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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교사연구회 3월 정례모임
 

2015-03-21 

2015년 3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5년 3월 21일(토)




 

1. 주 텍스트



장페이페이 외, 김승일 옮김, <한중관계사>, 범우사, 2005. 


2. 보조 텍스트

  

3. 발제 (발제문은 첨부파일 참조)

 

4. 토론 내용 정리

 

김성배 : 발제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국제적 제약 이상으로 국내정치적 요인을 고려해야 이 시기 국제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

 

김수암 : 복잡한 관계에 대한 첩보상의 실패, 국제정치 판단에 대한 실패에 대한 부분이 고려되어야 한다. 묘청의 난에 대한 외교전이 어느 정도로 정확하게 상호간에 파악되었는가?

 

이헌미 : 전쟁을 해도 통치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기술상의 미비. 지리적 인접성이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 

 

김성배 :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면 고려-조선 시기의 인적 교류가 활발했고, 첩보의 수준이 상당히 높음. 삼번의 난에 호응하려는 조선의 모습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음. 

 

이헌미 : 고려 시기에는 해양을 통한 무역도 활발.

 

이헌미 : 배타적인 외교관계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음. 정보 독점으로서의 '인신무외교'. 사행록에 나타난 여러 정보도 이렇게 해석될 수 있음.

 

이택선 : 사대의 전형성을 어떻게 따질 수 있는가? 기준을 세울 수 있는가?

 

김수암 : 명과 청이 대주변 관계에 있어 조선을 차별적으로 다루었는가?

 

이헌미 : 명 초기에는 한중관계가 불신하는 태도가 높음. 조명관계가 전략적 사대의 안정/이념적 사대를 분별해야 함. 재조지은 이후 이념적 사대가 강화된 것 아닐까.

 

김성배 : 모범적인 조공국이 있다는 것이 중국 왕조에서도 바라는 바. 청의 다양한 관리책 중 조선은 중요한 축.

 

이원덕 : 한족 왕조와 오랑캐 국가에 대한 구별의식이 있었나?

 

이헌미 : 구별의식은 있었지만, 종족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에 가까움.

 

이원덕 : 조선과 에도시대의 종합국력차가 어느 정도였는가? 조선과 일본의 국력 차이는 1:3. 관념적으로는 문명과 야만. 종합국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하영선 : 종합국력을 측정하는 것 자체는 매우 근대적인 사고방식. 동아시아 지역질서 전체를 그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는가?

 

한중관계를 염두엔 둔 사례연구. 10. 진한시기 이후 중국이 분열상황을 보이는 위진남북조가 첫 사례. 통일신라 시기. 고려. 명청기. 동아질서에 대한 기존 프레임워크(페어뱅크-로사비)를 문제제기할 필요가 있음. 미국 국제정치학계의 hierarchyanarchy에 대한 제3의 프레임워크.

 

페어뱅크-로사비의 배합. 이념적-전략적으로 볼 것인가? 조공제도라고 이름붙일 것인가? 1. 물상적인 요소와 심상적인 요소의 overlap. 고려가 요금원을 어떻게 생각했나? 물질적 힘에 비해서는 요를 대우하지 않았고, 송을 대우했음. 물질적인 여건만 보면 로사비의 논의가 맞지만, 실제 고려의 외교는 다름.

 

청은 왜 이리 너그러웠나? 청은 legitimacy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근대적인 요소만으로 측정할 수 없다. 군대가 없는 나라를 어떻게 유지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야 함. 봉사도경을 보아도 북송도 그렇고 남송도 그렇고 이쪽도 더블맵.

 

한일교류사에 대한 동주의 글이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송요금을 IR theory로 재구성. anarchy+hierarchy. material+idea. 역사+국제정치

 

김성배 : 한중관계사의 approach가 아니라 동아시아질서사로 포장. 케이스를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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