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시론] 핵 협상 미로찾기
 

조선일보 

1995-06-09 

○제네바 잘못 반복


난관에 봉착해 있는 북한 경수로 공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콸라룸푸르 미­북 준고위급회담이 최종적인 의견조정을 거치고 있다. 지난해 10월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북간에 제네바에서 체결되었던 기본합의문의 경우에 우리 정부는 주관적 판단에 따라 한국형 경수로와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성급한 입장을 취하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공식입장은 한반도의 차가운 현실속에서 반년도 되지 못하여 궤도수정을 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제네바의 잘못을 콸라룸푸르에서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북 준고위급 회담의 협상과정이 보여주는 의미를 객관적 그리고 현실적 시각에서 읽어낼수 있어야 한다.


콸라룸푸르협상의 핵심은 한국의 중심적 역할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 경수로공급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희망하는 「한국의 중심적 역할」과 북한이 원하는 「남한의 주변적 역할」의 타협가능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에서 경수로노형은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결정하고 경수로 공급과정에서 한국의 일정한 역할을 인정한다는 것을 한국의 중심적 역할로 확대해석한다면 우리는 제네바의 잘못을 다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국내역량강화, 선진자본주의 국가와의 관계개선을 통한 국제역량강화, 그리고 기존 대남정책의 유지를 통한 남한 민주역량강화를 중심으로 하는 탈냉전 3중생존전략을 변경하지 않는 한,「남한의 중심적 역할」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적대관계에 놓여있는 상대방인 남한에게 북한이 체제의 대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에너지의 중­장기 계획의 일부인 경수로를 의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북한은 외교부의 공식견해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단기적 그리고 간접적 의존 가능성이 있는 제조부문에서 한국의 역할은 눈감을 수 있으나, 장기적 그리고 직접적 의존 위험성이 높은 설계, 건설, 운영, 사후관리부문에서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넘어서기 어렵다.


반면에 한국은 북한 경수로공급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게 될 입장에서 제조부문의 일정한 역할과 나머지 핵심분야에서의 주변적 역할을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


○이익 극대화 전략


이와 같이 현단계에서 협상불가능한 문제를 미국은 자신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증가시키는 속에서 협상을 통해 남북한의 기본적 입장차이를 조절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의 「중심적 역할」과 「주변적 역할」의 입장차이는 미국이 기대하는 것처럼 단순한 양적 비율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차이이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 이 문제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합의아닌 합의가 이루어지더라도 제네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남북한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풀릴 수 없는 숙제로 되살아날 것이다.


북한은 콸라룸푸르회담에서 새로운 의제로서 경수로 건설에 필요한 추가시설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지난해 5월에 인출한 핵연료봉을 재처리하고 영변 핵시설에 대한 핵동결을 해제하겠다는 위협외교를 시도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주장은 기본합의문 타결이후 뒤늦게 제기되었다는 면에서 부당한 억지이기는 하나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북한이 국내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에너지 중 장기계획으로서의 경수로 건설과정에서 남한과의 관계개선이라는 정치적 손실을 최소화하고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이러한 입장이 증명하고 있는 것은 일부의 주관적 해석과 같이 북한이 경수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협상과정에서의 정치, 경제, 군사적 대가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은 일단 자신의 정치­경제적 목적에 맞는 경수로건설을 추진하고 있으며,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배제한 경수로를 건설할 수 없는 경우에는 경수로 대신에 협상과정에서의 부수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회담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경수로협상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협상 장기화 조짐


북한의 대남정책의 변화에 따른 남북한관계의 개선이 전제되지 않는 한 협상의 타결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나 협상의 지속은 북한과 미국이 모두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협상이 타결되지 않더라도 지속되는 속에서 자신의 체제유지에 도움이 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미국은 최소한 북한핵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동결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결없는 협상의 장기화속에서 어려운 것은 한국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한국이 주변적 역할을 하는 경수로공급과 타결없는 협상의 지속의 갈림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정부는 경수로문제를 포함한 남북문제에 보다 일관성있는 장기적 대안의 모색을 하루 빨리 마련해야 할 것이다.〈서울대 사회과학대 외교학과 교수〉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