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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규, 『조선정치사의 발견: 조선의 정치지형과 문명전환의 위기』 (파주:창비, 2013)
 

2013-10-26 

201310월 세미나 기록

 

일시: 20131026() 1:30-3:30

장소: 삼성경제연구소 회의실

참석: 하영선, 손열, 강상규, 이헌미, 도종윤, 송지예, 용채영

발제: 강상규, 『조선정치사의 발견: 조선의 정치지형과 문명전환의 위기』 (파주:창비, 2013)





발표내용

 

강상규

-들어가기: 19세기 조선의 마지막을 주로 보면서 조선이 노쇠해가는 모습, 조선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조선의 망국을 이야기하기 어렵겠다는 생각. 19세기에서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조선정치의 구조 혹은 조선정치가 500년간 어떤 큰 변화를 하게 되었는지를 보고자 함. 역사를 바라보는 것으로서의 발전 사관이나 역사인식의 시각을 이야기하는 여러 방법에 대해서 뭐가 더 설득력이 있는지를 고민하다가 각각 역사를 포착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됨. 역사에 대한 일종의 시각을 둘러싼 논의를 나름대로 정립해가야 하고, 다중거울의 관점에서 역사를 발견해나간다고 생각함. 이것보다 훨씬 복합적, 중층적인 세계를 바라볼 때 어떤 거울들이 필요한가, 무엇을 비춰주지 못하는지 이를 생각해봐야 함.

-기본적으로 책은 3부로 나뉘어져 있음. 1부는 조선정치구조가 어떻게 생겨나는지의 틀이 중심임. 조선이 건국된 이후의 틀, 그것들이 만들어진 후 어떤 큰 변화들이 나타나는지 1 2장에서 다룸. 조선이 19세기에 이르게 되는 과정까지의 조선정치 틀의 변화, 사유경향성의 틀의 변화 논의. 2부에서는 19세기 서세동점에서 한중일이 어떻게, 기존질서를 흔들리게 되었는지 생각함. 주로 만국공법을 중심으로 해서 중국,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그런 위기를 맞이했고, 어떤 위기의식을 갖고 대응을 했는지 생각. 3부에서는 그런 변화하는 19세기 헤매고 있던 상황에서 국왕이 어떻게 당시 상황을 읽고 있었고, 읽고 있었다는 근거는 무엇이며, 어떤 대응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정치적인 사건들이 전개가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함. 주로 1부와 3부의 내용 논의하고자 함.

- 1부 조선으로의 시간여행. 역사를 박제화하지 않고, 생생히 느끼려면 추체험이 필요함. 조선시대에 나타난 몇 차례의 거대한 시대정신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성.

가재가 껍질을 벗고 왜 굳이 탈피를 하려고 하는지, 어떻게 탈피를 하는지의 이유는 역사적 패러다임과 유사함. 변화하는 몸과 변화하지 않는 껍질 간의 긴장관계 발생함. 기존의 껍질이 어느 순간 질곡되는 순간이 발생함. 그런 시점에서 가재는 껍질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고, 새로운 껍질을 갈아입어야 함.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 ‘빠르게 변화하는 것느리게 변화하는 것간의 긴장과 유사하다. 역사를 움직이는 큰 힘에 관한 이야기, 구분들을 생각해봄. 그러다가 가재를 다시 관찰해 봄. 가재가 어떻게 작은 껍질 속에서 더 큰 껍질을 가진 가재가 탄생하냐? 어떻게 딱딱한 box안에서 더 큰 box가 준비될 수 있냐? 역사의 전환기와 유사

- 조선건국과 15세기(조선전기)

-조선 전기는 약 100. 조선의 탄생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맞물려 있음. 선진 유학-불교-신유학의 시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조선의 건국이 이루어짐. 구체적으로는 원명교체의 흐름과 맞물림. 신유학(New-confucianism)의 특징들이 조선에서 어떤 특징들을 가지는지 다룸. 조선이 국가만들기 작업 착수을 했는데 그들이 무엇에 입각해서 국가를 만들려고 했는지, 정도전을 비롯한 당대의 이데올로기들이 어떤 생각을 담고 있었고, 고려를 넘어서는 국가를 만들려고 의도했던 것인가? 어떤 장치, 제도들에 의해서 구체적인 힘을 얻게 되는지? 그런 과정에서 조선의 정치적 특징들이 모양을 드러냄.

