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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사연구회 10월 정례모임
 

2015-10-24 

2015년 10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5년 10월 17일(토)




 

1. 주 텍스트



*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발제 : 손병권)

*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발제 : 김성배)


* 박원호, <명초조선관계사연구>, 일조각, 2002(발제 : 김준석)


2. 보조 텍스트

  

3. 발제 (발제문은 첨부파일 참조)

 

4. 토론 내용 정리

 

전재성 : 조선 건국자들이 유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여말선초기에는 현실주의적 인식을 보인다. 즉, 조명관계를 '전형적인 조공관계'로 보는 페어뱅크류의 인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안정적 사대관계가 전체 한중관계의 맥락에서 지속되는 시기는 길지 않다. 오히려 한명기의 주장처럼 조선 내의 '반정' 이후 사대가 강화되는 양상이 나타남. 국제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국내정치를 봐야한다.

 

이 연구서들을 보고서는 당대 세력전이의 양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 부분이 현재 비어있는 부분이고, 다른 연구서들을 봐야함.

 

후금/명 사이의 조선의 외교적 선택 논쟁은 지금의 한국 외교전략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음에 동의.

 

이헌미 : 전재성 교수님의 말을 이어받자면, 조선-중국 관계는 조선이 안정, 명이 안정(전형적 조공관계), 조선 불안정, 명이 안정(명의 권위), 조선 안정, 명의 불안정(현실주의), 조선 불안정, 명 불안정의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

 

전략적 사대가 이념적 사대(재조지은)으로 넘어가는 부분에 대한 분석이 필요. 이는 전쟁의 사회적 효과이기도 함.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 것은 과연 당대의 입장에서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을 막을 수 있었겠느냐는 점.

 

손병권 : 이 시기 연구서들을 보면, 조선 내의 다양한 행위자의 모습이 드러남. 특히 정보의 양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느냐를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됨. 왕-상인-재야관료-관료-동북부 인민들의 입장이 다 상이하고, 정보접근의 양이 차이가 남. 특히 광해군은 선조에 비해 이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느낌.

 

나 역시 이헌미 박사의 주장처럼, 원명교체기의 경우 risk-taking(요동정벌)과 명청 교체기의 경우는 그 맥락이 다르고, 당시 조선 사람들이 명이 아닌 청을 선택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

 

또 하나 궁금한 것은 기미의 의미다. 기미는 흔히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재갈을 물리는 정책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때 조선 사료들에도 기미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참조할 필요).

 

전재성 : 후금이 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후금이 명을 이기고, 청제국이 될 지는 당대 조선인들은 몰랐을 것.

 

이헌미 : 외부 행위자로서 일본은 '칭제', '황가 표현', '천조' 등의 표현을 통해 중화 질서를 내파시키고자 함. 이는 19세기에도 반복되어 나타남.

 

하영선 : 전재성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당대 세력전이의 양상이 궁금한데 이 부분에 대한 정밀한 군사사 연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리적 전쟁뿐만 아니라 당대 조선인들 마음 속에서 진행되던 전쟁. 이 부분은 기존 연구서들에서 잘 나타나지 않음.

 

나도 '기미'를 사대-회유-기미-정벌의 프레임워크로 생각하는데, 실제 조선인들이 기미란 말을 쓸 때 이걸 전략적 의미로 활용하는지, 문화적 의미로 활용하는지는 명확한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이헌미 : 하영선 교수님의 프레임은 지나치게 중국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이를 동시에 넘어서야 함.

 

하영선 : 원명교체기의 정도전의 <삼봉집>이나 명청교체기와 관련된 정약용의 <요동정벌론>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지식인들의 내면이 어떻게 변했는가? 이 중 성리학의 역할은 어디까지인지를 분별해야 하는 작업. 이를 해내야 기존의 페어뱅크/신청사를 넘어설 수 있음.

 

김봉진 : 명청 교체기와 관련된 당대의 사상가들의 글들을 보고, 사상적으로 재조지은이나 당대 국제질서관을 따져볼 필요가 있음. <조천록> 등에 대한 독해가 그 출발. 일본에서 보면 조선의 성리학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당대의 관점에서 보면, 명에게 절개를 지키는 것이 당연한 것. (방효유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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