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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잘못 짚은 LA 북핵발언
 

중앙일보 

2004-11-16 

노무현 대통령은 LA에서 새로운 북핵 해법을 밝혔다. 북한은 핵 포기의 결단을 하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도 북한의 결단을 돕기 위한 전략적 결단을 해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연설 내용이 보여주고 있는 용어의 부적절성, 논리전개의 엉성함, 논지의 불균형 때문에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국내외의 논란은 문제의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현실을 잘못 읽고 답이 될 수 없는 답을 제시한 데 있다.

 

노 대통령은 "결국 북핵 문제는 북한에 안전을 보장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지금의 곤경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냐 아니냐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문제의 핵심을 다르게 보고 있다. 9.11 테러를 겪은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핵기술과 핵물질이 테러조직으로 이전될 위험성이 객관적으로 아무리 희박하다고 설득해도, 미국은 북핵 능력의 해외 이전 가능성을 미국 역사 이래 최대 생존 위협의 하나로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북핵 문제 해결은 북한의 핵 폐기 결단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더구나 미국은 1994년 동결과 보상의 제네바 기본 합의가 북한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보상의 결단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 리비아식 핵 폐기 모델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있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북한은 "미국의 '전향적인 제안'은 논의할 가치도 없다"(북한 외무성 대변인, 2004년 7월 24일)라고 반박하고 있다. 성명은 "우리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다"라고 지적하면서 "조.미가 정전상태, 기술적으로는 전쟁상태에 있는 조건에서 적대일방이 타방에 먼저 무장을 놓으라는 요구는 언젠가도 실현할 수 없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답변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이 우선 '동결과 보상의 원칙'을 받아들여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대북한 적대시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대북한 적대시 정책 포기의 핵심 내용은 단순한 북한의 체제 안전 보장이 아니라 수령 옹호 체제를 위해 완벽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적대시 정책의 포기라는 것이다.

 

현재 단계에서 북한이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고, 미국이 북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북한에 상대방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교과서 수준의 발언을 계속하면, 우리는 어설픈 중재 외교를 시도하다가 왕따 외교의 함정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북핵 문제는 현 단계에서는 답이 없다는 해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따라서 미국과 북한은 6자회담을 통해 협상을 시도하면서도 상대방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위협과 배짱 외교를 강화해 나갈 것이다.

 

부시 행정부 제2기는 북핵 문제를 기본적으로는 반 대량살상무기 테러전의 원칙에서 다루지만, 동시에 이라크 전쟁의 현실적 교훈을 감안해 풀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 핵심은 다자적 합의 기반 위에 선 다단계 전략이 될 것이다. 북한의 핵 폐기라는 전략적 선택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미국은 중국을 핵심으로 하는 국제적 합의 기반 위에 북한의 체제 변환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강화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 흐름의 불가피성을 생각하면, 본격적 위기 국면 이전에는 미국과 북한에 대해 위기 악화를 가능한 한 줄이기 위한 조용한 예방 외교가 절실하다. LA 북핵 발언과 같은 제안은 위기국면이 파국과 기회의 갈림길에 섰을 때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특사 교환이나 정상회담은 위기국면의 해소 직후 이루어져야 한다. 바둑에서 수순에 따라 사활이 뒤바뀌는 것처럼, 외교에서는 수순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뒤바뀐다. LA 북핵 발언은 악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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