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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한국 미래사의 비극
 

중앙일보 

2001-06-01 

안동수 전 법무부장관의 인선 책임 파문이 급기야 여권 내의 정풍갈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편 한나라당은 어려운 국가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국가혁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일치기 개혁 악순환


뒤늦게나마 시도되고 있는 여당 내의 정풍운동이나 야당 내의 혁신운동의 중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한 운동의 앞날에는 오랜 고난의 행군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족벌체제의 횡포가 심화되는 속에 조선조의 국운이 빠른 속도로 쇄잔해가던 19세기 초, 전남 강진에 유배 중이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경세유표(經世遺表)』(1817)에서 '터럭 하나라도 병통 아닌 것이 없으니, 지금이라도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 다음이라야 그칠 것이다' 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다산의 개혁론은 결과적으로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실학이 아닌 허학의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 이후 오늘의 정풍론과 혁신론에 이르기까지 지난 2백년 동안 우리 근현대사는 크고 작은 개혁론을 겪어 왔으나 시대에 걸맞은 개혁을 이뤄내지 못함으로써 21세기 초에도 아직까지 19세기 정치풍토를 방불케 하는 현실을 겪고 있다.


시대에 걸맞은 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당대의 세계표준을 넘어서는 개혁상(像)을 마련할 수 있는 집단지식이 필요하며, 다음으로 이러한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미래를 준비해 온 정치주도세력이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개혁의 기반으로서 미래지향의 국민이 숨쉬고 있어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은 힘든 현재와의 싸움 속에서 충분히 미래를 생각하고 실천할 준비를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일치기의 어려움 속에서 충분한 시험공부 없이 시험 잘 치기를 바라는 비극이었다.


이러한 악순환은 군사적 권위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문민시대를 맞이하고서도 반복되고 있다.


지난 8년반의 문민시대를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다시 한번 준비되지 않은 역사의 가혹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오늘의 문민시대 정치주도세력들은 군사적 권위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하루살이 현실정치에 전념해야 했으며, 미래를 실천적으로 준비할 능력과 힘을 모으고 키워나갈 겨를이 없었다.


현재와의 전술적 싸움 속에서, 미래를 전략적으로 준비하지 못한 문민시대는 현실화된 미래와의 싸움에서 뼈아픈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탈냉전 속의 냉전이라는 이중구조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해체를 시도하고, 21세기 새로운 문명표준으로 등장하고 있는 세계화와 정보화를 피상적 수준에서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21세기의 남북한관계를 여전히 1980년대의 시각에서 바라다 보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군사 권위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불행하게 태어난 문민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채 80년대의 뒤늦은 발상으로 21세기 한반도의 개혁안을 짜보려는 답답함을 보여주고 있다.


***주춧돌 대신 징검다리로


이러한 현대사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정풍운동이나 혁신운동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고난의 행군은 장기화돼 한국 미래사의 비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3金시대에 이어 새롭게 등장할 21세기 정치주도세력들은 가장 젊은 386세대까지를 포함해 미래를 충분히 생각하고 준비하기보다 어려운 현실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세대들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언어와 사고를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채 80년대의 언어와 사고로 21세기의 현실을 이해하고 개혁해 보려는 한계를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 미래사가 근현대사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21세기 한반도의 주춧돌이 되겠다는 무리한 꿈을 버리고, 군사 권위주의의 유산인 문민 권위주의를 쇄신하고, 미래를 충분히 생각하고 준비한 새로운 정치주도세력이 성장할 수 있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자청하는 정치적 신중함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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