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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우리 外交 고급화는 언제?
 

중앙일보 

2003-07-16 

한.중 정상회담이 끝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 방문 귀국 보고에서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경제와 통상 관계의 확대, 양국 지도자들 간의 신뢰 구축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현대 외교 표준의 눈높이에서 보면 우리 외교는 고급화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

 

한국이 유럽 중심의 근대 외교제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도 1백년이 넘었다. 그동안 많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외교는 여전히 초보의 어려움을 충분히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 우선 언어 외교의 미숙성이다.

 

근대 외교는 폭력 외교와 금력 외교를 중심으로 전개돼 왔지만 이에 못지 않게 언어 외교를 중시해왔다. 특히 상대적으로 폭력과 금력이 약한 외교 주인공에게는 언어 외교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 다자회담과 당사자회담의 혼란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盧대통령의 '당사자간 대화'라는 표현 때문에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盧대통령은 "당사자는 관련 당사자 모두를 뜻하는 것인데 전달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일상 언어의 뜻으로 보면 盧대통령의 해명은 맞다.

 

그러나 언어 외교는 일상 언어가 아닌 외교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북핵 문제 논의에서 사용하고 있는 외교 언어의 뜻으로 보면 '다자간 대화'와 '당사자간 대화'는 정반대의 뜻이다. 언어 외교의 사소한 실수는 국익에 엄청난 손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따라서 일상 현실이나 국내 정치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국제 정치에서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국익 차원에서 대단히 위험하다. 성공적인 언어 외교를 위해서는 고도의 정제된 외교 언어를 적절하게 절제해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지식 외교다. 지식 외교는 국가 이익 추구에 도움이 되도록 외교 정보를 선택하고 활용하는 활동이다.

 

정보기술 혁명은 전쟁과 경제뿐 아니라 외교에도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1백명의 재래식 정보 외교 전문가가 한명의 사이버 지식 외교 전문가를 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우리 외교는 아직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정상회담에서 후진타오(胡錦濤)국가주석이 盧대통령의 다자회담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난 6월 1일 미.중 정상회담 직후 백악관 배경 설명은 두 정상이 다자회담에 관해 얼마나 깊숙하게 논의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특히 미국의 입장은 흥미롭다. 다자회담에서도 얼마든지 당사자간의 눈맞춤과 대화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진타오 주석은 당사자들의 입장을 우리보다 훨씬 잘 알고 있으면서 盧대통령의 기본적 설명을 예의있게 경청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정부의 다자회담과 당사자회담의 혼란을 흥미있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상상력 외교다. 폭력.금력.지식 외교의 상대적 열세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비강대국은 현실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 외교에 보다 큰 기대를 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의 현실화는 쉽지 않다. 盧대통령은 중국 방문 중에 동북아 평화 번영 구상을 강조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중국사람들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상상력 넘치는 천하(天下)개념을 만들어 사용했으며, 동북아를 중화라는 커다란 몸의 한쪽 어깨부분으로 비유해 왔다.

 

*** 脫냉전.권위주의 발상 넘어서라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먼저, 그리고 오랫동안 아시아 공간 설계 및 건축을 담당해 왔다. 우리가 뒤늦게 동아시아의 새로운 설계자로서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이 우리 설계를 따라 건축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우리의 21세기 외교 상상력은 탈냉전.탈권위주의의 발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력은 1980년대 한국에서는 새롭게 보였을지 모르나 21세기 동아시아에서는 더 이상 별다른 감동을 주기 어렵다.

 

21세기 한국 외교가 동아시아 공간설계와 건축에 주도적으로 동참하려면 우선 상상력 빈곤의 국제화교육.외무고시.국제문제 담당 관료제도를 과감하게 뜯어고쳐야겠다는 상상력 있는 21세기 대통령이 나타나야 한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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