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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외교부를 두번 죽이지 마라
 

중앙일보 

2003-01-15 

외교통상부장관이 경질됐다. 외교통상부에는 폭풍전야의 고요가 짙게 드리워 있다. 청와대인사 수석은 사표 수리 배경을 설명하면서 외교부가 의존적 대외정책에서 벗어나서 참여정부의 자주적 외교정책의 기본 정신과 방향을 충분히 이해하고 시행할 것을 강조했다.

 

외교통상부는 21세기 한반도의 국익을 위해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러나 장관 경질의 후속 조치로서 외교통상부를 19세기적 발상인 의존과 자주의 경직화한 이분법의 무딘 칼로 무리하게 수술하려 한다면, 외교통상부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더 나아가서 나라의 건강을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해치게 될 것이다. 자주와 동맹을 함께 추구할 수 없는 국가는 21세기에 살아남지 못한다. 19세기 말, 국운이 점차 쇠해 가는 속에, 유길준은 ‘西遊見聞'에서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을 넘어서자고 피맺힌 절규를 한다. 구미열강과의 새로운 만남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전통적인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동시에 근대적인 힘의 도입만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전통과 근대의 힘을 성공적으로 복합화 할 수 있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길준의 꿈은 현실화되지 못한 채 우리는 망했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역사의 기로에 서 있다. 이 번에는 자주와 동맹의 복합화에 성공해서, 21세기 역사의 주인공으로 당당히 살아 남아야 한다.

 

자주와 동맹의 복합화에 성공하려면, 외교통상부를 두 번 죽여서는 안 된다. 한 나라의 외교관과 군인이 주눅 들기 시작하면 나라는 망한다. 밖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관리해야 할 외교통상부가 안의 눈치 보기에 정신없고, 국익을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국방부가 박세리 수준의 승부 정신도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 국민들의 21세기적 자강 노력은 사상누각이다. 그렇다면, 외교통상부를 어떻게 살려야  할까. 길은 있다. 장관의 죽음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외교통상부를 자주적 외교정책의 구시대적 잣대로 줄 세우는 대신에,. 외교통상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가 19세기적 자주 외교와 20세기적 동맹 외교의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신한 인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서 자주와 의존 타령을 넘어서서 함께 주인 되는 공주(共主)동맹의 21세기 비전을 제시하고, 외교통상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이끌어 간다면, 혼선과 잡음을 자연스럽게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위정척사(衛正斥邪)외교에서부터 21세기 북한의 자주외교에서 보듯이, 이미 역사의 평가가 끝난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면, 혼선과 잡음은 불가피하다. 짧게는 참여 정부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며, 길게는 21세기 한반도 국운 쇠퇴를 재촉하게 될 것이다.

 

외교통상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21세기적 숙제는 자주가 아니라 변환(transformation)이다. 21세기 역사의 주인공들은 이미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연기를 뽐내면서 관객 유치에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산업혁명에 이은 정보혁명의 문명사적 전환을 맞고 있는 21세기는 일단 혁명과 지속이 복합된 변환의 세기로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라서, 변환외교, 변환군사 무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북핵문제, 주한미군문제, 자유무역협정문제들은 더 이상 과거의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외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19세기에 부국강병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벌어졌던 균세(均勢)와 식민의 드라마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국망의 비극을 겪었듯이 말이다. 더 답답한 것은 관객이 모두 떠난 자주의 무대에서 우리끼리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결이라는 웃지 못 할 희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외교통상부를 자주외교의 손과 발이 아닌 변환외교의 머리로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이러한 노력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위치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역사의 흐름을 뒤늦게 읽는 정치인들의 뒤를 따르는 백성들에게 역사의 매는 가혹하다. 우리 정치인들이여, 역사의 잠에서 깨어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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