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시평] 새로운 통일의 꿈을
 

중앙일보 

2001-06-22 

6.15 남북 공동선언 1주년을 맞아 서울과 평양에서, 그리고 금강산과 제주도에서 수많은 기념행사와 회의가 치러졌다.


이러한 모임들의 통일론을 들으면서 내 머리 속을 괴롭힌 것은 한말의 풍운아 김옥균(金玉均)이 갑신정변(1884)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으면서 지운영(池運永)이라는 자객 사건(1886)을 겪고 남긴 분노의 글이다.


***2단계 연합 불붙인 EU


김옥균은 상소문의 형식을 빌려 쓴 이 글에서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점거하고 있는 상황 아래 "조정의 제신(諸臣)은 과연 어떤 계책이 있습니까. 오늘의 조선에 영국의 이름을 아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됩니까.


설령 조정 제신이라도 영국이 어디에 있느냐 물으면 망연하여 대답할 수 없는 자가 얼마든지 있사오니… 국가의 존망을 논함이 바보가 꿈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음은 족히 괴상한 일이라고 할 것이 없나이다" 고 호소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우리가 19세기식 통일 논의를 한창 벌이고 있는 같은 시각에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담은 회원국가의 증가와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EU의 장래를 21세기식 복합시각에서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마스트리히트조약(1993)에 기반해 EU가 첫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만 해도 많은 구미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EU의 지역이익과 회원국들의 개별 국가이익이 상호보완적이기보다 상호갈등적이므로 EU의 장래는 어두울 것으로 전망했다.


EU는 현실주의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단일통화제도를 채택하고, 이제 21세기에 들어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2단계 연합을 논의하기 시작하고 있다.


독일이 상대적으로 EU의 비중을 강조하고,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개별 회원국의 비중을 중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EU가 안으로는 민주적이며 밖으로는 개방적인 30개국의 이중복합체로 성장하려는 21세기 최대의 실험에 성공한다면 21세기 EU는 신문명질서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할 것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사일방어(MD)구상의 필요성을 유럽에 설명하기 위해 유럽 5개국을 순방하면서 정상들과 만날 기회를 가졌다. 부시 신행정부가 그토록 MD구상을 강조하는 밑바닥에는 근대공간과 사이버공간의 통합이라고 하는 거대한 꿈이 도사리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유럽 순방 직전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국방장관회의에 참석했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미국의 새로운 세계 군사전략의 방향을 핵력의 감축과 정보기술혁명에 기반한 '다층적 억지와 방어' 능력의 개발에 두고 있으며, 러시아 대신 중국을 잠재적 가상적으로 설정하고 새로운 21세기 동맹체제의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은 21세기 세계질서의 군사적 주도권의 중심을 핵력으로부터 정보지식력으로 이동시켜 사이버공간의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동시에 근대공간의 군사적 주도권을 유지.강화해 나간다는 것이다. EU는 21세기 대유럽통합을 꿈꾸고 있으며, 미국은 근대공간과 사이버공간의 주도권을 통합해 장악하려는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우리는 아직도 19세기식 한반도 통일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식 열린 통일 필요


남들은 다 대학에 입학하는 속에, 우리만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꼴이다. 검정고시라도 봐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려면, 하루 빨리 19세기식 통일론의 부적절성을 깨닫고 21세기식 통일론을 개발해야 한다.


새로운 통일의 꿈을 꾸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21세기 문명표준에 맞는 모습으로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EU가 21세기 유럽통합을 위한 회원국 확장에서 민주와 개방이라는 유럽표준을 왜 까다롭게 적용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한반도의 남북한이 이념과 체제의 면에서 21세기 문명표준에 이르지 못한 채 통일방안으로서 국가연합이나 연방론에 골몰하는 것은 선후가 뒤바뀐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그리고 새로운 통일의 꿈은 EU와 미국의 꿈에서 보는 것처럼 남북한의 닫힌 통일이 아니라 안으로는 주민 7천만명에게 열린 통일이어야 하며, 밖으로는 아시아와 세계, 그리고 사이버공간으로 열린 통일이어야만 한다. 새로운 통일의 꿈을 꾸지 못하고 19세기식 통일의 꿈을 앞서가는 역사인 것으로 착각하고 계속 현실화하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한세기 전처럼 역사의 뒤안길을 다시 걷게 될 것이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