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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새 그림을 그리자
 

중앙일보 

2005-04-15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 표명한 동북아 균형자론은 전략적 사고의 설익음 때문에 스스로 좌초의 운명에 직면해 있다. 난파를 막기 위한 정부 당국자들의 애처로운 노력은 단기간의 국내여론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현실 국제정치의 거센 파도를 타고 넘기에는 역불급이다. 캔버스의 잘못된 밑그림에 어설프게 자꾸 덧칠을 하다 보면 그림은 점점 지저분하고 추해진다. 균형자론의 난파를 넘어서서 21세기 한반도호의 난파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간단하다. 헌 그림을 용기있게 버리고 새 그림을 그리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근대 한국사의 통절한 반성과 동북아 평화번영의 미래비전이 현재의 종합적 국가역량과 융합돼 제시된 전략이 동북아 균형자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단순한 말잔치가 아니라 국가전략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통절한 반성, 동북아 평화번영의 미래비전, 현재의 종합적 국가역량 논의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

 

우선 근대 한국사의 통절한 반성은 충분히 통절하지 못하다. 100년 전 한반도 역사의 뼈저린 교훈은 열강의 침략전쟁 시대를 맞이해 부강국가 건설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반성은 옳다. 그러나 더 중요한 반성이 있다. 일본은 왜 우리와 같은 운명을 겪지 않고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세계무대의 중심에 서는가.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 승리했으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사실상 포기하는 국제정치적 수모를 겪었다. 일본은 고민 끝에 10년 고난의 행군을 택한다. 제2의 '3국 간섭'을 막기 위해 무시당하면서도 공을 들여 영.일동맹을 맺고, 26만t의 세계적 해군력을 키운다. 결국 인구 3000만, 평시 병력 20만의 일본은 인구 1억3000만, 평시 병력 200만명의 러시아를 꺾고 한반도를 사실상 식민지화하면서 20세기의 대국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100년 전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고 21세기 역사의 중심에 서려면 무엇보다 100년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고 주변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21세기의 비전과 힘을 마련해야 한다.

 

동북아 평화번영의 미래비전은 충분히 미래적이지 못하다. 혼란스러운 설명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공고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동시에 동북아의 경제 및 안보공동체를 추진해보겠다는 얘기다. 이런 내용이라면 굳이 균형자라는 표현으로 평지풍파를 일으켜 소외자의 위험을 자청할 필요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주변 열강들이 이 정도의 구상에 압도당해 따라오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 제국(帝國)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장기 구상을 알게 모르게 짜고 실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가 협력적 자주 동맹의 2차원적 비전에 골몰하고 있는 동안 미국은 무소부재(無所不在.ubiquitous)의 그물망 동맹이라는 4차원적 비전을 현실화하고 있다. 한반도가 21세기의 4차원 시공간에서 살아남으려면 한.일, 중국, 지구, 사이버공간, 남북한, 그리고 국내공간에 6중의 거미줄을 어떻게 촘촘하게 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균형자론을 추진할 수 있는 근거라는 종합적 국가역량론은 충분히 설득적이지 못하다. 최근 한.일관계에서 보듯이 상대방을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21세기의 힘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를 현실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동북아는 상당 기간 대등의 6강 리그가 아니라 1초강(미국), 2강(중국.일본), 2중(러시아.한국), 1약(북한) 리그를 벌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랭킹 10위 안에 들더라도 동북아에서는 여전히 훨씬 무거운 체급과 경쟁하고 협력해야 한다. 현재 수준의 균형자론과 종합 국가역량으로는 우리보다 무거운 체급들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오히려 되치기의 위험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지금 한가하게 균형자론을 즐길 때가 아니다. 동아시아의 주인공들이 모두 매력을 느끼고 기꺼이 비전으로 받아들일 만한 4차원의 새 그림을 그리자. 그리고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21세기의 힘을 기르자. 우리의 꿈을 이루려면 100년 대계의 각오가 필요하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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