-사상적 경향성은 수기(修己)보다는 치인(治人)에 관심. 리얼리즘적. 관련 제도적 장치들, 공적인 권리들을 어떻게 공공성의 영역으로 묶어둘 것인지, 왕권을 어떤 방식으로 견제할 것인가의 부분. 대간, 상소 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발견하고 있는지. 조선에서 이성계가 물리력을 장악한 상황. 어떻게 국왕의 권력, 얼마 되지도 않은 유학자들이 견제하려고 했고, 어떤 긴장관계가 만들어졌는지 논의함.

-조선의 군신관계는 상호의존적 긴장관계로서 조선전기엔 왕권이 상대적 자율성 견지함.

세종의 왕권에 대해 주체적인 부분만 강조하지만 세종은 항상 주체와 상생을 같이 가져가려고 함. 농사직설을 통해 우리 체질에 맞는 농법 고민하였고, 탕약집성방 등을 통해 중국과 다른 우리 몸에 대한 약초들 모색함. 그런 것들은 한글 창제의 고민과 흡사하게 닮아있음. 성공적인 사례들을 어떻게 들여다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함. 조선의 탄생 후, 신유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어려웠음. 매듭짓는 것은 성종의 경국대전 완성 후.

-16세기-17세기 조선중기엔 유교국가로서의 여러 모습들이 갖춰지게 되면서, 어느 정도 새로운 흐름들, 사람들의 고민들이 만들어짐. 기존에 치인에 관심을 둔 사상적 경향들, 그런 realism이 일상 속에서 자기 삶을 닦아가는 과정으로 관심 이동. 이동하게 되면서 더 엄격한 사고나 사유들이 주류로 떠오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됨. 일단의 상징적 관계, 조광조 등의 사람. 인물들이 사상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됨. 이런 것과 맞물려 사상적인 맥락 속에서의 논의가 심화되고, 율곡, 퇴계를 비롯한 나름대로 조선을 비롯한 성리학의 깊이들이 마련됨. 조선전기에 나타난 중앙집권적 국가의 모습, 그런 권위들이 지방들로 확산되어 감. 조선의 사회라는 모습이 대단히 일상적. 구체적으로 왕권의 상대적 자율성 제한됨. 왕이라는 존재는 신하들 또는 지식인들에 의해 끌어내려질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되었고 군신관계 다른 색깔로 전개됨.

-조선후기엔 수 차례의 전쟁, 계속된 기상이변 등 대내외적 상황의 변화로 송시열적인 담론이 조선의 사상 지배,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의 틀을 지워주는 것으로 나아감. 여러 혼돈 속에서 조선정치를 주도하는 사상이 어떤 명분들을 갖게 되었는지, 북벌론의 맥락이 무엇인가, 결국 조선 만이 유일하게 문명이다라는 조선중화주의 사고가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는지 살펴봄. 사상사적인 경향으로는 조선의 사상이 더욱 더 정신적인 것으로 변화함에 따라 균형이 깨짐. 사회적 신뢰 동요, 맹목적 자부심의 팽배, 세계적 고립주의 경향 강화의 이런 흐름에서 실학파의 등장, 평가.

- 3부는 19세기 동아시아에서의 한반도를 다룸. 19세기의 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왜 19세기가 중요한가? 우리가 현재 사는 사회적 기준들이 19세기, 20세기에 만들어짐.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일상들, 사회, 정치적 모습들이 이때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냄. 이런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문명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고, 송시열적인 관점에서 유일한 문명국가인 조선. 조선 앞에 쓰나미가 몰려들게 됨. 조선지식인들에게 기존에 자리잡았던 문명표준이 깨짐.

