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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변방의 역사 끝내려면
 

중앙일보 

2003-02-13 


"보수 발상 뛰어넘는 진보의 새 발상
21세기는 사고의 복합화다" 

 

노무현(盧武鉉)신정부의 출범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떠나는 김대중(金大中)정부가 남겨놓은 북핵 위기와 대북 송금사건에 휘말려서 새 정부의 5년 항해 좌표에 대한 본격적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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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당선자는 지난주 인천국제공항 국정통합토론회에서 5년 항해의 기본방향으로 변방의 역사를 끝내고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주도하는 자주의 역사를 천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우리 민족의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계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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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조선이 추락한 까닭



21세기 변방의 역사 극복방안을 찾으려면, 변방역사의 극복 시도사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노무현 당선자가 변방역사의 출발로 들고 있는 중국 중심의 사대질서는 오늘날의 전형적인 지배와 종속관계와는 구분해야 된다.

오늘의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공간의식과는 상당히 다른 중원과 변방의 천하질서 속에서 사대는 자기나름의 삶을 엮어가려는 소국들의 절실한 노력의 모습을 품고 있다.
변방의 역사를 섣부르게 이해하고 자괴하기 전에 사대의 표면 밑에 깔린 변방극복의 고민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노무현 당선자가 동북아 중심국가를 선언하면서 변방역사의 두 번째 시기로 들고 있는 19세기 조선이 변방의 역사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단순히 외세 앞의 국론분열과 내부투쟁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의 정치 주도세력이 자강(自强)과 균세(均勢)에 기반한 부국강병이라는 새로운 문명의 표준을 제때에 제대로 읽어서 국정목표로 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내 역량을 효율적으로 동원하지 못하고 국제 역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한세기가 지난 오늘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변경역사 극복방안이 남북한의 21세기 국정목표로 등장하고 있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지난 1월 9일에 '조선의 배짱'이라는 제목의 정론을 실으면서 '제국주의 광풍'속에서 21세기 북한이 나아가야 할 길은 '조선의 배짱'에 기반한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김정일(金正日)체제의 비극은 21세기 생존과 번영을 위한 수단과 목표의 설정이 19세기적 보수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노무현 신정부는 새로운 국정목표의 중심을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로 삼으면서 변방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나아가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새 정부의 구상은 북한의 19세기적 보수성의 한계를 넘어서고는 있으나 20세기적 보수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21세기 변경역사의 극복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20세기 보수의 발상을 뛰어넘는 21세기 진보의 새로운 발상을 필요로 한다. 21세기는 더 이상 '중심'의 세기가 아니라 '복합'의 세기이며 '자주'의 세기가 아니라 '공주(共主)'의 세기다.

21세기 신문명의 주도세력들은 다중심의 그물망화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중심'과 '자주'는 더 이상 21세기 변경역사의 극복방안이 되기는 어렵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20세기적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구상은 21세기적 동아시아 복합질서 구상으로 재구성돼야 한다.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을, 중국은 아시아를, 일본은 동아시아를 이 지역의 공간구분으로 주로 삼고 있는 속에서 한반도가 동북아로서 이 지역의 공간구분을 주도하기는 어렵다.

보다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가 닫힌 중심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안과 밖으로 열린 다중심 그물망의 한 코로서 역할해야 한다.

따라서 동아시아는 밖으로 미국.유럽, 그리고 지구와 그물망화돼야 하며, 안으로는 동아시아의 개별 국가.사회세력들과 그물망화돼야 한다.

*** 동아시아 다중심 그물망화를

동아시아 복합질서는 공간적으로 복합화돼야 할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복합화돼야 한다. 정치.군사적 안정 없이 경제번영은 불가능하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동아시아 정체성의 형성 없이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평화.번영은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21세기 변방역사 극복의 출발은 우리의 발상력이 21세기의 현실을 풀어나가기에는 지나치게 변방적이라는 겸손한 깨달음이다. 사고의 복합화 없이 변방의 탈출은 불가능하다.

하영선(서울대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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