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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평양에 두고 온 발표문
 

중앙일보 

2003-04-17 


"21세기적 북핵해법 문제의 핵심은 만남의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


이라크전이 사실상 끝났다. 미국은 반(反)대량살상무기테러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다음 목표로 북핵문제의 해결을 본격적으로 시도할 것이다. 한편 북한은 조건부 다자회담의 수락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라크전 이후의 북핵문제는 어떻게 풀려나갈 것인가.

 

이라크전이 시작된 직후, 나는 제6차 남북 해외학자통일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닷새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나는 준비했던 '한반도 핵문제와 위기 해소 방안'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북 주최 측의 철야에 가까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표할 수 없었다.

 

남측의 발표가 생략된 채 북측의 발표로 시작되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라는 둘째날 회의의 진행 모습을 발표석 대신 객석에서 바라보면서 나는 답답함보다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

 

*** 한계드러난 北·美불가침조약

 

'평양의 불온문서'가 된 발표문에서 우선 강조했던 것은 핵무기의 구시대성이다. 한 국가의 자주와 생존을 핵무기로 담보하려는 노력은 자기 모순에 직면해 이미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반도는 뒤늦게 핵문제에 직면해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핵문제를 하루 빨리 해결하고 새로운 문명표준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 21세기 한반도의 미래는 어둡다.

 

다음으로 강조한 것은 남.북.미가 제시하고 있는 현재의 해법은 해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은 '조선반도 핵문제'의 원인을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에서 찾고, 그 해법으로서 협상의 방법과 억제력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협상의 방법으로 제안하고 있는 북.미 간의 불가침조약 체결은 현실 국제정치에서는 군사적.정치적 담보 없이는 커다란 의미를 갖기 어렵다.

 

억제력의 방법은 남북한 정치.군사관계의 불안정화, 동아시아 핵확산의 연쇄반응 가능성, 북.미관계의 위기, 한국경제에 타격을 불러 일으켜, 국내외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반대량살상테러전의 틀에서 북핵문제를 다루려는 미국의 해법도 한반도의 자주와 생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북한의 핵개발금지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북.미관계가 악화되는 경우에 동시 충족될 수 없다.

 

따라서 발표문은 21세기적 해법으로서 민족적 공조와 국제공조라는 2분법적 갈등을 넘어 민족적 국제공조라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문제 해결방안을 제안했다.

 

북한과 미국은 만남의 내용에서는 '선 핵포기, 후 대화'와 '선 불가침조약 체결, 후 핵논의'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만남의 형식에서는 다자회담과 직접회담의 차이를 보여왔다.

 

북한과 미국의 입장 차이를 민족적 국제공조를 통해 극복하기 위한 첫 단계로 북한과 미국은 동시 개별 선언을 활용할 수 있다.

 

북한은 자주권과 생존권을 핵무기가 아닌 21세기적 방안으로 확보할 것을 선언하고, 구체적으로 이러한 선언을 국제적으로 검증받도록 하고, 미국 및 관련 당사국들은 북한이 21세기 문명표준을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군사.경제.정치적 담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할 것을 선언하도록 한다.

 

북한과 미국 및 관련 당사국들이 동시적 일방선언을 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단계에 들어서면 양자와 다자를 포함한 복합적 만남을 통해 21세기 기본합의서를 마련해야 한다.

 

*** 민족적 국제공조 틀 만들어야

 

민족공조가 기본교리인 평양에서 민족적 국제공조의 발표문은 설 땅이 없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의 종전과 함께 북한은 만남의 형식에 조심스러운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만일 미국이 핵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조선 정책을 대담하게 전환할 용의가 있다면"이라는 조건부로 대화의 형식에 크게 구애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만남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라크 전쟁의 교훈으로서 나라와 민족의 안전을 수호하는 것은 불가침 조약이 아니라 물리적 억제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만남의 험난함을 충분히 예상케 하는 주장이다.

 

평양의 봄은 추웠다. 그러나 그곳에도 봄은 오고 있었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역사의 진리이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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