-역사의 우연, 필연들이 섞이게 되면서 대원군이 천주교 탄압한 내막을 설명함. 결국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나타났었던 논의가 당시 조선에서, 조선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봄.

-문명패러다임의 전환기, 가능성의 중심에 존재한 국왕, 복잡한 상황을 보는 국왕의 눈, 국왕의 시각이 어떻게 변화해가는가가 중요함. 당시의 시대변환을 이분법적으로 보게 되는 시각의 문제점을 지적. 변화하는 상황들을 본 고종과 측근들, 대원군, 명성황후 등. 그리고 의를 생각해야 하는 조선 지식인, 조선 청년들의 사고. 왜 그들이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갈아탈 수 없었나? 그런 심리적인 장애는 무엇이었는가를 봄.

-지금껏 간과되어 온 순정한 사람들의 이야기. 조선인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태도임.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하겠다는 사람들. 19세기의 부국강병의 쓰나미는 죽을 수도 있어도 수용하기는 어렵고, 그대로 수용하기는 부끄러운 것이다라는 판에서 정치판이 벌어짐. 그 안에서 다른 정부, 다른 생각을 한 국왕과 끊임없이 엇박자를 만들었던 것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음.

-서구, 일본, 한국의 서로 다른 19세기가 있고, 각각의 패러독스가 있음. 르누아르 그림에 보이듯이 서구는 자유분방함이 있음. 일본은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부악 36경 그림을 보면 엄청난 파도 속에서 분투하려는 어민들의 모습이 있음. 일본인들은 위기상황에 민감하고, 세상의 흐름을 읽었지만 마키아벨리즘의 조숙한 성장으로 나가게 되었고, 그래서 제국주의로 질주함. 조선의 세한도 에서 고적한 선비정신을 볼 수 있고, 답답하지만 백자의 정신 속, ‘단아함추구함을 볼 수 있음. 그런 삶의 자세를 가지려 했던 사람들, 그들의 자존감이 어떤 유연성, 탄력성을 갖지 못하게 했고, 나라를 잃게 했는가를 볼 수 있음.

 

주요토론내용


이헌미: 기존의 선생님의 문제의식, 지적계보를 한번에 볼 수 있었던 기회가 됨. 브로델Fernand Braudel을 통해 역사의 장기변동 속에서 조선의 변동 등을 보는 구조주의적인 관심을 갖고 계신다. 브로델이 17세기 유럽의 위기론을 다루며 기후변화부터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촉발해내는지를 본 것과 같이 조선은 경연, 실록 등에서 기후변화를 관찰한 것도 연결 됨. 이 책에서 세 가지의 고민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전통국제질서, 시스템을 구성하는 단위의 속성에 대해서 집중함. 왕권, 시기구분 등을 도표화해서 분석적으로 보여주시려고 하는 것은 기존의 역사적으로만 서술되어왔던 동아시아 전통적인 국제사를 시스템화하고 그 안에서 단위의 속성을 드러내려고 함. 조선의 국가적인 자기인식에 있어서는 소중화주의 등을 다룸. 국제정치이론에서는 구성주의와 접목되는 부분이 많다. 최근 동아시아 국제정치, 국제관계사에 대한 이론화 관심. 이것과 함께 브로델의 장기적인 변화, 단기적인 사건사의 변화, 중간 단계 변화들로서 17세기 위기와 19세기 위기 대비해서 말씀해주셨는데 17세기 위기는 천재지변에 대응하는 기술적인 자원도구, 한계 등 지역정치 변화를 보여준다. 논문에서 두 개의 위기를 직접비교 하지는 않았지만 17세기 위기는 원인의 차이로서 행위자로서 국가의 변화가 있음. 단위 간의 상호작용의 차이를 명확하게 비교하면서 책을 독해해보고 싶다. 시기구분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분석적.


