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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연구회 2월 워크샵
 

2012-02-09 

2012년 2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2년 2월 9

발표: 연행록 모임 워크샵




주요 토론내용


1-1. 전재성 발표 “허봉, 조헌의 조천록과 한중관계”


(1) 지난번 논평 정리


- 하선생님 코멘트: 3가지 모델 a. 페어뱅크’s 중국적 세계질서 b. 헤비아’s 신청사적 제국 모델 c. 오늘날 한중관계

- 신청사적 문제의식을 조명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


(2) 이상적 중화 (문화적 의미) vs. 실질적 중화 (전략, 주체성)


- 배타적으로 양분할 수 없음. 두 개는 별개로 동시에 작동하고 있음.

- 조헌, 허봉은 상고적이고 이상적인 중화에 대한 상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실질적인 중화는 별개로 생각. 성리학적 이념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면 명도 비판하고 있음.


(3) 이론적 틀


- 페어뱅크 중화질서론: 주나라부터 시작되어서 제도적으로 잘 정비, 시대적으로 일관되게 작동되었다고 봄. 중원은 ritual에 기반, 잘 통치됨. benevolent hegemony와 일맥상통. 조청관계가 이것의 전형.


- Hevia 신청사론: 그러나, 조공책봉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무적인 조공무역 성격. 시혜적인 것이 아니라 방어적 측면 강하다. 잘 갖춰진 것의 evolution 아니라 시간에 따른 fluctuation 심함. 사대관계에는 이념적 측면과 실용적 측면이 있다.


- 제 3 모델: 전통질서에서 왕조간 관계를 관장하는 문화적 측면이 있음. 이상적 중화 받아들이면서 실질적 중화를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조선 보임.


(4) 조헌은 실질적 중화의 측면이 훨씬 강함. 명나라에 대한 강한 비판. 조선 문물 발전에 역이용하려는 의도. 신청사 연구자들은, 명나라에 대해서도 페어뱅크 전형적인 모델이 적용될 수 없다는 비판. 방어적인 측면 강했음. 대명사대주의냐, 전략적 사대와 이념적 사대인가. 그러나 조청관계가 아닌 조명관계이기 때문에 신청사적 접근보다는 논조를 완화하면서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논문 정리하려 함.


1-2. 토론


● 하영선 코멘트


(1) 주제를 직접 표현하는 제목 달기 (2) 3모델론은 유의미하다고 봄. 다만 전략과 명분이 결합되는 3rd 모델로 갈 경우, 중화의 5족(티벳, 몽고, 만주...)에 대해서나 조선에 대해서나 Hard와 Soft power가 역사적으로 다른 배합양상을 보임. (3) 원-명-청 중원의 변화와 조선 내부 변화(북벌론에서 존주론에서 북학론으로)가 맞물리는 교차 연동을 잘 포착해야 함.


2-1. 이헌미 발표 “월사 연행록과 명청교체기 한중관계”


2-2. 토론


● 김성배 코멘트


명이나 청이나 패권쇠퇴기에 Hevia적, 신청사적 접근이 맞아떨어지는 양상.


● 전재성 코멘트


광해군적 대중관/ 인조반정+서인측 대중관/ 그 와중의 월사의 대중관의 핵심이 무엇이었나?


● 하영선 코멘트


김성배 박사 말이 맞다면, 중국이 제국적으로 나오면 조선의 태도는? 조선 또한 전략적 사대를 강화하는가?


● 김성배 코멘트 


광해군의 전략적 사대는, 국내정치적 입지에 대한 고려가 크다고 봄.


● 전재성 코멘트


인조반정 세력의 국제정치 명분론은, 국내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전략적 사대라고 보기는 어려움. 명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은 1664년.


● 이헌미 코멘트


일본 변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 전재성 코멘트 


왜란으로 인해 명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에서, 기존 명의 천하질서에서 일본이 outsider였다면 청 입장에서는 일본이 의미있는 균형자, actor로 등장.


