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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遵憲의 <朝鮮策略>, <21세기의 '조선책략'>(국가전략 제2권 2호)
 

2003-01-21 

96년 월례 세미나 기록


일시 :1996.11.9 (토) 오전 10:00-1:00
장소 : 서울대 사회대 국제문제연구소내 세미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정재호, 신욱희, 김봉진, 김석근, 박명규,손열, 안인해
독회내용 : 黃逡憲의 『朝鮮策略』,『21세기의 '조선책략』 (국가전략 제2권 2호)

 


 

주요토론내용


 

다음 텍스트는 鄭觀應의 『易言』

 

배경: 김홍집 수신사 일행이 방일 후 하여장(공사급)과 그 밑의 황준헌 등을 만나 6번 정도 필담을 나누었으나, 당시 다 못한 얘기를 황준헌의 명의로 정리해서 준 것임.

 

1880년대 상황에서 중국은 러시아를 주적으로 하기 때문에 영국을 등에 업어야 하는 context. 따라서 영국에 대한 반감은 강하게 나타나지 않음.
-그렇다면 중국은 왜 러시아를 주적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는가? 당시 global세력이었던 영국의 communication network에 걸려든 것이 아닐까? 중국 내에서도 완전히 그 부분에 대한 합의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남음.
-당시에 벌어졌던 이리사건 network에 걸려든 것. 영국은 통상요구. 러시아는 영토확장의 직접적 위협으로 대별됨. 영국의 총세무사에 대한 호감 등이 중국 측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됨.

 

19세기의 문제를 먼저 얘기함.
-황준헌의 얘기에서는 각 국의 이미지를 설명함에 있어서 몇 가지 관이 혼재돼 있음. 즉 문제의 인식을 이중적으로 하고 있었음.
러시아 견제의도 우선적으로 강조. 조선이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판단. 아직 청일전쟁 이전이어서 일본과 경쟁해야 하는 대등한 상태로 생각하지는 않음.

 

[친중, 결일, 연미]가 핵심사항임.
-'친중'은 부자유친, 사친이효 등처럼 수평적이지 않은 관계를 나타내며, 전통적인 동양적 개념임.
-'결(맺는다)'은 교린에 해당하는 동격의 의미임.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으라는 얘기인 듯.
-'연'은 나란히 선다는 의미. 호시관계, 통하자(개국을 해도 좋다는 뉘앙스 포함)
-지금까지 '방아'를 주 의미로 파악해온 것과 달리 청국의 '종주권'확인의 의미도 큰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

 

실제 impact는 '연미'였음. 이 결과 서양 오랑캐로 도외시했던 나라와 조약을 맺게 되었음. '친, 결'은 기존 관계의 확인이었으나, 이를 계기로 미국과 조약을 맺음. 기존의 중화질서도 호시관계를 기본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음. 조공하겠다면 굳이 막지 않았음. 명조의 기록에도 영국 등이 조공국으로 나와 있음.


 

우리의 입장에서 당시에 『조선책략』을 썼다면 어떠했을까?
-일본의 전략적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이 책을 통해 보면 흥아회 아이디어임. 황준헌도 그 멤버이고 김홍집도 세미나에 참석)
-전파의 시각에서 보면, 당시에는 영러 대결의 framework. 40년대 이후 미국이 우리에게 준 것은 다시 [친미 결일]. 우리 입장에서 '결일'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 때도 '방아'가 주된 개념.
-'이서황책' : 이홍장의 글은 방일 쪽이었음.
-청의 입장에서는 방일의 발상 및 언행을 할 수 없음. 청일전쟁에 지고 나서도 일본이 주적개념으로 자리잡지 않음. 1차대전 이후 21조항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속에 포함됨.
-우리 입장에서는 '방일'을 내세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도 방일을 내걸기에는 부끄러웠을까?

 

왜 책의 구도에는 영국이 빠져있는가?
-그 내용이 궁극적으로는 영국의 눈으로 본 세계였기 때문에 자신은 빠짐.
-언어 틀은 받아들이고 전략적인 틀은 새로 짤 수 있지 않은가? '만인소'의 내용에도 왜 러시아를 배격하느냐는 내용이 있음.

