많이 듣고 사용하게 되는 것은 중국 양계초와 함께 감.


 

- 유럽 문명 개념의 등장(발제문 16페이지 이하 참조). 기조. 버클.


 

- 결론.

 

장인성 교수

문명 개념의 수용. 전파에 대한 사회사적 접근. 그러나 개념도입사를 할 때, 그 수준에서만 해야 하나. history of idea 시각에서, 개념이 들어옴으로써 드러나는 보편과 특수의 문제를 포착. 부각해주어야. 기존의 유교 문명에서 형성되었던 심성을 가지고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방식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그리고, 조선문명의 좌절을 말씀하셨는데, 애국계몽기나 1920년대에 '조선문명사'를 서술하려는 노력이 있었음. 그 자체가 역사기술로서의 문명사에 대한 서구의 영향이 내재화되는 단계라 할 수 있음. 그렇다면, '역사기술로서의 문명사'를 짚어줘야 함.

 

최정운 교수

'문명' 개념 전파와 서양 문명의 전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하영선 교수

'문명'이란 것을 개념으로 볼 때, 문명의 구성요소는 유길준이 말하듯 6가지 요소.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 복합태로. 그들이 자기를 부르는 이름인 '문명'을 받아들일 때, 그 문명표준을 받아들일 것인가? 의 문제.

 

최정운 교수

'문명'이란 개념이 번역어로 등장하기 전에도, 이미 동도서기론자들 사이에서는 문명의 내용을 알고 있었음. 그렇다면, 이 와중에, '문명'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는 언어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영선 교수

서양인들이 자기 자신을 '문명'이라 명명한 것의 의미를 매겨줄 필요가 있겠음. (cf. 독일-> '문화')

 

최정운 교수

이 경우 전형적인 '말의 전쟁'이 아닌가 싶다. 후쿠자와는 "문명은 정신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기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왜 후쿠자와는 그런 말을 했는가? 그런가 하면 유길준은 또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있음. 유길준의 경우 "문명은 지선지미(至善至美)다."라는 말을 함. 이것은 조선의 독특한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 자기만의 규정. 조선에서 초기단계에 그토록 극렬한 저항이 있었던 것은, 위정척사론의 '소중화문명사상'이 있었기 때문. 그렇다면, 문명의 definition은, 담론전쟁의 언어적 무기로서 다분히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지선지미'라는 미학적 정의.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었음.

 

하영선 교수

후쿠자와의 경우만 해도, 갈등의 수위가 조선보다 훨씬 낮다는 점. 1884년은 조선에 있어, 유길준에게 있어 미묘한 시기. 유길준은, 전통.척사 쪽을 의식해서, 두 언어체계 사이의 양절 시스템 속에서 플레이를 하고 있다 하겠음.

 

최정운 교수

"문명은 정신이다."라는 후쿠자와의 정의 또한, 나름의 일본정치상황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던 게 아니냐. 즉, 문명개념이 현실과 매우 밀접히 맞물려 변화하고 있던 게 아닌가. 여기에는 1.서양 문물을 하루 속히 들여와야 한다 2.우리를 어디에 위치지울 것인가 하는 national identity의 문제가 걸려 있음.

 

손열 교수

'문명'이란 말이 들어오기 전에도 '문명'에 대한 의식은 있었고, '문명'에는 동양문명(전통문명)/ 서양문명(근대문명) 등 시간적. 장소적 복수성이 존재했던 게 아닌가.

 

최정운 교수

복수문명론은 20세기 한참 후에나 나오는 얘기임.

 

하영선 교수

토인비 등의 문명론과 기조. 버클 문명론은 차별됨.

 

최정운 교수

문명 '관념'의 핵심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

 

하영선 교수

문명 표준으로 저쪽을 설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라가겠다는 선언의 의미가 문명 개념 도입에 들어있음.

 

신욱희 교수

개념 도입사를 함에 있어서, 두 가지 종류의 개념이 있는 게 아닌가 함. '문명'처럼 기존 관념이 있던 것과 '주권' 등과 같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paradigm shift가 일어나는 것.

 

하영선 교수

그런 점에서는 '주권'과 '문명'이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봄.

 

최정운 교수

가설이긴 한데, 유길준이 문명을 관념함에 있어 상당 부분 중화 문명과 혼동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중국적인 문명 개념을 mirror-imaging하여 서양문명을 바라봄으로써 이해가 오히려 빨랐을 수도 있다는 것.

 

손열 교수

하지만, 예를 들어, <'경제' 개념 도입사>라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경제'라는 서구적 개념과 '경세제민'과의 관계는?

 

최정운 교수

그 둘의 관계를 밝혀주는 것이 우리 과제의 핵심. 매우 어렵고도 미묘하다는 것을 인정. '경제'라는 말이 옛날부터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움. 근대적 '경제'와 그 언어가 도입됨으로써 오히려 '경세제민'이란 관념으로서의 표현을 새삼 발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영선 교수

'평화' 개념 도입사. 1890년대-1910년대 사이에 자리잡음. 도입초기사를 하려면, 1910,20년대까지 보아야 함.