3-1. 김봉진 발표 “홍대용 연행록의 국제정치학”


홍대용 화이일야론, 역외춘추론. 조헌의 글을 봐도, 화-이는 변태 가능. 화이는 지리적, 인종적, 문화적 세 가지로 관념화 가능. 조선 지식인들은 문화적 중화의식 내지 화이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화-이가 변화될 수 있다(=이가 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 즉, 열린 화이의식. 그런데 임진, 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이러한 열린 화이의식이 지리적, 인종적 관념인 닫힌 화이의식=반청감정으로 진행됨. 그러나 홍대용에 이르면 사대관계의 명분과 실리 사이의 격차가 심해짐에 따라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의산문답>에 화이일야, 역외춘추가 나오게 됨. 따라서 홍대용의 화이일야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 청나라도 중화 문명을 지키면 화, 라고 인정해 줘야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지만, 시대적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논의. 나아가 서양까지도 교류해야겠다는 주장을 하다가 박제가-북학으로 이어지지만 단절되었다가 반 세기 후에 개화로.


3-2. 토론


● 하영선 코멘트


(1) 청조 건륭이 완전히 자리잡는 상황 (2) 홍대용은 국내 계보상 노론 아님.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열린 화이의식 주장하고 친청파로 분류될 위험을 감수하기 쉽지 않음 홍대용은 박지원과 절친. 담헌, 연암, 다산, 초정 모두 미묘하게 스펙트럼이 다름. 홍대용의 대중관을 그의 국내정치적 입지와 연결시켜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보다 북벌론적인 입장과, 보다 존주론-북학론적인 입장을 담헌과 함께 연결시키면 이 시대 스펙트럼이 완성되는 셈.


● 김현철 코멘트


설사 홍대용의 화이일야론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더라도, 발언 자체가 파격이고 당시 정치적 분위기상 18-19세기 연행사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을 수.


● 김봉진 답변


확실히 홍대용의 화이일야론이 그 전의 열린 화이론보다 깊은 의미를 가짐. 그러나 마치 홍대용에 와서야 화이일야론이 처음 등장한 것처럼 추대하는 것은 역사적 오류.


4-1. 정연 발표 “열하일기의 국제정치학”


(1) 건륭제와 판첸라마의 만남에 대해서 3가지 설이 있음. a. 건륭제의 요청 (판첸라마 티벳어 기록) b. 판첸라마가 자청 (건륭제 청실록) c.판첸라마는 건륭제를 만날 시기를 기다렸다 (판첸라마의 몽고 스승인 창갸)


(2) 판첸라마가 콜레라로 급서한 뒤 출간된 그의 전기에 따르면, 건륭제와 판첸라마의 만남에 대한 부분은 연암의 기록과 일치. 입증해 줌. 예를 들어, 고두 문제에 있어 판첸라마 전기에 따르면 양측은 상호지간에 고두하지 않기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음.


(3) 하영선: 건륭제와 판첸라마의 첫 번째(1780년 7월 22일)와 두 번째 만남(7월 23일). <열하일기>의 미시적 장면이라 할 만함. 이 만남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이 모델 3. 주연 건륭제. 조연 판첸라마. 사신들 엑스트라. 연암이 관객이 되어 보고 있음. 연기자들의 언행의 의도를 읽으려는 노력. 티벳 기록으로 판첸라마의 생각+청실록으로 건륭제의 생각+열하일기로 연암의 생각=라쇼몽적 그림의 완성. 청실록을 보면, 이미 열하에서의 건륭제 칠순잔치는 2년 전에 예정되어 있었음. 그런데 연암 일행은 북경에 갔다가 허탕치고 투덜+고생하며 열하로 이동. 청과 티벳 간의 정상회담이 128년만이라는 점에서 청으로서도 티벳으로서도 의미심장한 순간. 건륭제는 티벳어로 말을 건넸고, 판첸라마는 깜짝 놀랐다는 티벳 기록이 남아있음. 건륭제가 티벳어를 학습하여 구사한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을 바라보는 연암이 답답한 이유는?