조선전기, 중기의 경우 비대칭적으로 상호 의존하던 것, 군신관계. 조선전기는 군주 쪽에 가있고, 중기에는 좀 더 신료들 쪽에 가있는데, 후기, 말기로 들어가면 명확하게 보이지 않음. 여러 요인으로 비대칭적 상호의존관계가 해체된다고 서술. 어떤 점에서 제임스 팔레James Bernard Palais를 비판하면서 후기에서는 지배연합 논의로 수렴되는 측면이 있는 듯.


마지막으로는 조선백자와 수기적인 부분으로 마무리 지으셨는데, 분석수준에 있어서 국제정치이론의 종말론. 탈냉전 이후에는 분석수준을 개인들로 돌아가자고 함. 분석수준에 있어서 아주 큰 장기적인 역사변동에서 시작했고, 그리고 국가이미지, Second Image론을 이야기했지만 결국 첫 번째 이미지로 수렴된다는 느낌.

 

강상규: 정확한 지적. 조선의 군신관계의 비대칭적인 상호의존관계가 어떻게 변동해가는지, 조선 전기에 군주가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었던 상황이 한번 넘어간 뒤에 중기-후기-말기로 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지. 중기가 후기, 말기로 가면서 다른 변화의 가능성, 구조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주 노련한 국왕, 정치적인 카리스마나 당시의 정치적, 지적 정통성을 가진 존재가 권력적으로 강한 권위에 기대어서 행사할 수 있었던 여지가 존재했던 만큼 그런 점에서 특이한 국왕들이 나타날 수는 있었음. 그러나 중기 이후에 신하중심, 지식인 중심의 정치적 판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팔레는 지배연합으로서의 공생관계, 군주-신하 간의 공생관계가 중심이었다고 하는데 19세기 부분에선 상당히 맞는다. 그러나 그 부분이 조선 전체에 일반화시키기에는 곤란하지 않는가. 그런 과정 속에서 예컨대 국왕이 변화에 대해 갈망했을지라고 그 앞에 높인 정치적 장벽들을 의미 있게 정리하는 작업을 마련하는 데에는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생각함. 수기-치인적인 관심과 관련해서는 결국 그런 정치적인 엇박자들이 서로 보는 시각들이 다르고, 주목하는 사태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그런 속에서 정치적인 큰 흐름은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으로 가게 됨. 그런 사람에서 개별적인 사람들, 개별 인들의 사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체제가 성공적으로 굴러간다 또는 아니다 만을 다루는 것은 안 됨. 당시 살았던 사람들, 조선의 순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쩌면 조선에 대한 첫 문제의식임. 조선의 삶, 생각을 모른 채로 조선의 노쇠함, 죽어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왜곡된 이야기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조선인들이 왜 부국강병을 부끄럽다고 생각했는지, 이러한 논의가 19세기 쓰나미로 인해 무기력하게 끝날 때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들임. 원래는 1890년 이후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으로 옮겨가는 상황에서 대중정치가 나타나게 되는지. 아픔, 혼란을 겪으면서 20세기 한국이 겪는 혼란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 이후는 손을 놓음.

 

하영선: 고종평가 문제가 있음. 조선정치사에서 고종을 재평가하려면 조선의 삶 속에서 재조명해야 하는데, 조선의 정치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19세기를 일방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움. 일본연구자들의 19세기 연구들도 그렇고, 서양사료들을 갖고 19세기 연구자들도 있음. 그런 속에서는 명백히 조선정치공간에 재발견보다는 확보, 그 이야기가 기초가 되어서 그 다음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빠지게 됨. 국내의 논의가 그 동안 제한적이었음.

