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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식량 지원의 정도
 

조선일보 

1997-04-23 

○북,군비축소부터


북한의 식량위기가 점차 위험수위에 접근하고 있다. 북한의 식량위기에 대해 상당한 동안 적지 않은 의혹과 논란이 제기되어 왔으나, 이제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국내외적 합의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 이러한 합의는 북한당국의 식량위기에 대한 공식발표나 국내외의 제한된 현장보고를 넘어서 북한당국의 내부 발언과 대외적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김정일은 지난해 연말 김일성 종합대학 창립50돌 기념의 비공개 연설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식량때문에 무정부상태가 되어가고 있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다. 동시에 북한당국이 한미공동의 4자회담 제의를 식량외교의 실리적 차원에서 일단 조심스럽게 대처하고 있는 모습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비교적 선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북한의 식량위기가 북한주민들의 굶주림이라는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속에서 국내적으로는 북한돕기운동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가고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할 숙제는 북한주민의 굶주림을 가져다 주고 있는 북한 식량위기의 총체적 해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북한의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우선적 실마리는 북한당국의 문제해결을 위한 새로운 모색에서 찾아져야 한다.


○「지원협의체」 구성을


하나의 기업이 경영방식의 근본적 결함으로 부도라는 경제적 죽음을 맞이하게되는 경우 효율적인 경영전략의 과감하고 신속한 도입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러한 노력속에 외부지원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량위기에 따른 북한주민의 대규모 기아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한당국은 새로운 생존전략에 기반한 식량정책을 하루빨리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차원에서는 이제까지의 군사우선주의에서 시급히 경제우선주의로의 과감한 전환이 한반도 군비축소등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전지구적 차원의 대북 식량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식량정책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최대한 높여서 지원 당사자들의 신뢰성을 획득해야 하며,최종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지원 당사자인 한국의 도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남정책의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새로운 노력이 단기적으로 쉽사리 가시화되기 어려운 한계속에서 북한주민들은 현실적으로 굶주림을 통한 죽음의 위협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당국의 정책변화를 기다리는 속에서도 북한주민의 삶을 위한 대북 식량지원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과정에서 동기의 인도주의적 노력이 결과의 인도주의를 낳게하기 위해서는 보다 치밀하고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이 필요하다.


대북 식량지원이 단순한 불우이웃돕기 차원에서 추진되는 경우 기대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할 위험성이 큰 것은 우선 지원규모의 방대함이다. 북한당국이 4자회담의 참석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1백50만t의 식량을 국제시세가 가장 싼 옥수수만으로 환산하여도 2천억원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규모의 식량이 굶주림에 지쳐 있는 북한주민들에게 직접적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전달과 분배과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국제 컨소시엄 필요


이러한 대규모의 대북 식량지원을 효율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남북당국의 주도하에 국제적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나 현재의 남북관계 여건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북 식량지원을 희망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체계화되지 않은 개별적 노력을 시도하는 것도 비효율적 대안이다. 따라서 제3의 대안으로서는 모금, 전달, 그리고 분배과정에서 투명성과 효율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국내적으로는 대한적십자사를 중심으로 대북 식량지원 협의체를 구성하고, 국제적으로는 대북 식량지원의 체계화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 식량위기의 궁극적 해결은 단순히 북한당국의 자구적 노력에 대한 기대나 일회적인 대북 식량지원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북한의 식량위기는 자연재해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군사우선주의, 중공업편향의 경제정책, 농업생산체제의 비효율성, 농업기술의 낙후와 같은 구조적 제약에 기인하고 있으며, 북한당국은 이러한 구조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정책의 추진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우처럼 국제컨소시엄 형태의 「한반도식량개발기구(KFDO)」의 형성을 통해 대북 식량지원과 병행하여 북한농업의 구조적 제약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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