1644년 이후 청의 대몽고외교(몽고 다루기)가 typology 1,2,3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 조선사신을 다루는 방식은 상대적으로 명분적인 측면 강함. (모델 1) 건륭제에게도, 판첸라마에게도 고두하도록 시킴. 조선에 돌아오면 유학자로서 중에게 절했다는 이유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우리쪽 사신들은 당황. 건륭제로서는 판첸라마 회유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들을 꿇린 것. 연암: 그렇다면, 청이 보기에는 절을 한 것 같고, 판첸라마+우리가 보기에는 절을 안 한 것처럼 보이게 절을 하는 방법은?


사실상 실제로 연행 가기 전에 연암은 이러한 제반 상황에 무지했음. 그러나 막상 열하에 갔을 때, 날카로운 전략적 통찰력 보임. 연암이 열하에 가서 수렵장의 규모에 놀라며 그 군사적 목적을 짐작하는데, 실제로 청 사료를 보면, 건륭제는 판첸라마 방문을 기념하여 연례 행사인 수렵=무력 시위를 취소했다.


4-2. 토론


● 이헌미 코멘트


열하의 파티장에서, 조선사신들이 3모델 중 1모델(동화)에 가까웠다고 할 때, 그 동화가 명분 때문인가 현실 때문인지 확정하려면 조선의 실물 군사력의 계량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북벌론이 반드시 이념적 사대라고만 할 수 없고, 이론적으로는 북벌/북학과 이념적 사대/전략적 사대 간의 다양한 결합이 가능하지 않은가?


● 하영선 코멘트


3모델이 중국의 복합론이라면, 조선도 그에 상응하는 복합 대응론을 가져야 함. 그러나 현실적으로 전략적 북벌론이 실재했는지 의심스러움. 율곡이 십만양병설 주장했을 때에도 실제 병력은 형편 없었음. 이 점에서는 연암보다는 다산이 요동론에서 볼 수 있듯 훨씬 복합적. 연암은 허생전에서 잘 드러나듯 soft power를 훨씬 강조. 현실적으로 hard power에서는 승산이 없기도 했음,


● 김봉진 코멘트 


종 때 북벌론은, 남송의 존재+ 명의 후계자 정성공이 대만으로 도망가서 저항 계속+ 오삼계 사번의 난= 중원의 반청운동을 컨텍스트로 하고 있음.


● 하영선 코멘트


그러나 효종 때 북벌론에는 그에 상응하는 실제 병력과 무기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았음. 그에 비해 몽고에서는 실제 저항전이 진행되고 있었음.


● 김성배 코멘트


조선이 병력 강화하는 움직임 보였다면 청이 진압했을 것. 조선 망했을 수도 있음.


5-1. 김준석 발표 “연행과 학술 교류를 통해서 본 18세기 말~19세기 초 동아시아 지식질서의 전개”


(1) 추사에게 사대, 존주론, 중화 등의 문제의식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음. 중국의 선진적인 지식질서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고 스스로를 정립할까에 매진. 여기에서 고증학 수용. 그렇다면 추사의 독자성은 서예, 서법에서 찾을 수 있을까?


(2) 추사체의 성립과정

고증학 수용은 중국 추수적이었고, 청으로부터의 반향이 없었던 반면, 추사체는 다름. 제주도 유배의 결실. 그러나 추사체가 전적으로 김정희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것 아님.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서체에 관한 견해를 전수받음. 그러한 서체론에 기초하여 당시 조선 서예계를 혹독하게 비판. 특히 원교 이광사가 비판의 주타겟. 그러나 옹방강과 완원이 금석고증학의 성과를 자기 서체화하지 못한 반면, 김정희는 이를 성취했고 예서의 정신적 측면을 강조했음. 글씨를 잘 쓰려면 학문이 깊어야 하고 인격이 수양되어야 한다.


5-2. 토론


● 이원덕 코멘트


당시에는 서체가 지식질서의 일부분?