 

 정치의 최종적 평가는 결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결과의 논리에 따른다면, 그 동안, 과소평가되었던 고종의 제대로 된 정치 평가가 대단히 중요함. 사료들을 보면서 느끼는 기분은 적어도 70년대 초반, 이래에 개화나 척사의 사람들을 하고 있는 얘기를 보면 상당히 고민을 가지고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음. 이에 대한 그 동안의 저평가를 바로 잡아보려는 노력은 중요하나,결과적으로 그ㅏㄴ 노력이 그 역사의 현실에서 바람빅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면 긍정적 평가가 지나친 비약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오늘의 역사를 봐도 대통령이 정치공간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안팎의 어려움, 혼란 속에서 커다란 방향설정을 해야 할 때 미묘한 타이밍과, 약간의 보폭차이에 따라서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뒤집히는 수가 있음. 결국 결과의 논리로서보자면 고종은 객관적으로 조선조의 국망에 대해 책임이 없을 수는 없다. 척사와 개화 윤음을 봐도 고종은 서양문물과 개화를 이야기하면서 상당한 관찰력도 있고, 현실정치가의 혜안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결국 좌절의 역사를 가져 온  밖의 위협에 대해 안의 대응이 실패했으므로, 고종의 정치공간을 제대로 복원하되 동시에 그 한계를 지적할 수 있어야 고종의 재조명은 제대로 될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정치사의 발견이라는 시야에서 500년을 되돌아 볼 때 군, , 민의 세 정치공간이 어떻게 짜여졌는지가 중요하다. 후기를 1640-1800, 1800년부터 1910년으로 나누고 있으나. 실제 순조부터 1863년까지가 세도정치의 절정기였고, 17세기 중반부터 1800년 정조까지, 노론계열들에 의해 왕권이 대단히 취약해지고 신권의 정치공간이 상당히 커지게 됨. 세도정치는 이에 대한 연속일 수 밖에 없음. 정조는 왕권강화로 이를 엎으려다가 좌절함. 1760년이 아니라 1800년에서 시기를 구분하고 있는데, 세도정치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1860년대부터는 서양의 개입으로 인해 새로운 딜레마에 들어가는 시기임.


18세기 군, , 민의 정치공간 관계에서 왕권은 상대적으로 제약된 속에서. 가장 몸부림친 정조는 명분적으로는 왕조지만 사실은 내가 왕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정도로 어려움에 봉착했었다. 정조가 수원천도를 시도하고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병력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사실은 왕의 정치공간이 얼마나 제약되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음.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왕의 정치공간은 좁았음. 18-19세기 민 보다 신의 정치 공간이 늘어나고, 군의 정치공간도 줄어듬. 18세기 후반 정조는 왕권강화를 통한 위민을 시도했으나, 지나친 노론중심의 정치공간을 왕의 정치 공간 확대로 균형을 취하되, 과도한 민의 정치공간을 확대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함.  

 

강상규: 3-4기의 전환에서는 천주교 탄압을 볼 수 있음. 사상의 자유가 논의되다가 1801년 고종 사후 사상탄압이 이루어짐. 국가의 조정자역할을 하던 국왕이 사라지던 자리에서 정순황후가 사상탄압 착수. 조선에 이양선들이 등장하고, 민란들이 등장. 3기까지 나타났던 송시열 시대와의 차이점이다. 그런 것들이 이른바 조선정치, 세도정치라는 것도 3기까지 에서 나타났던 나름대로의 정신주의적인 경향 등 위기의 징후들을 반영하며,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면서 권력 자체가 자의적으로, 개별적인 사적 전제들에 의해서 운영되게 됨. 최소한의 룰도 별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들이 19세기 초반부터 분명하게 나타남. 이런 가운데 서양의 쓰나미를 만나게 된다는 것으로 4기를 생각하고 있음.

 

