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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페리 방북 평가와 전망 좌담
 

한겨레 

1999-05-31 

포괄협상 출발점 `세련된 포용' 필요


## 참석자 -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문정인 연세대 정외과 교수, 이원섭 한겨레 논설실장
## 때.장소 - 5월29일 한겨레신문사 회의실


#사회(이하 사)=윌리엄 페리 대북정책조정관의 북한 방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영선 교수(이하 하)=김정일을 만났느냐 못만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지난해 금창리 사건 등으로 고조되던 긴장이 고비를 넘겼다. 그렇다고 한반도 문제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봐야 한다는 기대는 성급하다. 페리 방북은 본격적인 논의의 출발점이다. #문정인 교수(이하 문)=페리는 협상하러 간 것이 아니다. 보고서를 완성하기 전에 북한의 견해를 듣기 위해 갔다. 북한의 실세인 군 인사를 만나고 온 것은 큰 성과다.


#하=페리 조정관이 북쪽에 포괄적 접근방안에 입각한 보따리를 알려줬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북쪽에도 나름대로 협상 보따리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북은 주한미군 철수와 평화협정 체결 등을 미국에 요구해왔고, 남한에는 국가보안법 폐지, 외세의존 탈피, 한총련을 비롯한 통일인사 탄압 철회 등 이른바 3대 선결과제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한-미-일 3국은 핵과 미사일 문제 등이 해결되면 체제 보장, 경협 등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한-미간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상이점을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열쇠다.


#문=원칙적으로 볼 때 서로 어긋나는 요구와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92년에도 북한의 3대 선결과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지금도 신뢰가 회복된다면 기본합의서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92년 기본합의서의 경우 서명은 했지만 이행이 안됐다. 3대 선결과제 등 기본적인 원칙 부분에서 서로 이해가 어긋났기 때문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사=북한쪽 반응은 어떻게 전망할 수 있나. 또 남북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는가?


#문=북쪽에서는 "준 게 뭐 있느냐"고 말한다. 사실 북에서 보면 94년 제네바합의도 이행된 게 별로 없다. 중유도 줄 때마다 미국 의회가 견제를 했다. 북한의 가슴에 와닿는 것을 준다면 북도 유연성을 보일 것이다.


#하=그동안 북한은 강경 대응에 변화를 안보였다. 유연한 접근에 대해서도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더 큰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변화를 너무 쉽게 기대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문=과거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일관성을 보여준 적이 없다. 상황논리에 따라 갔다. 그러나 포용정책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예측가능한 유연한 정책이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이끌어내지 않겠는가.


#하=포용도 현실적 포용과 비현실적 포용이 있다. 주민을 굶어죽게 만드는 북의 정책을 포용할 수는 없다. 현실적 포용은 선택적 포용이다. 북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 같은 것은 끌어안아야 한다. 그러나 예컨대 주한미군 철수 요구 등은 포용할 이유가 없다.


#문=북한 자체가 모순 덩어리다. 그물을 넓게 던져서 걸리는 고리를 찾아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지나친 북한의 요구도 포용하자는 게 아니다.


#하=대북정책과 관련해 봉쇄정책과 방임정책, 포용정책 등 가능한 정책을 모두 동원해 시의적절하게 엮어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문=주한미군 지위변경 문제는 사실 북-미 국교정상화 협의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다뤄질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게 고도의 외교력이다.


#사=북한도 변화할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주한미군 문제 등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로 보인다.


#문=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작은 구멍이 댐을 무너뜨린다.


#하=물론 북도 변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 속도가 너무 느리고, 변화를 위한 대가가 너무 크다면 문제다. 북한의 현 시스템으로는 가시적인 변화를 기대하기 쉽지 않다.


#문=지금 북한의 지배구조로는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덩샤오핑 개방도 처음부터 큰 그림을 갖고 시작한 게 아니다.


#사=북-미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문=그동안 정부는 페리 보고서에 포용정책의 기조를 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 우리의 일괄타결안이 많이 반영됐다. 이제 실행이 중요하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 임기 17개월을 남겨두고 있는 클린턴 행정부는 곧 '레임덕'에 시달릴 것이고, 공화당이 지배하는 의회는 대북 강경책을 쓸 가능성이 높다.


#하=문 교수의 말처럼 미국은 국내정치 일정 때문에 강경기조로 갈 가능성이 많다. 더욱이 내년 대선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상당한 강공책이 나올 것이다. 미국과 한국도 포용정책에는 합의했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서로 강조점이 다르다.


#사=미국이 그동안 금창리 문제 등에 너무 민감했던 것은 아닌가?


#문=미국에 북한을 다루는 그룹은 두 부류다. 핵 전문가와 한반도 전문가다. 정책결정에는 핵 전문가의 입김이 더 센 것 같다. 그런데 핵 전문가는 북한을 잘 모른다. 북한은 64년 이후 전국토의 요새화를 추구했다. 지하시설은 사실 금창리뿐이 아닐 것이다. 이것을 모두 핵 시설로 볼 수 없다. 그러나 핵 전문가들은 북한의 실상을 잘 모른다. 북한이 땅을 파면 혹시 핵시설 아니냐고 의심부터 한다. 사실 대북 강경론에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북한의 한-일 위협, 중국의 대만 위협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해 전략방위구상 이후 죽어가는 '별들의 전쟁'을 되살리려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세력이 있다.


#하=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어쩌면 북한을 영원히 잘 알 수 없을지 모른다. 북한 스스로 강성대국 건설을 내걸고 있다. 정치 슬로건만은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 21세기에 대비한 청사진일 수 있다. 이런 청사진에서 북한의 변화 가능성을 엿볼 수 없는 게 문제다.


#문=문제는 페리 이후다. 페리가 보고서를 내고 물러났을 때 후임자가 누구냐가 중요하다. 웬디 셔먼 대사가 유력한데, 셔먼이 레임 덕의 시기에 공화당의 강경공세 속에서 얼마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지 우려된다.


#사=한반도 문제가 한-미-일과 북한 축으로 움직이는데, 이를 보는 중국 입장은 어떨 것으로 보는가?


#하=단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 악화가 한반도에 영향을 줄 것이다. 물론 중국은 북한의 지도부에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진 않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전체 차원에서는 북한의 안정을 바란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 유지도 기대한다. 한-미-일 공조 체제에서 중국이 빠지는 것을 그냥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문=페리 보고서의 내용이 중국의 이익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북한의 현상유지를 바란다. 페리 보고서에서 북한의 체제안정을 인정해주는 것은 '지연된 교차승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은 반대 안할 것이다. 또 중국은 제네바 4자회담의 일원이기 때문에, 페리 보고서는 4자회담에서 걸러질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


#사=남겨진 과제를 정리해보자.


#문=아직 북한의 의도에 확실성이 없다. 부단한 검증이 필요하다. 인내와 신중한 접근도 필요하다. 페리 보고서는 이제 출발점이다. 지금부터 미국이 충실히 이행해나갈 수 있도록 외교력을 동원해야 한다. 잘못하면 정작 결실을 못 거둘 수도 있다.


#하=냉전구조가 탈냉전으로 바뀐다고 냉전구조를 만들었던 행위자가 반드시 탈냉전 상태로 변화한다고 볼 수는 없다. 둘 다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책적으로는 선택적 포용이 중요하다. 필요한 정책적 수단을 모두 동원해 효과적인 처방을 내리는 게 필요하다. 지금보다 더 세련된 포용정책이 요구된다. 정리/박병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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