● 김준석 답변


서예는 탁본이나 비첩 등의 첩문을 연구한 결과라는 점에서 지식질서의 일부분이라 하겠음. 동주 이용희 선생님의 <완당바람>을 보면, 뭔가 애증이 있음. <완당바람>이라는 챕터가 동주 책 중에 정선 겸재에 대한 호의적인 서술과 <심사정의 중국냄새>라는 비판적인 서술 사이에 <완당바람>이 놓여 있음. 추사가 나타나서, 조선의 지식계를 관념적인 방향으로 틀어놓았다는 원망과 추사체에 대한 감탄어린 인정이 섞여 있음.


● 하영선 코멘트


동주가 추사를 보면서,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 마음이 복잡하지 않았을까. 유홍준이 추사는 중국에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시대 세계적으로 최고, 라고 극찬하는 데 비해, 동주는 추사 유행으로 인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가 더 발전되지 못해 아쉬워함. 18세기 진경산수는 조선의 산수를 리얼하게 그려내자는 노론 북벌 배경으로 나온 것. 추사는 박제가의 제자로 박제가보다 더 북학으로 나아갔음.


서체나 문인화를 통해 추사가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를 쓸 수 있다면 좋을 것. 동주 지적대로 제주도 유배 시절이 추사에게 중요하다는 직감이 든다. 2,30대까지만 해도 청의 금석고증학 논쟁 따라가는 데 여념이 없었음.


6-1. 김현철, “19세기 전반기 연행사절과 김경선의 중국관: 북벌론과 북학파의 사이에서 ‘東道․淸器’의 시도”


(1) 김경선을 주목하는 이유: 19세기 중국관을 종합적으로 엿볼 수 있는 자료 (김창업->홍대용->박지원->김경선)

- 김경선의 <연원직지>는 기존 연행록의 발췌 종합인가, 새로운 복합화의 모색인가?


(2) 직지방적 의도를 통한 사행록의 집대성 시도. 3대 연행록의 장단점을 종합적으로 수용하고, 고증학을 적용한 전대 문헌으로 보충하고자 함.


(3) 한중간 역사 유적지 방문과 북벌론의 상기. 이자성. 김자점. 강홍립. 오삼계. 명에 대한 의리론.


(4) 김경선은 노론 출신이고 서장관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북학을 옹호하기 어려움. 그러나 열하일기의 상사-중사-하사 논의를 인용, 연암의 논지를 따름. 북벌-> 북학으로 가는 추세 하에서 동도.청기의 시도


6-2. 토론


● 전재성 코멘트


김정희나 김경선이나 이미 북벌 vs. 북학 논의를 넘어서 북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가 아닌가 함. 18세기 말 19세기 초. 북학을 받아들이고 나서 어떻게 청을 극복할 것인가 방법론을 논의. 그러므로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봄.


● 하영선 코멘트


1830년대의 키워드는 무엇인가? 언제까지 북학이라는 말을 쓰는지?


● 전재성 코멘트


정조 죽고 분위기 일변


● 김준석 코멘트


서학에 대한 탄압이 결정적 계기. 1801년.


● 하영선 코멘트


1830-31년간에 박규수가 출로할 줄 알았다가 기대가 어긋나서 15년을 놀게 됨.


● 김성배 코멘트 


노론 입장에서는 세도 정치, 국내 정권 안정


● 이헌미 코멘트


이 시기 민란 빈발


● 전재성 코멘트


이앙법 등 개발로 상업 발달, 소자본상인 출현을 배경으로 함


● 하영선 코멘트


1800년 정조 죽고 나서, 효명세자가 정조의 유지를 지키고자 박규수에게 애정을 표현, 새로운 지식 그룹을 키우려고 함. 1830년대의 성격 규정+김경선 등 지식인 그룹의 입장 규명. ‘동도 청기’라는 말도 재고 요함.


