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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여행의 회상
 

중앙일보 

2005-10-10 

꼭 10년 전이다. 일본 사람으로 두 번째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히로시마 노트'를 손에 들고 히로시마 원폭박물관을 찾았다. 단순한 관광여행은 아니었다. 그 당시 북한과 미국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네바 기본합의문(1994년 10월 21일)에 서명했다. 한국의 핵 문제가 시끄러워졌던 75년부터 20년째 공부해 온 한반도 핵 문제로부터 이제는 해방되는 모양이라고 약간 흥분했었다. 95년 초 히로시마 여행은 북핵 문제 공부를 마감하는 고별여행이었다. 그러나 판단 착오였다. 나는 북핵 문제와 헤어지지 못했고 지난 10년 꾸준히 만남을 계속해 왔다.

 

지난 9월 19일 베이징 6자회담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북핵 문제에서 해방된다는 기쁨보다는 공동성명이 94년 기본합의서의 운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10년 전 그렇게 힘들여서 만들었던 기본합의서는 왜 휴지조각이 된 것일까. 오래간만에 빛바랜 합의서를 찾아서 조심스럽게 다시 들여다봤다. 새삼스럽게 눈에 띄는 것은 기본합의서와 공동성명의 놀랄 만한 구조적 유사성이다.

 

2005년 공동성명의 기본 골격인 북핵의 포기, 경제 지원, 관계 정상화, 평화체제라는 마(魔)의 사각관계(본지 8월 1일자 하영선 칼럼)는 94년 기본합의서에서도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경수로 및 대체에너지 제공에 대한 보장 서한 접수 즉시 북한은 흑연감속 원자로 및 관련 시설을 동결하고 경수로 사업이 완결될 때 이를 폐기하며,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하며, 핵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것이다.

 

꿈의 합의서는 결국 현실화되지 못한 채 백일몽으로 끝났다. 2005년 공동성명의 현실적 이행을 위한 첫 단계는 합의서의 좌절 원인에 대한 심층 분석에서 출발해야 한다. 중유가 공급되기 시작하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주관 아래 경수로 건설이 진행됐으며, 북.미 간에 연락사무소를 비롯한 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 프로그램의 마지막 카드를 버릴 수 없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자면 합의서의 소극적 안전보장이라는 서면 담보만으로는 수령체제의 옹위라는 북한체제의 최우선 목표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의 역사적 교훈은 분명하다. 마의 4각 기둥 위에 한반도 비핵화의 집을 제대로 짓기 위해서는 경제 지원, 관계 정상화라는 기둥이 중요하다. 그러나 북한은 최종적으로 수령체제 옹위의 확고한 물적 담보로서 평화체제의 기둥이 마련돼야 현실적으로 핵 포기 기둥의 완성을 추진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북한이 지난 10년간 제시해 왔던 물적 담보로서 평화체제의 기본내용이다. 북한 수령체제의 직접 위협 대상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체제의 핵심은 남북이 아니라 북.미다. 북한이 위협 내용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제도 전복 정책, 주한미군, 한.미 군사동맹이다. 북한이 요구하는 평화체제의 물적 담보는 현실적으로 제공할 길을 찾기 어렵다.

 

기본합의서에서 공동성명까지 지난 10년 동안 북한의 기본 입장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면 미국은 9.11 테러 때문에 전혀 새로운 입장에서 북핵 문제를 다루고 있다. 북핵 문제를 과거처럼 핵 확산 금지정책의 시각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량살상무기 테러의 현실적 위협을 막기 위한 국내 안보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핵 폐기 기둥을 사실상 나머지 세 기둥의 초석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94년 기본합의서처럼 경수로의 건설 과정과 연동해 북핵 동결과 폐기를 진행하는 방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11월로 예정돼 있는 5차 6자회담에서 공동성명의 이행논의에 성과를 거두려면 경제 지원과 관계 정상화 논의도 중요하지만 미국이 우선적으로 원하는 핵 포기 기둥과 북한이 최종적으로 원하는 수령체제 옹위의 기둥을 상호 모순의 위치에서 상호 보완의 위치로 바꿔놓아야 하는 세기의 난제를 풀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12월 학생들과 함께 나가사키로 답사여행을 갈 예정이다. 이번에는 정말 고별여행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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