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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북의 4자회담 자세
 

조선일보 

1997-08-06 

○강­온 정책대결 없어


서울에서는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대통령 선거운동이 본격적인 정책대결보다는 낮은 수준의 자질시비로 우리들을 답답하게 하는 속에, 뉴욕에서는 우리가 풀어야 할 또 하나의 답답한 숙제인 한반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중국이 처음으로 참여하는 4자회담 예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4자회담 예비회담이 국내정치 때문에 겪고 있는 답답함을 시원스럽게 풀어줄 것인지 아니면 더 답답하게 만들 것인지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4자회담 예비회담에 대한 북한의 정책방향을 정확하게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북한의 정책방향을 독해하는 과정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북한의 독특한 정책 결정과정에 대한 오해이다. 미국 국무부는 북한과의 협상에서 오랫동안 북한내에 온건과 강경, 또는 외교노선과 군사노선의 정책경쟁이 존재하며, 따라서 유연 또는 양보의 협상전략이 북한 온건세력의 영향력을 강화시켜, 궁극적으로 정책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미국적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 국내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왔다.


그러나 금년 2월에 망명한 황장엽씨가 행동과 언어로 설득력 있게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북한의 정책결정은 온건과 강경의 정책대결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을 중심으로 하고 「김심」읽기에 주력하는 측근을 주변으로 하는 독특한 틀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김정일체제는 오늘의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본격적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고난의 행군」을 통해 우리식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정책을 중심적으로 추진하여 왔다.


개혁개방파의 설 땅이 제대로 없는 속에 「고난의 행군」파가 주도하는 김정일 체제는 1930년대의 시각으로 1990년대의 고난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고난의 행군」파에게 4자회담이 가지는 의미는 1차적으로는 식량위기의 해결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며, 2차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을 활용하기 위한 모양갖추기이다.


○「고난의 행군」 계속


따라서 4자회담 예비회담에 참석한 북한대표단이 취할 수 있는 행동반경은 첫째 식량지원을 최대한 확보하고, 둘째 미국과의 평화협정 또는 잠정협정을 최대한 추진하되, 셋째 남북한중심의 평화체제논의를 배제하게 될 것이다.


4자회담이 한반도문제 개혁을 위한 실질적 모임의 장소가 되려면 북한이 「고난의 행군」 대신에 개혁개방의 입장에서 4자회담에 참석하는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속에서 열린 4자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은 무리하게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얻어보려는 조급성이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적 시각에서 가능한 한 본회담을 지연하고, 형식화하는 속에 실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에 반해서, 우리 정부가 임기내에 성급하게 형식적 성과라도 얻기 위해 본회담이 늦어지면 예비회담에서라도 실질적 논의를 시작하려는 경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현재의 북한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4자회담은 실질적이기보다 형식적인 모임이 될 수밖에 없다면, 우리 정부는 어떠한 입장에서 4자회담에 임해야 할 것인가를 현정부적 차원을 넘어선 국가적 차원에서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4자회담이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진정으로 기여하도록 하려면,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끝내고 진정한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서 1990년대의 문제를 21세기의 시각으로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어려운 과제를 위해, 우리 정부는 미국과 중국과의 긴밀한 공조체제하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본회담을 추진하고, 남북한 정부가 명실상부하게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4자회담에서, 우선 북한의 식량지원문제는 단순한 미봉책의 일회적 지원을 넘어서서 북한 농업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당사자­쌍무­다자적 접근을 총체적으로 논의하고 추진하도록 해야 한다.


○신중한 접근 필요


이와 함께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 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한반도의 군사적 신뢰구축, 군비통제,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변 강대국들이 이를 국제적으로 보장하는 21세기형 복합평화체제를 추진해야 한다.


따라서 현정부는 남은 임기 동안에 남북한 정부간의 직접적 만남이 불가능한 속에서 4자회담을 통해서라도 북한이 1930년대의 시각을 넘어서서 21세기의 시각에서 당면한 고난을 극복하도록 돕는 동시에, 우리 나라의 21세기적 해결 방안을 미­중을 비롯한 국제협조하에 장기적으로 추진하려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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