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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 <建白書>
 

2003-01-21 

96년 8월 세미나 기록


일시 :1996년 8월 16일(금) 오후4시-7시
장소 :서울대 사회대 국제문제연구소내 세미나실
참석 : 하영선, 최정운, 신욱희, 김봉진, 김용직, 손열, 이셩형, 장인성, 정재호
독회내용 :박영효의 『建白書』

 


 

주요토론내용


우리의 전통 속에서 문명개화를 보는 눈을 중국과 비교한다면 박규수 이후로 오경석, 유대치 등이 양무론에 해당되고, 후쿠자와의 영향을 받은 동인 이후가 중국은 변법론에 해당될 듯함. 현재 독회하는 텍스트는 188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사상이 담겨져 있는데, 1890년대의 사고는 독립신문을 통해 볼 예정임. 이러한 당시 지식인의 생각을 전통유교의 관점, 일본적 임팩트를 고려한 관점. 현재 우리의 관점을 통해 살펴봐야 할 필요성 있음.

 

『建白書』는 고전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실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유길준보다 더 구체적인 것으로  파악됨.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이나 그 기본개념을 잘 익혀 그 내용을 설파하고 있음. 또한 동양적·서양적 사고의 충돌도 엿보임.
-근대국가의 수립을 주장하기보다는 서양문명을 통해 전통적 정치를 회복하려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음. 즉 유교적 idealism을 제대로 실현해야 한다는 전통론이라고 보면 변법까지도 나가지 못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음. 하지만 제도적 개혁을 강하게 제기한다는 측면에서는 변법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박영효는 가능한 기존의 언어로 개화를 해석하려 함. 관점에 따라서는 유교적 얘기로 이해될 수도 있음.
-'충군애국'의 개념에서 '애국'이란 표현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됨. 당시 전통적인 위정척사파는 '애국'이란 말을 쓰지 않았음.
-유길준이 사용한 경제의 개념은 일종의 정치의 개념으로 동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파악할 수 있으나 ,박영효의 경제는 economy의 의미로 사용된 것 같음.
-유길준은 동서의 mix에 노력하여 다분히 철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데에 반하여 박영효는 명백하게 의도가 나타남. 즉 유길준보다는 실천적 경험의 기반(왕족으로서 정치참여, 군사조련의 경험 등)이 있었기 때문에 뒷 부분에서 구체적인 얘기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파악됨.
-미시경제학의 개념이 자주 등장하고, 토지제도에 대한 언급, 지권 확립, 외국인에 토지전매의 금지 주장, 노동시장에 대한 언급 등을 보면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서는 잘 아는 사람의 얘기로 보이나, 이것은 practical한 수준의 언급이지 사적 소유권 등 그 원리에 대한 원칙적인 수준에서 얘기되는 것은 아님.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 당시 지조개정 등을 통해 소유권, 사유재산의 개념이 명확히 정립됨. 지식인들의 논의과정에서도 많이 언급되어 정리됨.
-'현회'의 언급을 보면, 위로부터의 통치에 대응할 수 있는 밑으로부터의 방법 모색도 드러남. 즉 인민의 정치=민주주의를 얘기하는 것. radical한 내용이지만, 상소문의 형식을 빌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상충되는 듯이 보일 수 있음.
-'상소문'의 형식을 빌었다고는 하나, 이것이 과연 상소문인가?
상소문이라기보다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mobilize하기 위해 책을 쓴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음.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왕이 사람을 잘못 썼다는 언급, 즉 인사문제가 key라고 강하게 주장한 것을 보았을 때, 갑신정변의 실패에 대한 강한 한이 담겨져 있음. 유길준보다 생사의 문제가 더 긴박한 사람이었음. 죽기 전에 쓴 개화유서가 아닌가하는 질문도 있을 수 있음.

 

'공'과 '사'의 구분에 대해
-전통 유교에서는 개인적 이익의 추구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짐. 이점은 처음에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한 것이 나라가 위태롭게 된 원인이라고 얘기한 부분에 나타남.
-'공'과 '사'의 구분이 서양적인 것만은 아님. 그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동양에도 분명히 존재.
-서양의 자유주의 시대의 공·사 개념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지만, 그 이전 시대의 공·사 개념은 동·서양이 비슷하지 않은가? (스콜라 철학과 유교사상의 비교)

 

1870년대의 언어는 주로 중국 쪽에서 들어온 것임(해국도지,영환지략 등). 1880년대의 언어는 후쿠지와류의 일본 쪽에서 주로 영향을 받았음. 따라서 박영효의 얘기를 명확히 하려면 70-80년대 상소문의 언술체계도 살펴봐야 함. 또한 박영효가 갑신정변후 3-4년 간 일본에 체류할 당시 그의 교류범위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음. 즉 그가 주장하는 100여 개의 항목이 무엇을 보고 쓴 것인가 하는 문제.

 

갑신정변에 대해여
-주적개념이 불명확하였음. 즉 동양철학의 인치 개념으로 접근한 실패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적 개념은 있었음(민씨 척족, 수구파). 임오군란의 실패가 역설적으로 개화에 대한 추진력을 갖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이 너무 이른 시기에 시도되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음.
-시기의 문제보다는 당시 개화파의 핵심 leadership을 지녔던 김옥균의 머리를 좀 더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음.

 

전체적으로 『서양사정』,『학문에의 권장』,『문명론개략』의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음.
-여러 사상이 더불어 뭉뚱그려져 접합되어 있어서 배양을 하지 못한 것이 한계로 드러나지만 ,그럼 점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임. 차이점은 후쿠자와는 유교사상을 부정하고 들어갔지만 조선의 개화사상가들에게는 그런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
-유길준의 사고에서보다 특히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화학반응이 덜 일어난 듯한 느낌이 오는 이유를 구명해야 할 필요가 있음. 처음의 언급에서는 현실주의적 얘기를 통해 서양국가의 부도덕성을 비판하나, 나중에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교류를 해야 한다고 얘기함.

 

박영효의 사상을 분석하는 것과 그의 주장이 개혁 프로그램으로서 가치를 지니는가, 즉 실현가능성이 있었는가를 논의하는 것은 다른 작업임. 100여 개 이상의 항목이 개혁 프로그램으로서의 혁명을 담보할 수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임.

 

박영효에게서도 유가사상이 조선에 있어서 지니고 있던 헤게모니가 드러남. 즉 부국강병을 시급한 과제로 우선적으로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 차례는 5번째로 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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