● 김봉진 코멘트


김경선이 1832년과 1851년 2번 사행을 가는데, 정사로 간 1851년 사행 기록은 없는지? 흥미로울 것 같은데.


● 김준석 코멘트


추사보다 10살 위. 노론 출신이라 추사처럼 유배 경험 없는 권문 세도가였으리라 생각.


● 김봉진 코멘트


북학파 가운데 서유구와 이서구는 순조 때까지 살아남아 높은 벼슬 함. 그러나 ‘북학파’가 1800년대에 들어 어떤 논의를 했는지 모르겠음. 김경선의 고손자가 김윤식인데, 친청온건파 김윤식을 북학파의 계승자로 볼 수는 없겠는가?


● 하영선 코멘트


1830년대 박규수의 경우에는, 의복에 대해서 쓰고 있던 시절. 박규수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때는 1840년대. 1830년대를 김경선을 통해 제대로 조명해 주면 이후 도움이 많이 되겠음.


● 김준석 코멘트


실학파와 개화파 사이의 연결 고리 문제는 역사학계의 쟁점.


7-1. 김성배 발표 “환재 박규수와 시무(時務)의 국제정치학”


7-2. 토론


● 김봉진 코멘트

 

1. 19페이지 양절체제론, 여기에 붙여도 된다고 했는데, 문제는 하 선생님과도 결론 못 냄. 유길준의 양절체제론은 또 다른 문제. 그 당시의 환재가 바랬던 만국공법체제 조공체제 이점을 사귀는 양절. 유길준은 그런 것이 안 되는 것에 대한 비판들. 속국체제, 내치에 간여하니 정의 양절이다. 맥락은 완전히 다르다.


2. 김명호 선생님의 책. 김윤식, 환재 등 서신은 믿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공명심이 들어간 것이 아니냐. 경종은 좋은데, 절대 신빙성 부족은 아니다.


3. 근래 발견한 것인데, 환재가 쓴 편지 속에 보면 만국공법에 등장하는 용어가 그대로 등장함. 서너개 등장함. 대원군에게 쓰는 편지도 나옴. 읽지 않고는 없는 일. 걱정은 만국공법은 아니라도 조약문에서 보고 옮겨 쓸 수 있다는 점. 조약문이 교과서이다. 강화도 조약 때는 벌써 있었다. 청영천진조약 끌고 와서 얘기하는데, 꼭 봤을 것이다. 1872년 연행, 71년 청일수호조약 조문까지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대미, 대일, 꿈꿨다는 것은 허무함. 국내적 여건이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것을 얘기할 수 있냐 없냐. 중국과의 관계를 보아가면서 추진하고자 했던 것.


● 김수암 코멘트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녹아남. 그림이 끊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박제가도 그렇다. 학-질서 속에서 끌고 나가는 것. 발표만 들으면 개인적으로 벌과 학 속에서 보다가 서양이 들어오는 관계 속에서 보는 것. 서양의 구체적인 작동원리를 보게 될 때, 청과의 관계를 어떻게 그리냐 하는 것이 약하지 않냐. 앞부분과도 연결되지 않냐. 청에 대해서 학인지, 아니면 관계설정이 학을 넘어서 서양이 들어오는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 하영선 코멘트


