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사연구회 2016년 11월 정례모임
일시: 2016.11.26.(토) 3:30~6:00 pm
장소: 한국고등교육재단
지하 세미나실
1.
독회자료 및 발제
⊙ 이헌미 발제:
- 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서울: 주류성, 2013)
- [연구주제] 왜 신라가 7세기 이후 한반도 유일 국가로 생존할 수 있었는가?
⊙ 김봉진 발제:
- 廣瀬憲雄, «東アジアの国際秩序と古代日本» (東京 : 吉川弘文館, 2011)
- [연구주제] 당대 후기 동아시아 지역 질서와 장보고 해상 네트워크
2.
토론 내용 정리
⊙ 이헌미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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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나당전쟁연구» (서울: 주류성,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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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주제] 왜 신라가 7세기 이후 한반도 유일
국가로 생존할 수 있었는가?
n 당의 관점에서 본 나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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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삼국을 정벌 후 어떻게 할
계획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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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서역과 한반도, 2개 전선에서 전쟁을 동시 진행하고 있었음. 서역 전선에서 일어난
일이 한반도쪽 전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친 것인가? 반사실적사고(counterfactual)를
적용해 본다면?
n 신라의 관점에서 본 나당전쟁:
-
신라는 삼한통일을 했음에도 고구려
영역 전체를 통합하지 못했는데 (발해), 고구려에 대한 신라의
전략이 어떻게 바뀌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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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전쟁을 할 때 한계점 등을
충분히 고려하고 한 것인가, 아니면 당면한 문제에 대해 모험적으로 전쟁을 결정한 것인가?
n 우리가 중국과 싸울 때 토번 등 중국의 후방에 대한 정보전 능력이 얼마나 활용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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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교 선생 논문을 보면 실제로
양쪽이 매우 치열한 첩보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음. 실제로 신라에서 당에 보낸 유학생, 구법승 등이 많았으므로 이들이 휴민트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제기됨. 이번
달 독회자료를 통해 7세기 후반에 급격히 향상된 신라의 수군력 등 기술력의 변화 또한 알 수 있음
-
*당시 전쟁의 기술: 연안을 따라 등주à평양à부여 루트로 항해, 당나라의 병선은 ‘누선’, ‘세작’이라 불린
간첩
n 우리나라가 중국에 ‘파병을 요청’하는 문제는 우리 역사의 19세기까지 계속되는데, 이를 ‘문제’라고 여기는
인식 자체가 현재적일 수 있으나, 피정복의 위험 등 분명한 비용이 있음에도 반복되는 점을 특기
n 책 전체 편집의 시선에서: 기존 연구에서 얼마나 따라가고
새로 쓸 것인가?
-
토번의 발호, ‘신라의 현명한 선택’ 등 저자의 논지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한반도 방기론으로? 신라의 승리에 대해 방기론과 민족주의적
시각의 접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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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전쟁 결정: 신라가 태세를 multipolar적 시각, 명분적 시각에서 얼마나 잘 읽었나?
n 왕전핑(Wang Zhenping), «Tang China in
Multi-Polar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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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비의 논지를 당나라 대로 끌고
온 느낌으로, 서역,고구려,백제,신라 등을 각각의 pole로 놓고 다극질서(multipolar)로 이해함. 진한 이후 수당으로 진행 과정에서
문화적/명분적 천하질서가 어느 정도 자리잡고/작동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제공함
-
문화적으로는 당이 진한 때보다 훨씬
성장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군사적으로는 쇠퇴하여, 군사력은 당-신라가
대등한 것으로 평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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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 한반도 삼국’만
생각하는 우리의 일반적 인식과 달리 서역이 중요했다면 로사비 적 요소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음. 그러나
실제 전쟁에서 얼마나 진정으로 ‘승복’했는지(힘의 문제 vs 명분의 문제)를
검토해야 함
-
저자가 말하는 ‘pole’은 다 같은 ‘pole’인가?
n 문화적 규범 이전에 기술결정론 또한 작동했다고 볼 수 있음. 예를
들어, 당나라가 서북과 동북을 동시에 방어하지 못한 것도 제국의 과대팽창 때문으로 볼 수 있음
n 중국과의 역사논쟁에 비추어, 현재 중국의 공식사관은 나당전쟁
등도 ‘내전’으로 보고 있는가? 서쪽은 명백히 ‘정벌’에
해당하는데 동쪽의 경우는? (*한사군)
n *당나라 역사는
‘안록산의 난’이 기준으로,
삼국통일은 안록산의 난 이전, 장보고는 이후로 나누어짐
⊙ 김봉진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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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瀬憲雄, <東アジアの国際秩序と古代日本> (東京 : 吉川弘文館,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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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주제] 당대 후기 동아시아 지역 질서와 장보고 해상 네트워크
n 히로세 노리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와 고대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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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일본의 ‘소제국’ 의식의 기록을 보여줌. 중국식
의례의 ‘주체적 소화’, 다원적 질서, ‘복수의 소제국’ 인식이 존재했음.
동시에 일본 상위론/우위론의 허상을 지적함.
è 그렇다면 우리의 고대국가들의 ‘소제국’ 의식은 어땠을지 연구할 수 있음
n 니시지마 사다오의 책봉체제론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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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권’으로 묶을 수는 있지만 6-8세기 일본은 책봉체계에 들어있지 않았음. 견수사/견당사는 보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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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이 도시카즈와 비슷한 오니가시라 기요아키 참조 (기미-조공-책봉-맹약 + 내륙아시아)
n 장보고에 앞서 당나라 대의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정리할 필요
-
보통 생각하는 ‘책봉/조공체제’는 명청대에
가장 적절한 설명으로, 명청대가 되면 책봉/조공은 지속적으로
중심이 되지만 기미는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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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기는 중국문명도 발달하지만
주변 민족들 또한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으므로 기미가
더 부각된 시기
è 이 시기 장보고가 움직인 동아시아의 네트워크를 보여줄 것
n 우리가 각 챕터를 집필할 때도 서두에 ‘각 시기의 책봉체제는
어떤 모습인지’ 정리,유형화 하는 작업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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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규, <천하국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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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영어권 학계가 아닌 한국 학계에서 새롭게 정리함으로써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
n 비국가 행위자로서의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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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신라 국내정치가 anarchy에 가까워지던 시절, 교역으로 지역과 지역 간을 연결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잡은 인물임. ‘무질서 속의 질서’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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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가들의 ‘쇄국’과 해양 통제, 해금정책: 이전 시기의 조공/호시무역은 주로 육로였으나 장보고 시기를 기점으로
해양 조공/호시무역이 활성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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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록산의 난 이후 당의 국력이 약해져
각 지방 절도사들이 분열, 독자권한을 가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음. ‘왕’으로 책봉되는 사례도 다수. 이들은 ‘신라 왕’과 동등한 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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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신라의
청해진 설치 뿐 아니라 당나라의 무역 허용 덕분. 당나라가 얻은 것은?
당 조정과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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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국가관념을 벗어나는 가르침을
주는 자료가 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