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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4자회담의 허실
 

조선일보 

1997-03-12 

○북,대미관계 초점


지난해 9월의 북한잠수함 침입사건과 올해 2월의 황장엽 망명사건이후에 열린 4자회담 설명회와 미­북 준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이 비교적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임으로써 4자회담의 장래에 대해 국내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4자회담과 미­북 준고위급회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황장엽 망명사건의 의미를 보다 심층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황장엽 망명이 갖는 개인적 의미는 현재까지 밝혀진 정황으로 보아서는 정치적 망명과 이념적 망명의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황장엽의 망명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북한체제의 현실이다.


북한체제는 역사적으로 국내차원의 당 및 관료중심의 정치적 기반, 군과 치안중심의 폭력적 기반, 중공업중심의 경제적 기반, 주체사상중심의 이념적 기반, 그리고 국제사회주의체제 중시의 국제적 기반, 남한의 혁명적 기반 등 6대 기반위에 건설되어 왔다. 그러나 탈냉전의 세계사적 변화속에서 북한은 국제사회주의체제의 해체에 따른 국제적 기반의 상실, 국내경제의 지속적 부진에 따른 국내 경제적 기반의 급속한 약화를 맞이 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주체사상의 이론적 지주로서 북한 정치권의 중심부에 속해있던 황장엽의 망명사건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북한이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이념적 기반의 흔들림과, 혁명은 불가능하되 망명은 가능한 정치적 기반의 불안정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체제를 받치고 있는 6개의 기반중에 4개의 기반이 상실되었거나 흔들리는 속에서, 김정일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의 현정치권력은 21세기의 북한체제 생존전략을 짜야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속에서 김정일체제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급속하게 약화되고 있는 국내적 기반의 회복및 강화이며 그중에도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적 기반의 개선이다.


국내적 기반의 강화를 위해서 북한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을 활용하여 국제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에 북한은 통일전선전략에 기반한 대남정책이나 통일정책을 새롭게 재검토하여 보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남­북대화 형식적


북한의 이러한 21세기 생존전략에서 본다면, 북한이 4자회담과 준고위급회담에 대해 취할 정책 방향은 비교적 명확하다. 북한이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도움을 얻어 한국과의 체제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선 준고위급회담을 통해 제네바핵협상에서 원칙적 합의를 본 미국과의 경제, 정치및 군사적 관계개선을 가시화하기 위해 적극적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북한의 국내적 기반이 현재와 같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폭력적 기반의 의존이 심화될수록, 북한은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고난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 북한은 필요하다면 한국이 참석하는 4자회담에 대해서도 보다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북한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실질적 만남은 북미고위급회담을 통하고, 형식적 만남은 4자회담을 통하려는 차별정책을 계속해서 시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하의 4자회담에서는 우리 정부가 희망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과 남북한간 긴장완화및 신뢰구축 문제를 남북한 중심으로 실질적으로 논의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한편, 북한이 4자회담대신에 추진하고 있는 미국과의 2자회담을 통한 국내기반의 강화노력은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적 사고, 행동, 제도 등의 미비로 본격적인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다. 따라서 북한체제의 국내적 기반이 지속적으로 축소재생산되어가는 속에서 북한 체제의 군사적 기반에의 의존은 보다 심화되어갈 것이며, 이에따라 국내 체제적 긴장은 높아져갈 것이다.


○국내정책 효율화를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 정부가 희망하는 것처럼 4자회담 또는 2자회담을 통하여 풀려나가기 보다는 국내기반의 지속적 약화를 겪고있는 북한이 체제붕괴를 막기 위해 최종적으로 한국정부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게 될 것인가에 따라 다르게 풀려나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 통일정책의 핵심은 대북정책의 효율성 이전에 국내정책의 효율성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국내적 기반을 디디고 서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북한체제의 효율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4자회담을 넘어선 새로운 발상의 만남의 형식을 국제적인 연대속에 강구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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