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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1897.10.1-1898.3.31)
 

2003-01-22 

97년 11월 세미나 기록

 

일시 : 1997년 11월 29일(토) 오후 3시-8시
장소 : 서울대 동원생활관 3층 회의실
참석 : 하영선, 신욱희, 김영호, 김용직, 장인성, 손열 
독회내용 : 독립신문(1897.10.1-1898.3.31)

 


 

주요토론내용

 

당시의 국내의 상황은 국제정세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해야 함.

 

서재필은 12월에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임됨. 다음해 5월에 도미함.

 

'공론(piblic opinion)'의 실제 내용에 관해서
- 이전까지는 규범적, normative했다고 얘기할 수 있음.
- 독립협회에 와서는 서구적 opinion으로서의 의미 부여가 가능함. 이것은 태평천국의 난 이후의 중국의 상황과 비슷함. 즉 여론의 급진화라는 변화가 있었음.
- 사직 상소와는 내용상 정반대(탐관오리들이 개혁작업을 반대하는 상소를 많이 했음). 이때까지도 보수적 시각의 상소가 많았던 것으로 판단됨. 따라서 유교적 공론정치(상소는 유생들의 특권적 행위)와 비교해서 이해해야 할 것임.
- 공론화의 주체 측면에서 근대적 의미의 토론은 독립협회가 최초였음. 그 주제는 다양했음.
- 조선시대에는 사림파를 언관을 앉혔는데, 사림파는 대부분 소장개혁층이었음. 이들은 왕의 측근인 훈구층과는 대별됨. 그들이 공론을 장악하기 시작함으로써 공론이 보다 보편적인 층의 입장을 반영하게 됨. 일본의 경우는 공론체계의 형성이 길드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기능적으로 이루어짐.

 

만민공동회는 백성과 정부의 밀착을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 가능함.
- 딜레마가 있었음. 고종을 끌어 안으면서 인민을 일으켜야 함. 정부는 상당히 비판하지만 군주에 대해서는 다름.
- 처음에는 관민공동회로 시작해서 후에 관이 빠짐.

 

서재필은 직설적으로 서술한 반면, 이승만은 분명하지 않은 비유 형식으로 글을 씀. 그 밑의 계층에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음.

 

이승만은 독립협회 활동시에는 일본의 속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를 믿었다(예: 대동아공영론)고 고백함. 감옥에서 출옥하여 미국에 간 후에는 일본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함. 단 러시아에 대해서는 독립협회 시기에서부터 반골적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임.

 

독립협회, 서재필의 딜레마를 어떤 분석틀로 재구성할 수 있는가?
- 공론적인 approach로는 놓치는 부분이 생길 것임.
- 그들이 얘기하는 독립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함. 삼면적인 '독립'으로 정의될 수 있음.
1) 자주: 대외적 독립(1월 20일자 사설)
초기에는 문명개화의 모델로서 일본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으나, 이 시기에 와서는 어디도 기대할 바가 못된다는 주장을 강하게 함. 외교적 차원에서 독립의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함(3월 24일자). 즉 만국공법을 통해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 군사적 요인보다는 고도의 외교를 통해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
2) 국내정치: '관'과의 딜레마
1898년 초에 들어서면 2월 회의, 3월 만민공동회 등의 과정이 독립에 있어서 관의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본격적 문제의 제기로 파악할 수도 있음. 초기에는 관과 첨예한 갈등관계는 아니었을 것임. 민에 경도되는 것은 관과의 갈등이 심화되는 것임. 관에 대한 좌절, 즉 관과의 대결 양상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정치학계에서 나와야 함. 민권운동의 실패의 역사로 본다면 수구쪽에서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것이 아닌가? 당시의 정치역학 관계 속에서 그것을 정확히 읽어야 함.
3) 민의 문제
단순한 계몽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단계로 진전하는 것으로 보임.
- 이 세 가지가 모여져야 독립협회 또는 독립신문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임.
- 당시는 치열한 정치상황이었지만, 서재필은 술수의 차원에서는 덜 정치적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고, 따라서 실패로 귀결했음.
- 세 측면을 염두에 두고 동시에 추적하여야 함. 국내정치 부분에서는 상당히 미묘한 움직임이 독립신문 3년과 함께 했음.

 

'민'을 너무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 아닌가?
- 당시 기고문을 썼던 사람들은 '내가 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들이 후에 애국계몽기의 선두주자로 활동함.
- 그러나 실제 기고문인지 서재필이 쓴 것인지 애매한 부분이 있음. 실제 기고문이라면 민에서 상당히 많이 쫓아왔다는 느낌이 듦.

 

중립을 외교노선으로 제시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구도 속에서 조선이 좀더 신중해야 한다고 얘기한 것 아닌가?

 

11월 9일자를 보면 국민의 자주의식을 선도하고 정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음. 그러나 수구파들과의 권력 투쟁에 대해서는 별 얘기가 없음. 즉 1), 3)의 문제에 대해서는 진전이 되나 2)에 대해서는 별 진전이 없음.
- 내각에도 보수인사와 개혁인사가 골고루 포진되어 있고, 일본과 러시아의 싸움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상황. '유지각한 친구'는 서재필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듦.

 

이승만은 '독립정신'을 강조하면서 중립론을 반대.
- 당시 이승만은 20대(75년생), 윤치호는 30대, 서재필은 40대. 1월 20일자에서는 전통적 사고를 철저히 비판함.

 

'천'과 '하나님'의 관계: 유교의 천을 하나님으로 완전히 대체하고 있음.

 

3월 5일자에 스위스와 국제정치에 대한 언급이 있음.

 

97년 9월 7일자에서는 '갑신정변'을 얘기함: 서광범을 회고하면서 언급. 원세개의 개입으로 실패했다고 얘기.

 

'사회유기체설'을 이용하여 정치를 신체에 비유.
- 이런 입장은 온건한 쪽으로 흐를 것이라고 판단되는데, 민권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공변'되다의 뜻은?

 

국내정치가 절실하게 다가온 문제였을 것이지만 복잡한 사정으로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없었을 것으로 이해해야 함.

 

서재필의 전략 개념
- 병력이 없으므로 대외적으로는 외교로 현상유지하면서, 국내정치의 갈등 상황도 갑신정변 당시처럼 군사를 동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민을 계몽시켜서 역량을 배양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임.
- 하와이에서의 행적도 이를 뒷받침함. 합방 후 귀국 후에도 YMCA 학감으로 전국순회강연을 함. 기독교를 통해 구국하기로 작정한 듯함.
- 갑신정변의 교훈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 고종을 둘러싼 권력을 장악해야 된다는 것을 서재필은 알았으나, 이승만은 3월 10일에 만민공동회를 강경하게 주도했음.

 

'충군'은 단순한 수사였을까?
- 이는 고종이 이쪽 저쪽으로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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