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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막골
 

중앙일보 

2005-09-11 

오랜만에 영화를 봤다. 웰컴 투 동막골. 영화는 관객들을 1950년 9월 한국전쟁 중 동막골로 안내한다.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국판 유토피아 마을에 우연히 찾아든 국군 탈영병, 인민군 낙오병, 미군 조종사는 우여곡절 끝에 손에 손잡고 동막골 주민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막골의 꿈은 오래가지 못하고 미군의 공습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참하게 깨져버린다는 줄거리다.

동막골의 인기는 높다. 관람객 수가 700만 명에 육박하면서 한국 영화 역대 흥행순위 4위를 기록하고 있다. 관객들은 한국전쟁 연구자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전쟁의 원인.과정, 그리고 영향 같은 머리 아픈 주제 때문에 동막골을 찾아오지 않는다. 동막골에서 그동안 익숙했던 것과는 다른 엉뚱한 한국전쟁을 보러 온다. 무대에서는 강원도 사투리로 전쟁을 희화화하는 동막골 주민들, 국군.인민군.미군의 환상적 연합군, 전쟁을 미친 짓으로 보는 미친 소녀가 부지런히 낯선 전쟁을 연기하고 있다. 관객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일단 비현실적 미래를 통해 풀고 있다.

동막골에서 현실골로 돌아와 보자.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참전국들은 본격적으로 더 이상의 세계대전을 막기 위한 뒤늦은 노력들을 시작했다. 군축회담도 하고 부전조약도 맺었다. 국제연합(유엔)의 전신인 국제연맹도 만들었다. 대학에서 처음으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국제정치학이라는 이름 아래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20년 만에 훨씬 대규모의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역사란 무엇인가'로 일반 독자에게 널리 알려진 E H 카는 국제정치학의 현대적 고전이 된 '20년의 위기'(1939)에서 그 원인을 동막골의 꿈에서 찾고 있다. 현실의 아픔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비현실적 미래가 아니라 현실적 미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현실적 미래의 꿈은 현실의 아픔을 잠시 잊게 할 수는 있지만 고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은 오히려 더 깊어간다. 정말 중요한 것은 현실적 미래의 눈으로 병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한 다음 조심스러운 수술을 해야 미래의 완쾌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골의 현실은 어떤가. 북쪽에서는 비현실적 미래의 목표를 위한 고난의 행군이 장기화됨에 따라 병은 점점 깊어가고 있다. 대수술을 받아야 할 환자를 영양제로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다. 남쪽도 크게 나은 형편은 못 된다. 지난주에 열렸던 21세기 대통령을 희망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선진정치를 구호로 삼고 있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회담도 충분히 21세기적이지 못했다. 국정의 현안인 경제 침체, 정치 개혁, 교육 하향평준화, 남북 문제, 한.미관계 등에 대해 미래 없는 현재, 현재 없는 미래를 넘어선 미래 있는 현재, 현재 있는 미래의 21세기 비전 대결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주 보는 눈싸움과 말싸움을 넘어서 현실적 미래를 실천하기 위한 내다보는 싸움을 해야 한다. 여의도로 눈을 돌려 보면 문제는 좀 더 심각하다. 과거 대결은 심해도 미래 대결을 찾기는 어렵다. 모처럼의 정책 대결은 미래 없는 현실과 현실 없는 미래의 결전장이 되기 일쑤다. 동막골의 일시적 즐거움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국정 현안의 어려움을 제대로 푸는 길은 동막골의 정치를 넘어선 현실적 미래 실천의 정치다. 그 첫걸음은 차가운 현실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제 침체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역구도, 세대구도의 갈등이 연정으로 풀릴 것이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경쟁력 없는 교육의 평준화는 미래의 죽음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의 전략적 결정 없는 북핵 문제, 남북관계의 실질적 해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미관계도 표면적으로 보기보다는 곪아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를 제대로 설정한 다음에는 동막골의 상상력을 넘어선 21세기의 현실 있는 미래의 상상력으로 해답을 찾아 나서야 한다. 오늘의 정치 현실에 답답해하고 있는 관객들을 위해 이제 동막골의 꿈을 넘어서 제대로 된 21세기의 꿈을 꾸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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