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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연구회 1월 정례모임
 

2012-01-14 

2012년 1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2년 1월 14일(토)

발표: 김준석, 김정희의 연행과 학술교류를 통해서 본 18세기말-19세기 초 동아시아 지식질서의 전개




주요 토론내용


● 김현철 코멘트


추사가 직접 쓴 연행 관련 기록이 있는지?


● 김준석 답변


거의 없음. 승정원일기, 실록 등에서 김노경 사행의 전거를 찾을 수 있지만, 자세한 김정희의 연행 행적은 아님.


● 김성배 코멘트


청대 고증학 발전에 따라 출현한 전문 학술집단이 송명대 이학자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 김준석 답변

송대 학자들은 과거 시험을 통과하여 관료로 진출함으로써 생계가 유지되었음. 학문 자체가 직업 아님. 그런데 고증학자들은 국가, 지방정부, 서원, 관료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경학의 편찬 작업에 참가함으로써 그것이 생계가 됨. 사고전서 편찬작업이 가장 대표적인 대규모 사업.


● 김성배 코멘트


완당 뿐 아니라 그 전 연암이나 이후 환재도 연행에서 공식적 활동보다는 주로 중국 학자들과의 교류가 초유의 관심사. 19세기에 들어, 서학과 전통적 지식과의 싸움에서 동도를 포기하지 않다가 과거제도 폐지하는 시점에서야 결국 항복하는 양상. 중국에서 송학 대신 고증학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 김준석 답변


송대 성리학의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이고 우주론적인 해석에 의해 고대 경전을 잘못 읽었다는 반성에서 출발. 황종희, 고염무 등. 경전의 reality와 실용성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


● 김성배 코멘트


이들이 청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는지?


● 김준석 답변


그렇지 않음. 황종희, 고염무 등은 강남 지역 인사.


● 김현철 코멘트 


18세기 말 19세 초 중국의 정치적-학문적 입장의 조선적 재해석이라는 관점에서 추사를 평가한다면?


● 김준석 답변


제일 중요한 부분이고, 뭔가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고 싶은데, 추사의 남아있는 저작에서 그것을 끌어낼 수는 없음. 왕희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매우 지엽말단적인 논의들을 천착하고 있어서 중국 학문의 update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음.


● 김현철 코멘트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나 실학자들의 입장과 비교한다면?


● 김준석 답변


2004년 안외순의 김정희 실사구시론에 대한 논문이 흥미로움. 추사=실학자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실사구시란 경세치용적 실학이 아니라 고증학적 학문방법론의 의미로 사용되었음.


● 전재성 코멘트


김정희를 고증학자로 보는 것이 맞는가? 김정희가 박제가에게 사사받았다고 하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북학이 이렇게 완전히 내재화되는 것이 가능한가? 김정희가 문제의식 없이 방법론만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을까? 김정희는 첫째, 남이 아는 것은 쓰지 않고, 둘째, 경세에 관한 글은 쓰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함. 청나라까지 알려진 스칼라쉽이라고 하면, 김정희가 청대 정신사를 받아들인 내적 과정을 남아있는 글에서만 간단히 추론할 수 없음. 쓰여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재구성이 필요. 다산과도 경학에 대한 이견으로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는데.


● 김현철 코멘트


1809년 연행의 경험이 미친 영향, 그리고 세한도. 이 두 가지를 자료로 최대한 활용해야.


● 하영선 코멘트


우리 작업이 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한 고민. 추사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새로워야 함. 추사에 대한 기존 연구로는 서예사나 회화사쪽 작업. 저작에 관한 연구로는 후지스카 지카시, 후마 스스무, 동주, 유홍준 등이 있음. 기존의 추사 image에 대한 정리가 필요. 


추사체나 세한도 자체를 우리 논문에서 다룰 수는 없지만, 가설을 세울 때에는 참조가 됨. 추사체, 라는 독창적 문체를 남겼다는 점에서 김정희는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졌음. 그런데 이러한 독창성이 학문에서는 발현되지 않았을까?


추사의 중국학문에 대한 게걸스러움의 연원을 밝혀보자. 연암보다 초정이 더 북학에 적극적이었고, 추사는 초정보다 더 맹목적으로 중국학을 받아들였다고 결론짓는 게 온당한가?


후지스카 지카시의 추사 연구는, 조선의 청 지식 수용이라는 문제에서 출발. 그러므로 그 시각에 집중되어 있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함. 후마 스스무의 연구는 조선에는 주자학만이 있고 그 나머지가 없었다는 이유로 한중일 삼국 중 학문 발달이 가장 지체되었다고 평가. 그러나 학문의 발달 정도는 그 다양성 뿐 아니라 그 문제의식과 깊이까지 포함하여 평가되어야 함. 예를 들어, 한중일 삼국에서 고증이나 금석학은 정치학적으로 해석하면, 송에서 시작되어 명조까지 이어진 주자학을 상대화시킨 결과를 가져옴. 동주의 추사 연구. 제주도 9년 유배생활 동안 추사체가 완성되었는데, 이는 게걸스러운 전파 수용의 축적+수없이 버린 글씨의 결과 탄생한 자기 standard의 구현. 그런데, 추사체의 이러한 독자성이 학문의 영역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추사가 고증학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면의 동기는?


추사가 제주도 시절인 1844년 입수한 <황조경세문편>에 대해서는 김명호교수의 박규수연구에 자세히 나오는 해설을 참조할 필요가 있음. 연암의 경우, 자신의 저작에 대해 행간을 읽으라는 말을 끊임없이 하고 있음. 법고창신의 방법론적 중요성을 주목해야 함. 명과 청의 장점을 복합화하려는 입장이 엿보임.


다산은 주자주를 넘어서 원시유학까지 공부하여 다산주를 새로 썼다는 점에서 북학파보다 상대적으로 자기 목소리가 큼. 그 다음으로 연암은 복합적 요소 강함. 박제가는 연암보다 더 나아가서 북학적인 입장이고, 추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아예 북학을 내재화했다고 타이폴로지할 수 있는지 심층 토론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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