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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외세 읽기' 의 한계
 

중앙일보 

2001-04-20 

한.미 정상회담을 힘들게 치르고 난 이후, 우리 정계.관계.언론계.학계의 일부에서 자주외교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자아도취적인 自主 외교

 

자주라는 용어를 근대 서양국제법의 도입과 함께 19세기 중반에 받아들였던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자주외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이 가르쳐주는 것은 이러한 노력이 반드시 결과로서의 자주화를 한반도에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수구 사대 대신에 개화 자주를 외쳤던 개화세력의 노력은 결국 청에서 벗어나서 일본에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자주를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 온 북한은 지난 50여년의 자주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민생활의 최저수준 유지를 외세에 의존해야만 하는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다.

 

자주외교의 역사적 비운을 21세기 한반도에서 재현하지 않으려면 정보분석과 정책개발의 세계 수준화가 전제돼야 한다. 자주외교의 첫 출발은 자주의 대상이 되는 외세들을 친외세나 반외세와 같은 교과서 수준의 안목을 넘어서서 심층적으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조선은 일본이 강조했던 조선의 '자주지방(自主之邦)' 이 일본의 지배를 위한 중국에서의 자주라는 의미를 심층적으로 읽지 못했으며, 중국이 조선의 생존전략으로 충고했던 '자강(自强)과 균세(均勢)' 가 중국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주변세력 견제용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의 순진한 자주외교는 좌절의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21세기 우리의 외세 읽기 수준은 19세기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21세기의 외세를 1950년대의 보수나 1980년대의 진보라는 뒤늦은 시각에서 자아도취적으로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미국적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미국 신행정부의 대외정책을 21세기의 보수와 진보의 시각에서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우리 외교의 자주공간이 넓어질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햇볕정책 지지 여부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며, 부시외교가 혼란기인가 조정기인가, 또는 강성외교인가, 이중외교인가 하는 교과서적 수준의 읽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외세 읽기의 한계는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서 보는 일본 읽기, 최근 한.러 정상회담에서 보는 러시아 읽기, 한.중 수교 이후 중국 읽기에서 마찬가지로 드러나고 있다.

 

자주외교는 주변 열강들의 표면적 외교언행을 넘어서서 심중을 꿰뚫어 보는 것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주외교의 성패는 상대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강한 주변세력들을 활용할 수 있는 정책개발 여부에 달려 있다.

 

냉전기간의 우리 외교는 그나름의 자주를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냉전구조의 제약 속에서 50년대식 보수주의와 관료주의의 결합에 따른 자기만족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주변국 활용 정책 개발을

 

분단 속의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이중구조를 만나면서, 우리 외교는 새로운 대응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속에서 80년대식 진보주의와 관료주의의 결합에 따른 80년대식 자주외교를 추진하면 의도와는 달리 21세기 자주외교에서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 외교가 단순히 의도가 아니라 결과에서 21세기 자주외교의 길로 들어서려면, 50년대식 보수주의나 80년대식 진보주의를 하루 빨리 청산하고 21세기 진보의 시각에서 주변열강을 심층적으로 읽어내고, 이들을 활용할 수 있는 정책대안을 마련해야만 한다.

 

우리 외교가 주변 열강외교가 활용하는 시공간보다 더 길고 넓은 시공간을 활용하고, 전통적 힘과 21세기의 새로운 힘을 누구보다도 조화있게 추진하는 창조적 외교로 성장할 수 있을 때, 21세기 자주외교의 길은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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