 

'결일'은 근대적인 언명인가 전통의 지속을 얘기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
- 그 내용은 분석적이었음. 일본의 위협에 대해서 분석.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하고, 경제는 과대 평가되어 있다고 얘기함. 그래도 쳐들어오면 우선은 견디라는 내용.
-우리가 '방아'를 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 세력권으로 들어갔을까? 당시의 일본 국력에 대한 평가는 타당한가?
-'균세자강'의 조언은 옳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청의 이중적 이해가 고려되어 있음. 조선이 살아남아야 하지만 그것은 중국의 생존을 위한 것임.

 

이러한 내용이 보고되어 왔음을 고려한다면 황준헌의 독자적 고려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듦
-이후 개화파는 '결일'이 '친정'보다 더 중요한 개념으로 파악했음.
-청이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의도가 본격화된 것은 임오군란이지만, 그 이전 70년대부터 서양식의 속국으로 만들려는 논의가 하여장을 중심으로 있어 왔음.

 

필담을 한 이유는?(역관을 대동하지 않은 비밀 자리였을까?)또한 일본이 그 내용을 신속히 파악하게 될 것임을 청국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결일'을 명시한 것은 외교적 제스츄어가 아니었을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방아'는 절실했고, '연미'를 얘기하는 것은 상황적으로 미국이 이미 접근해 있으므로 너무 겁내서 꺼리지 말라는 정도의 의미일 것임.
-학자가 아니라 외교관이 쓴 것이므로 임기응변적인 성격이 강함. 장기적인 고려는 크게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임. 따라서 position paper 수준. 10년도 못 가서 완전히 파탄이 남.
-그러면 당시의 영국의 세계전략은 무엇이었는가?
-현재 미국의 세계전략은 무엇인가?

 

왜 '연미'인가?
-미국이 중국에 준 관념이 다른 나라와 달랐음
-이렇게 본다면 조선책략의 이름을 차용한 對중국책략이었다고 파악할 수도 있음.
-유럽강국으로부터의 독립, 노예해방, 제퍼슨의 민주주의 등을 통해 형성된 모습은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나라에게 있어서 굳이 propaganda가 아니더라도 모범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중국의 '요순'의 명성도 비슷한 예임.
-일본도 미국에 대한 이미지는 좋았지만 명치국가의 frame으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미국을 배제했을 것임. 따라서 독, 영, 불 특히 독을 많이 차용.

 

다시 한번 우리의 균세방법은 없었을까하는 질문. 왜냐하면 '조선책략'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이기 때문.
-영러가 마음대로 들고나지 못하도록 묶어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거문도 사건 후에 영국이 후퇴하게 되면서 우리에게 문제가 복잡해진 것 아닌가?
-영러를 old power, 청일을 regional power로 상정하고 구도 상으로는 4개 세력이 서로 견제하여 조선이 일종의 중립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짰어야 함. 문제는 영국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영국을 유인할 수 있는 계책이 뭐가 있었는가?(중립론(?), 급진개화파(?))

 

검증된 점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이 약했음
국내질서가 가지고 있었던 장해 요인(균세를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로운 position이 마련되지 못함)

 

반론: 균세(balance of power)는 강대국만 구사할 수 있는 전략 아닌가?
중립적 아이디어도 난센스가 아닌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identity를 무엇으로 세울 것인가? 당시에는 이 질문이 크게 타당성이 있는 질문이 아닐 수가 있음. 이씨 왕조 family내부에서는 가능함. 일각에서는 이씨 왕조의 명이 다 되었다는 분석도 오감. 그러나 民베이스의 정치세력화는 객관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을 수 있음. 상책으로 가기에는 아직도 미일 쪽으로의 관성이 구조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음.

 

자강의 문제 - 내부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미래는 어떻게 찾아볼 수 있었을까?

 

불륜의 국제정치학(?):윤리나 명분의 진공상태에서의 외교는 불가능함.

 

현재 우리는 '조선책략'정도의 논의도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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