 

최정운 교수

'문명'에 있어서는 재미있는 것이 '역사 다시쓰기'. 갑오개혁 후 1894-1896년 동안 수십여 종의 국사 역사책이 다시 쓰여짐. 나중에 단재가 이를 모두 비판. 단군을 내세워 중국과 단절시키면서도 문명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기자를 쓰는 식의, 사관이 일정치 않은 짬뽕 역사. 갑오경장 때가, 아이덴티티 설정이 매우 어려웠던 때가 아닌가 싶음.

 

김영호 교수

이 논문에서 보면, 후쿠자와와 유길준 사이에는 '문명'개념에 대한 결정적 차이 존재. 후쿠자와는 버클. 기조와 유사하게 사회, 개인의 분화 발전에 대한 인식이 있는데, 유길준이 말하는 유교적 '행실의 개화'라는 term에는 이런 인식이 미비한 게 아닌가. '양절'체제 개념도 혼란스러움. 수공국-증공국 관계는 군사적 힘에 의해 운용된다고 현실주의적으로 보고, 기타국과의 관계는 만국공법에 의해 평등하게 보는데, 후자의 경우엔 너무 naive한 것이 아닌가?

 

하영선 교수

동시기 1888년 박영효의 <건백서>를 보면 이미 만국공법을 포기한 데 비해, 유길준은 아직 미련을 지녔음.

 

최정운 교수

박영효는 현실적이진 못했는지 몰라도, 이념 면에서는 특히 경제문제에서는 유길준보다 앞서 있음. 그리고 문명충돌과 관련해서, 갑오경장기는 identity crisis일 때가 아닌가 싶다. 소중화의 포기, 그러나 민족주의는 아직 여물지 못하고.

 

김영호 교수

척사파는 결국 identity의 문제를 해결 못 하고 멸절해 감.

 

하영선 교수

그 이전에도 '문명'이란 글자조합은 존재했으나, 서양이 자신의 삶을 pride를 가지고 부르는 말로서의 '문명'은 후쿠자와가 최초로 동양적 역어로 사용.

 

신욱희 교수

오늘 발표한 하영선 교수님의 논문은 유길준 중심. 그렇다면, 도입사를 함에 있어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서는 문명개화에 반대했던 시각을 반영해야 하지 않을는지?

 

하영선 교수

주권 개념 도입사를 쓰기 위해서는 만국공법 수용부터 보아야 함. 척사, 동도서기, 개화가 선명하게 보일 부분. 중국이 전형적으로, 만국공법 도입하면서 번역을 허용하는 이유가 서양 국제법을 만국공법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역이용하여 서양을 치려고 했던 것. 우리도 거문도에서의 기본 포지션은 이것. 개화파는 이보다 더 진일보된 입장. 척사파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 결국 모두 아울러 봐야 함은 물론인데 공부가 짧아서.

 

최정운 교수

'개화'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문명'은 이전에 없던 말이라고 봐야.

 

하영선 교수

딜레마는, 양계초가 뒤늦게 '문명'이란 말을 굉장히 많이 쓰고 있고, 신채호. 박은식. 장지연 등에게 있어 양계초의 저작들은 경전과 같은 것이었다는 점.

 

최정운 교수

그러나 단재는 '문명'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음. '우리는 잘났다'에서 '우리는 못났다'는 쪽으로 철저히 감.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 중국과 철저히 단절. 폭력능력을 기준으로 한국역사를 재서술. 의도적으로 야만으로 가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문명표준에 대한 의식이 있기는 했을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재에게 있어서는 '문명'이 아닌 '민족'과 '민족사관'이 중요한 것.

 

김영호 교수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류가 신문에 쓴 사설을 보면, 혼, 얼, 정신의 강조라는 점에서 오히려 유길준보다 훨씬 개인적 각성을 중요시하는 것 같은데?

 

최정운. 하영선 교수

나라가 망했으므로 혼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

 

최정운 교수

중국보다 조선이 낫다는 민족사관의 최초는 안확. 그 이후 손진태, 문일평.

 

하영선 교수

위정척사와 동도서기 측에서 본 '주권'개념은 text 보기가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음.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김영호 교수

오늘 발제문의 유길준 인용 중에서, '자주'와 '독립주권'의 당시적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듯. 중국과의 전통적 관계에서 자주는 가능하지만 독립은 안 됨. 그런데 양절체제적 사고에서는, 자주조차 곤란해지는 중국의 간섭 속에서 만국공법에 의해 독립을 도모하려고 함. 개인적으로는 대책없는 생각인 듯.

 

하영선 교수

글쎄. 양절체제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진보한 생각인 듯 싶은데.

 

최정운 교수

유길준의 글 자체가 양절. 서양 idea를 써놓은 아래, 동양 고전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식. <서유견문>이라는 책을 쓴 목적도 정치적으로 혁명하겠다는 게 아니라 말의 전쟁, 말의 정리에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하면, 모든 말을 서양식으로 바꾸겠다는 나름의 캠페인.

 

하영선 교수

그런데, 이러한 양비론을 편 것 자체도 당시로서는 꽤 위험부담을 진 것.

 

최정운 교수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됨. 이승만도 감옥 안에서 여러번 읽었다 함. 1895년 이후 신문잡지들을 보면, 위정척사의 말은 사실상 공공영역에서 사라져감.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