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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22세기의 한·일관계
 

중앙일보 

2001-05-11 

우리 정부가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재수정 요구안을 일본 정부에 전달함으로써 역사왜곡 문제는 2회전을 맞이했다.

 

***단기해법 없는 교과서문제

 

몇년 전 한 국제회의에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東京)대 교수의 일본의 망언에 관한 논문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런 소감을 밝혔던 적이 있다.

 

"나는 일본 지도층의 문제 발언을 섭섭하게 생각하기보다 고맙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시아 경제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이 역사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한국인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사과까지 할 수 있다면 아시아의 일본화는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

 

교과서 문제의 2회전을 맞이하면서 분명한 것은 일본이 우리가 만족할 만한 대응조치를 취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정부가 1998년 한.일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하면서 한.일 과거사 문제를 깨끗하게 청산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며, 마찬가지로 교과서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교과서 문제를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역사적 안목이 필요하다. 19세기 일본은 1876년에 조선과 근대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한반도에서 실질적 영향력 행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임오군란(1882)이나 갑신정변(1884)을 통해 오히려 영향력이 약화됐다.

 

이러한 속에서 일본은 10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유럽 모델의 근대국가 건설에 노력해 청일전쟁(1894)에서 비로소 중국을 제압하고 조선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승리가 러시아를 비롯한 3국간섭으로 무의미하게 되자 다시 한번 10년의 노력 끝에 러일전쟁(1904)의 승리로써 마침내 조선을 장악하게 됐다.

 

19세기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유럽형 근대국가 모델을 수용함으로써 20세기에 세계적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세계사의 중심세력들이 21세기를 맞이하면서 19세기형 근대국가 모델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기 위해 21세기형 신복합국가 건설에 뛰어들고 있는 속에, 21세기 일본은 19세기와 달리 21세기 신국가 건설에 본격적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다.

 

일본의 과거사 문제 발언이나 교과서 문제는 19세기형 근대국가 건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21세기형 복합국가 건설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1세기 일본이 19세기적 발상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22세기 일본은 세계사의 중심에서 멀어져 가는 비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22세기 일본의 운명이 한.일 과거사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정치주도세력이 일본과는 달리 1백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에서 21세기형 신국가 건설에 성공할 수 있을 때 교과서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기적 노력과 함께 병행해 추진해야 할 단기적 노력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은 한.일관계 근현대사 연구의 세계적 중심이 될 수 있는 연구소의 수립이다.

 

***근현대사 연구 본격화를

 

한국 현대사와 관련해 한국전쟁의 원인을 소련과 북한보다 미국과 남한에서 찾아보려는 수정론의 연구방향은 탈냉전과 함께 러시아의 관련문서 공개와 이에 따른 새로운 연구들이 세계수준에서 활발하게 이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정의 길을 걷고 있다.

 

한.일관계 근현대사는 우리의 감정으로는 더 이상의 연구가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연구하는 국제학계가 한국보다 일본이 생산하는 자료와 연구에 더 영향을 받고 있는 현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연구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연구소를 만들자는 노력은 김영삼 정부 당시 학계의 간절한 요청에 따라 구체화됐으나 관료정치의 강한 반대로 좌절됐었다.

 

우리 정부가 지난 정부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고 세계적 규모의 연구소를 건립, 일본의 역사왜곡을 국제적으로 자연스럽게 소외시키면서 22세기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21세기 신한국 건설에 전력을 기울이는 속에 교과서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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