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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북핵, 시간이 급하다
 

중앙일보 

2003-05-29 

"평화적 해결 공조 다졌다지만 미국의 의중 제대로 읽었는지"

 

답답하다.

 

내우외환의 어려움이 중첩되는데도 정부는 쉽사리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경기침체는 가속되고 있으며, 화물연대의 운송거부 사태 이후 노사문제는 더욱 심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둘러싼 교육정책의 대혼란은 국민을 더 답답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나를 무엇보다도 답답하게 하는 것은 북핵 문제다.

 

지난 5월 중순의 한.미 정상회담으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가닥을 잡았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북핵 문제를 그런 수준에서 이해하고 대응한다면, 답답함의 심각성은 가속될 것이다.

 

*** 군사.경제제재 가능성 열어놔

 

북핵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미국은 어떠한 사고와 행동의 원칙 아래 한.미.일 공조와 미.중 협력을 추진하고 있는 것일까.

 

부시 대통령은 지난 5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에서 이라크 전투 작전의 종료를 공식 선언하면서 "이라크전은 2001년 9월 11일에 시작해 아직까지 계속하고 있는 반테러전들 중 하나의 승리"라고 말했다.

 

9.11은 오사마 빈 라덴이 얘기하는 것처럼 '미국 종말의 시작'이 아니라 지구 테러 그물망과 지원세력 종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반테러전의 기본원칙으로 미국민에 대한 테러조직과 지원세력을 미국의 적(敵)으로 본다. 또 테러조직과 연계돼 있고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거나 가지려는 탈법국가들은 문명세계에 대한 중대한 위험이며 대결의 상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시 행정부의 9.11 이후 신세계 질서구축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사고와 행동의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최근 한.미 정상회담에서 평화적 수단을 통한 북핵 제거나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 증대의 경우에 추가적 조치 검토에 합의한 것이나, 미.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경우 더 강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기는 이러한 틀에서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

 

평화적 수단을 통한 북핵 제거나 추가 조치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입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한국의 입장이 정태적이라면, 미국의 입장은 동태적이다.

 

미국이 말하는 북핵의 평화적 제거와 추가 조치를 부시 행정부의 21세기 반테러 세계질서 구축의 기본 공식 속에 대입해 보면 보다 답답하고 우울한 해답을 만나게 된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 정권이 핵 능력을 외교 및 군사수단으로 사용하는 한, 북한 정권을 탈법국가로 분류해 반테러전의 상대로 삼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말하는 북핵의 평화적 제거는 반테러전의 외교전단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추가 조치는 북한이 끝까지 핵정책을 바꾸지 않는다면, 정권교체를 위한 경제제재를 추진하며, 21세기형 군사제재까지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는 구체적 내용을 내재하고 있다.

 

*** 대북제재 중국이 협조한다면

 

한편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대조선 정책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기는 하나,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3중 대응 방식을 반복하고 있다. 우선, 국내적으로 운명공동체인 혁명 수뇌부와 일심단결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조선반도 핵문제'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 방도로서 북한은 "새롭고 대범한 방도"라고 주장하는 제안들을 양파껍질 벗기듯이 내놓고 있다. 마지막으로, 군사적으로 핵무기와 같은 억제 방도를 갖추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북한이 자주권과 생존권을 21세기 방안으로 새롭게 모색하지 않는 한, 부시 행정부는 대북한 반테러전을 진행시켜 나갈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해 외교전과 경제전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면 북핵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 정부가 북핵 문제를 비롯한 내우외환을 현명하게 극복하려면 닫힌 민중주의적 발상을 하루 빨리 졸업하고, 열린 국민주의의 문에 들어서서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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