국왕이라는 존재를 시기구분에서 주목해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부수적인 존재의 국왕이 아니라 인조반정 등 국왕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조선의 정치구분 등, 국왕이 고려된 형태의 시대구분은 없었다. 순전히 왜란을 중심으로 나눈다 던지, 조선의 사상의 흐름 속에서 몇 가지 시기구분을 하지만 이런 정신적 경향성과 함께 동시에 구체적인 현실정치의 이야기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경계가 되는 국왕이라는 존재들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는가, 3, 4기를 나눌 땐 그런 고민을 하던 영, 정조가 정치공간에서 사라지게 되는, 그 사라질 때의 정치공간은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정치책임론의 문제는 이론(異論)이 없음. 이 시기의 정치책임, 어떤 의미에선 고종에게 본격적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더 하진 않았지만 사실 통렬한, 어떤 의미에선 고종에 대한 비판이 담긴 이야기임. 결국 정치가가 정치책임이라는 문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 얼마나 가혹한 한국상황이 전개가 되었고 고종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정치가 실패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정치가가 자신의 의도가 정당한 것이었다고 해도 이것만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음. 19세기 끝, 20세기 초반으로 가면 이 이야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이를 접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어려움. 들여다보고, 정리할 게 많아진다고 생각해서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빼버리고 대체로 갑신정변, 1880년대 후반까지의 논의에서 이야기를 적지 않으면 안 된다. 19세기 후반 이후, 다른 정치패러다임의 등장으로 새로운 정치적인 것.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나와야 되는 것. 최정운 선생님이 그 이후의 시기를 다루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함. 고종에 관한 이야기들은 일단 개인적으로는 실패한 국왕의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점에서 정치가의 책임의 문제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사실 이야기하고 싶었음.

 

하영선: 속편은 1890년대 이후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가?

 

강상규: 이후, 도쿄전범재판의 문제도 다루고 싶음. 그리고 원자력발전소가 일본에서의 등장하기 전에 여러 가지 논리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나 다루고 싶음. 핵폭탄을 경험한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등장하는 과정, 어떤 이야기 속에서 전개가 되었는지가 20세기 이후 시기 중의 관심임.

책에 대한 사학계 쪽에서 나온 서평은 별로 없음.

 

하영선: 국내 사학계에서 강상규의 500년 사에 대한 평가를 하기는 어려울 듯. 정치학자가 정치공간에 얽혀진 잣대를 갖고 500년을 다시 잿고, 정치발전의 측면에서도 중국과 연계된 국제부분과 국내정치 부분을 섞는 방식의 강상규 류로 다루었기 때문에 사학계에서 코멘트하기 난감할 듯.

 

김상배: 서양정치사를 보는 역사사회학적인 틀을 더 끌어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강상규: 우리 이야기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해 잘못하면 남의 시선으로,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 위에 입히는 느낌임. 어떤 식으로든 그런 이야기들을 앞세우는 것이 오히려 가독성도 떨어뜨리고, 마치 브로델이 옳은가의 여부로 가게 되므로 대화를 어렵게 할 것임. 알맹이는 그게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하면서 최대한 그런 부분은 압축해서 진행해야 한다.

 

하영선: 동의함. 그래도 여전히 서양이야기가 시각부분에서도 많음. 설정하고 있는 군, , 민이라는 당시의 카테고리만 갖고도 애환의 드라마는 충분히 그려낼 수 있음. 서양 역사사회학적인 측면은 제한적임.

 

김상배: 여러 시각들 중에 하나를 선택.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의 틀 가운데 독자적인 방법을 찾아가는 것 같은데, 상대화하는 방법들 중에 하나일 듯.

 

하영선: 사학계에서 보기엔 굉장히 틀이 있는 연구로 생각할 것임.

 

김상배: 패러다임, 이 분야에서 논의하는 사학자들의 반응은 있나?

 

강상규: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쉽게 이해된다는 이야기들을 함. 일본의 관점도 연결되는데, 20세기 동아시아를 들여다 볼 때 key가 아닌가. 원자력발전, 에너지 문제가 시간이 가능한 선에서부터 작업 필요할 듯. 조선정치사의 이야기가 결국 역사를 보는 시각이나 당대 조선역사를 보는 시각을 이야기하면서 역사철학 등 제 나름대로 고민해보는 작업이 될 것 같음. 21세기 역사이야기로 넘어가게 될 듯.

