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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國難의 정치를 극복하라
 

중앙일보 

2003-01-23 

노무현(盧武鉉)대통령당선자가 지난 주말 TV토론에서 북핵 위기와 한.미 관계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2003년의 미래가 아닌 1903년의 과거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꼭 1백년 전인 1903년. 청조 말 대표적 개혁 지식인으로서 무술변법운동(1898)에 실패하고 망명생활을 하던 량치차오(梁啓超)는 중국의 국난극복을 위해 썼던 글들을 모은 '음빙실문집(飮室文集)'을 출판한다.


이 문집은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전통 유학지식인들에게도 필독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 말로만 얻어지지 않는 自主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조선의 전통 유학지식인들이 梁의 글을 징검다리삼아 이제까지 인간이 아닌 금수 같이 취급했던 구미 제국들을 드디어 국민경쟁의 세기에 앞서 가는 국가들로 보고 이를 하루빨리 따라잡아야 할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였다. 19세기 중반 이래 거대한 외세의 도전 앞에서 보여 온 보수와 진보의 외세관의 국론분열이 통합의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뒤늦은 이러한 변화는 고종의 마지막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국계몽운동(1905~10)의 수준에 머무른 채 국난극복을 이루지 못하고 국망의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2003년의 현실은 어떤가. 한반도에 1백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한번 보수와 진보라는 구시대적 구분 아래 외세관.대미관.통일관의 국론분열을 뒤늦게 겪고 있다.


북핵 위기나 한.미 위기는 국론분열의 위기에 비교한다면 훨씬 작은 것이다. 그렇다면 盧당선자가 오늘의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


북핵 위기의 시시콜콜한 해법 마련이나, 한.미 간의 수평적 협력을 위한 대안 마련도 중요하다. 그러나 21세기의 첫번째 대통령으로서 해야 할 첫째 과제는 국론분열의 극복이다. 그 속에 북핵 위기와 한.미 위기, 더 나아가서는 국난의 해법이 숨어 있다.


그렇다면 盧당선자는 그 해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우선 외세와 자주의 19세기 이분법적 사고를 하루빨리 졸업해야 한다. 21세기의 제국은 더 이상 19세기의 제국이 아니다.


따라서 21세기의 자주는 19세기의 자주와 다르게 이해하고 추구해야 한다. 더구나 폭력과 금력이 아직도 핵심을 이루고 있는 현실의 국제정치 공간에서 자주는 말로만 얻어지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자주를 가장 많이 주장해 온 북한이 식량과 에너지를 가장 비자주적으로 외세에 의존해야 하는 비극을 주목해야 한다. 21세기의 자주는 대외적인 외침의 국제정치에서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19세기의 구시대적 이분법에 안주하고 있는 오늘의 보수와 진보세력들에게 '자주적 세계화'라는 21세기 진보의 구호 아래 국론통합을 이루자는 대내적 외침의 국내정치에서 첫 출발을 찾아야 한다.


다음으로, 친미와 반미라는 20세기 냉전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친미는 보수이고 반미는 진보라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21세기에 살아 남을 수는 없다. 21세기의 시각에서 본다면 친미가 보수인 것만큼이나 반미도 보수다.


따라서 대통령당선자가 한.미의 수평 협력관계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친미나 반미를 넘어선 21세기 용미(用美)의 시각에서 미국의 활용이 국내.한반도.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차원에서 우리에게 미치는 손익계산을 철저히 한 다음 이에 대한 국론통합을 우선 이뤄야 한다.


마지막으로, 통일과 반통일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21세기의 통일론은 더 이상 19세기 서세동점의 통일론과 20세기 동서냉전의 통일론과 같을 수 없다.


21세기는 역설적으로 반통일의 시대다. 왜냐하면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하나의 통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지역.국가.지방.사회.개인 모두가 서로 자율성을 가지고 통하는 길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韓·美간 수평 협력관계를


21세기의 앞서가는 세력들은 이미 복합의 효율성을 즐기기 시작하고 있는데, 일통(一統)의 꿈만으로 21세기에 살아 남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에 국론통합을 이뤄야 한다.


盧당선자가 21세기의 첫번째 대통령답게 국론통합에 성공한다면 21세기 한반도가 당면하고 있는 오늘의 국난은 국망이 아닌 국흥의 길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 5년의 최대 국정과제는 국가와 국민의 사활이 걸린 국론통합이다.


하영선<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약력=1947년 서울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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