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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신 세계질서」를 바로 읽자
 

중앙일보 

1991-03-14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이 자신을 죽이려던 자객 지운영사건이 있은 후에 남긴 글에서 19세기말 당시 조선의 국제정세관을 크게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 영국의 거문도점령사건이 발생했으나 조선에서 영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조정의 신하들도 영국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면서 국가의 존망을 논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흐름 주목할때


이러한 속에서 조선조는 근대국제질서의 적응에 실패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뼈아픈 역사를 겪게 되었다.


한세기가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걸프전쟁의 종결과 함께 국내외에서 신국제질서에 대한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들의 대부분은 대단히 피상적이고 단기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조선조가 밀려오는 근대국제질서에 대해 첫번째 개항을 해야했다면 20세기말에 한반도는 다가오는 탈근대국제질서에 대해 두번째 개항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가 19세기 당시의 조선조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기본구조와 작동원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바로 읽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걸프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벗어나 근대국제체제에서 탈냉전 국제체제의 징검다리를 거쳐 탈근대국제체제로 흘러가는 역사의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질서의 핵심 단위체의 변모가능성이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걸프전쟁 이후 국내외적으로 미국의 상대적 쇠퇴론보다 미국의 상대적 부흥론이 보다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미국의 상대적 부흥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는 안된다.


1990년대의 미국은 1950년대의 미국과는 달리 주요관련국들의 긴밀한 협조하에서만 세계질서의 주도국가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한미 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조심스럽게 조정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현대 국제체제의 기본단위를 이루고 있는 근대국가가 그 자신의 순기능에 못지 않은 역기능으로 인해 새로운 변모를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광역국가 또는 과민족국가를 위한 노력이 구체화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도 점차 신아시아질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지정학적 발상 넘어야


이러한 속에서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4강에 둘러싸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현대 국제정치가 점차 공간의 국제정치보다 시간의 국제정치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속에서 종래의 지정학적인 발상을 넘어서 시간의 정치학을 통한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세계질서의 중심 활동영역의 변화 가능성이다. 근대국제체제 속에서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부국강병의 국가이익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다가오는 세계질서속의 국제군사질서는 상당한 변화를 겪게될 것이다.


우선 미소와 유럽을 중심으로 보면 점차적으로 이해의 갈등을 군사적 수단으로 해결할 가능성은 감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3세계의 경우에는 미소나 유럽의 경우에 비해 아직까지 군사적 수단의 중요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최근의 걸프전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한 군사력은 단순한 군사력이 아니라 국제적 명분에 기반한 첨단 기술의 군사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국제경제질서는 미국의 상대적 부흥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경제질서보다는 새로운 단위체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경제질서의 모색이 강화되고 있다. 이와 함께 탈근대 국제경제체제는 첨단 과학기술체제의 주도권에 따라 새롭게 짜여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감한 기술투자 시급


새로운 세계질서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넘어서 지식력의 중요성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탈근대국제질서의 새로운 주도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국제커뮤니케이션 질서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활동영역의 변화속에서 한반도가 하루 빨리 냉전체제에 기반한 군사력 증강의 지나친 부담을 벗어나 첨단 과학기술을 위한 과감한 투자와 국제커뮤니케이션질서의 활용을 통한 지식력의 증강을 세계적인 수준에서 이루지 못한다면 21세기의 탈근대국제질서 속에서 또 한번의 어려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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