사학계 논쟁으로 치면 김용구 선생은 정치학 해석에 대해 다시 반론하려면, 조금 더 정치학적 논리를 더 체계화해야 한다. 김수암 박사 얘기 좀더 끌고 가면, 자세히 보면, 효명세자 때 되어서 1840년 후반인데, 초기 척사 상당부분 있다는데, 미간 글에서 굳이 세분한 이유는, 해방은 존재, 오더를 설정하는 것. 척사는 사니까 그렇게 안보는 것. 해국도지 처음 읽었던 환재는 가장 앞에 가있어서 조금 더 앞으로 해석하고, 만국공법/해방론 나눈 것은, 뭘 읽었냐가 관건. 이미 조회문 쓰고 있는데, 조회문에도 국제법 용어 쓰고 있음. 관계문헌에서 보면 이 사람이 만국공법 충분히 세밀하게 검토했냐는 것은 조심스럽다. 해방론/만국공법 차이는 the other를 논리, 조직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문명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 기본이다, 이 시기부터 조회문 들어오는 시기까지도 이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국제정치학으로 보아도 저쪽의 원리가 표준으로 작동한다. 그러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국제정치학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작동원리의 변화, 기본원리는 균세와 자강인데, 이 표현을 박규수가 확실하게, 또 그것이 기본원리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 속에서 1873년 우의정 관두고 확고한 것이냐, 그것을 증명해주려면 좀더 세게 쳐줘야 한다. 사인방이 배웠다는 것이 해국도지 연암집이라는데 좀 아쉽다. 하다못해 만국공법, 나아가서 균세자강. 만국공법도 사실은 표준은 저쪽도 아니라는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중국을 훨씬 뛰어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인데. 조일수호조규, 북한 예를 드는데, 대원군, 고종 동시 설득하는데, 교섭대표는 신헌이었고, 강위가 따라감. 이종석이라면 김박사가 그 역할을 했는지는 모름. 심행잡기 강위가 쓴 것이 중요함. 다 몰랐다고 함. 조약 맺는 방식 등 다 몰랐다. 완전히 몰랐다. 이 사람들이 정말 충분히 알았으면 구로다가 만국공법을 주고 갔을까. 보면 내공을 알 것 아니냐. 조약을 맺을 것은 알았지만, 조약 작성은 저쪽이 했다. 국내정치가 무섭기도 했지만, 손을 댄 것은 국제정치학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것도 다 알았는데 그렇게 했다, 대원군 설득 위해? 초기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뒤에는 페이스메이커의 속도를 더 끌어내려고 하는 경우 더 치밀해져야 한다. 논리와 문서가 다 따라줘야 한다. 김명호 아군으로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규먼트는 재미있다. 국제정치학 페이퍼로는 커런트한 것보다 이것이 더 깊이가 있다. 단 고수들 싸움 속에 들어가 치고박고 하려면, 김명호를 무장해제시켜려면 더 들어가야 한다. 올해 회의는 해야 하지만, 김명호 교수가 꼬리내렸다고 하기에는 여지가 있다.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불이 붙어야 하는 논쟁인데. 김박사가 이렇게 얘기하면 또 와-하고 다들 따라갈걸. 박규수가 뛰는 속도를 정확하게 잴 필요가 있다. 1873,4,5 자세히. 두 번째 연행이 특히 중요하다. 완전히 균세지법으로 전환했냐? 조선책략은 이미 써졌겠냐. 그러면 김홍집이 갔을 때 조선책략을 받아올 필요가 없었을 세월이 왔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요즘에도 굉장히 조심스럽다. 추사와 다르게 중국음식에 굉장히 예민했던 사람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정치적인 것 때문데 다 숨긴 것이냐, 아니면 조선이 갖고 있었던 한계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표준이 저쪽으로 갈 수도 있는 감이 와야 하는데. 첫 번째 연행은 고종보고 걱정말라고 했다. 두 번째 쉽지 않다. 그렇다고 판이 완전히 넘어갔다고 하지는 않았다. 어중간한 상태지만. 부를 수 있냐? 이 시기만 해도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기니까 신중해야 한다.


● 전재성 코멘트


국제. 한중관계도 국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조청관계는 전통적이기 때문에.


● 하영선 코멘트


양절. 10년을 끓어내리자는 얘기인데. 유길준이 생각하고 있었던 서양과 청. 박규수가 생각하고 있었던 서양과 청은 어느 정도의 편차가 있는 것이냐.


● 김성배 답변


김윤식, 박규수, 다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 하영선 코멘트


그것은 맞다. 표준에 대한 판단. 유길준은 이미 표준은 저리로 갔는데, 현실적으로는 감국정치, 죽을 판이니. 왼쪽발에 웨이트가 좀 더 가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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