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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주한미군 감축과 '변환 국방'
 

중앙일보 

2003-05-20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이라크 차출 공식 통고 이후 주한미군 감축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25일 부시 대통령은 탈냉전 9.11테러 이후시대를 맞이해서 미국은 새로운 군사변환(transformation)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해외주둔 군사력 재검토 협의를 동맹국, 그리고 의회와 본격화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나는 중앙시평(12월 10일자)에서 "군사한파를 대비하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군사변환의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잘못 대응하면 한반도에는 평화의 봄이 아니라 매서운 군사한파가 불어 닥칠지 모른다는 조기경보를 했었다.

 

본격적 주한미군 감축논의를 앞두고도 우리의 군사변환전략에 대한 이해는 초보적이다. 1880년 여름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다. 주일 청국공사였던 하여장(何如璋)은 김홍집과의 필담에서 균세(均勢)의 의미를 아느냐고 물었다. 김홍집은 그 단어를 본 적은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답변하고 있다. 미국이 우리에게 변환의 의미를 묻는다면 19세기 수준을 넘어서는 필담을 나눌 수 있을는지 불안하다.

 

국내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과 감축 논의는 아직 변환 이전 시대에 머물러 있다. 차출 병력이 복귀할 것인가 아닌가와 같은 초보적 질문에 대해서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공식 통고 직후 미 국방부에서 고위군사당국자와 기자들의 배경원탁토론이 있었다. 기자가 국방부 얘기대로 병력을 차출해도 대북억제력에 차질이 없다면, 차출 병력이 구태여 복귀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당국자의 대답은 노련했고 변환전략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복귀여부는 차출기간 만료 때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복귀 여부가 아니라 한반도에 억제력 증강이 필요하다면 미국은 추가 억제력을 보낼(flow) 능력이 있으며, 또 보낼 것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대답에서 보낸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동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동사는 원래 물 흐르듯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변환전략의 핵심은 유동성 있는 군사능력이다. 유동성은 최근 컴퓨터 기술에서 어느 때나 어디서나 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유비퀴티(ubiquity)와 비슷한 뜻이다. 따라서 미국이 원하는 것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21세기 홍길동군을 꿈꾸는 것이다. 냉전시대의 해외 주둔군이 해외 배치군을 넘어서서 해외 유동군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변환시대의 차출, 감축, 철군, 재배치는 냉전시대의 어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냉전시대의 주둔군이 변환시대의 유동군으로 바뀜에 따라, 역설적으로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한.미군사동맹이다. 변환시대의 미국은 세계 정치군사 상황의 변화를 동태적으로 판단해 유동군사능력을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방 동맹군을 고정자산이 아니라 유동자산으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더구나 군사능력을 꿔주기보다는 빌릴 위험성이 상대적으로 많은 우리는 상대방 동맹국이 판을 어떻게 읽고, 군사능력의 흐름을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읽고 관리해야만 한다.

 

변환시대의 주한미군 감축은 국방관과 동맹관의 혼란을 심하게 겪고 있는 우리에게 보다 어려운 숙제를 내놓고 있다. 한가하게 자주국방론이나 협력적 자주국방론을 얘기할 시간이 없다. 하루 빨리 대통령이 중심이 돼 21세기가 탈냉전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군사력은 왜 필요하며, 또 어떤 동맹군사력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정치권과 시민사회세력의 합의기반을 제대로 창출해야 한다.

 

한 나라가 제대로 굴러 가려면, 무엇보다 삶과 죽음, 즉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확실하고 구체적인 대책이 먼저 마련돼야 한다. 국제정치 현실은 탈냉전의 21세기가 찾아 왔어도, 우리의 삶을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 비정한 싸움터다. 4대 제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남북으로 분단돼 있는 우리가 변환의 국방관과 동맹관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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