 

하영선: 일본학계의 연구도 지역연구 등과 잘 연결 안 되는 듯. 아베 총리가 지난주 연설에서 자기는 메이지 시대의 자조론을 기본 텍스트로 삼고 이야기를 하고 있음. 21세기 일본을 전공하는 분들은 자조론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듯. 그러나 아베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핵심이라고 생각함. 지금 미일이 중국에 대해서 판을 짠다고 하는데 드디어 일본이 1938년 고노에 정부가 '동아 신질서' 논의를 시작했듯이. 70-80년 만에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국가안전보장전략'만 피상적으로 보면 안 됨.  메이지나 쇼와 시대 때의 지역 제국질서 시야가 21세기 아베의 시야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또 아베의 시야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일본 전문가들이 제대로 분석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강상규: 그런 것들을 조금 정리를 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작업들이 나타나야 할 시기라고 봄. 제가 일본 유학을 간 것도 대학 초기의 문제의식에 따름. 마르크스, 마루야마 마사오를 보고 느낀 지적 충격이 있었음. 계속 더 몰입해가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로 안 되겠다, 또한 마루야마를 보다가 마루야마 이야기만 갖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함. 이런 과정들을 통해 이제 뭔가 조금씩 내 나름대로의 색이 들어간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그런 작업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함. 조선은 고려와는 매우 다른 색을 지님. 앞 시기, 인류의 문명사와 결국 이야기들이 다 이어진다. 결국 근현대 19세기, 20세기와 연결되며 그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이야기들이 연결되어서 논의될 수 있도록 작업해야겠고, 이제는 원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손열: 21세기도 다 좋은데. 보통 일본, 동아시아를 공부할 때 19세기를 한번은 거치게 됨. 일본은 왜 성공했는가라는 빠지지 않는 질문에서 대부분 인물 중심으로 감. 하나, 근대 이전의 정치체제의 특징, , 이것이 밖의 세계와 만날 때의 긴장, 세 번째는 정치지도자의 입장을 고려한 글이 나왔으면 좋겠다. 세 가지가 mix되어서 조선의 죽음이 나왔다면 일본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음. 꼭 같은 frame일 필요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한일비교가 새롭게 나오면 굉장히 좋겠다. 그런 글을 끊임없이 찾고 있지만 쉽지 않음.

 

강상규: 질문도 분석할 필요. 일본이 성공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를 좀 더 나누어서 볼 필요가 있을 듯. 어떤 사건이 있었으면 장기적 파장부터 중장기적 파장까지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 일본이 전전, 전쟁 중, 전쟁 종결과정, 전후. 일본이 어떻게 원폭을 맞았고, 지진의 나라에서 원자력 발전소라는 것을 만들었을까? 논리적으로는 가능할 듯. 핵에 대한 발상을 갖게 되고, 평화의 도구가 되고. 문제는 일본은 객관적으로 가졌던 구조적인 특성들, 일본이 버릴 수 없는 특성들이 있음. 일본을 알면 알수록 그런 질문들이 떠나지 않음. 끊임없이 지진이 발생하는 나라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이렇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 인가. 거짓말처럼 일본이 피폭경험을 했고, 원자력발전소가 일본을 공격하는 경험을 21세기에 겪음. 일본 메이지, 놀라운 순발력 등을 주목해야 함과 동시에 이런 것들이 가진 여러 한계들이 결국 일본을 어떻게 추악하게 만드는지. 이런 이야기들이 여러 시점 속에서 논의되어야 우리 20세기에 경험해서 일희일비하지 않고 역사를 관조하는 안목들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임.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그런 시야를 가지면서 단기적인 성공 등에 머무르지 않는 고민들을 할 수 있게 하지 않나. 어떤 의미에서 결국 진보사관의 위험성 등을 굳이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우리가 생각한 틀 자체가 한계가 많다는 것임. 역사 재단이 보편화, 상식으로 자리잡은 것들이 우리 사고 빈곤하게 만드는 것 아닌지. 한중일의 역사 등은 더 조심스럽지만 긴 시간 속에서 단기, 중기, 여러 시선들. 여러 위치에 놓인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 고려할 필요가 있음. 인물 몇 사람을 본다든지, 여러 다른 지점에 있던 인물들을 보게 되면 얻은 것과 잃은 것들이 더 와 닿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영선: 중요한 발제였고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매우 재미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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