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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역), 신헌의 <심행일기> (10.12.18)
 

2012-02-29 
일시: 2010년 12월 18일(토) 오후 3시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자: 하영선, 김봉진, 강상규, 김상배, 김성배, 마상윤, 이정환, 김종학, 정연, 남민욱, 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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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김 종 학 서울대 외교학과 박사과정  
     <<심행일기>> 역, 푸른역사, 2010


* 조선과 일본은 2월 11일부터 13일 까지 3차에 걸쳐 회담. 주로 운요호 사건에 대해 구로다가 문제를 제기하고 신헌이 변명하는 형식. 막상 가장 중요한 조약 초안은 마지막 날인 13일 조선측에 제시하게 됨. 이에 대해 신헌은 전권 자격이 없었기에 조선 정부에 알리고 그 결과를 다시 알려주겠다고 함. 조선측은 2월 21일 그에 답변을 줌.

* 일본 측 초안에서 논란이 되었던 부분: 조선은 일본의 수호조규 초안을 검토하고 수정을 요구하거나 수용함. 그리고 덧붙여 여섯가지 준칙을 제시.

- 전문(頭辭): 조선측은 “大일본국과 조선국”, “일본국 황제폐하와 조선국 주상전하” 문제제기. 일본국 정부, 조선국 정부, 라고 지칭할 것을 제안 → 최종안은 황제폐하와 주상전하는 모두 일본국 정부, 조선국 정부로 수정, 국명은 모두 大일본국 大조선국으로 하기로. 이후 조선이 다른 국가와 조약체결시 국명을 大조선국이라고 표기하게 됨. 한 가지 예외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조선국이라고만 함.
- 제1관: 일본은 “自主之邦”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청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함. “寬裕弘通”이란 근대적 조약관계 의미. → 일본은 왜관의 설치 등과 관련하여 조선에 일방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설득하여 수용함.
- 제2관: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조항. 조선측 사신이 일본을 방문할 경우 외무성 귀관을 만난다고 한 반면, 일본측 사신은 조선측 병권대신, 즉 영의정이 직접 맞는다고 한 것은 양국이 대등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라는 점 지적. 조선 측에서는 상주사절의 개념 또한 없었으므로, 사건이 있는 경우 개항장 주재 일본관리가 그 곳을 다스리는 조선관리와 만나야 한다고 주장. → 결론적으로 사신을 파견했을 때 만나는 급(일본 외무경, 조선 예조판서)은 일치시킴. 그러나 사절단 상주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1982년 가서야 결정됨.
- 제3관: 일본국은 일본국문, 조선은 眞文 즉 한문을 사용한다는 조항, 문제 없이 넘어감.
- 제4관: 역시 별 문제 없었으나, 일본인의 거주에 대해 한정을 지음.
- 제5관: 개항 항구를 강화도나 인천 등 경성 가까운 곳으로 하라고 일본 관리들이 무조건적으로 지시하는데, 이는 당시 일본관료들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냄. 그런데 구로다가 파견되어 해역을 탐사하면서 영흥부(러시아 해군이 눈독을 들이던 곳, 태조 이성계가 처음 일어난 곳=용흥지지)와 1개항구로 변경. 그러나 조선은 영흥부, 충청도와 전라도는 안된다는 입장. → 결국 영흥은 제외됨. 그러나 경기, 충청, 전라, 경상 중 한 항구를 지정할 수 있다는 조항은 유지됨.
-제6관: 일본국 선박의 구조는 인도적 견지에서 무난히 합의됨.
-제7관: 조선은 근해 탐사 자유를 허용해줌. 이는 조선이 당시 국제정세에 어두웠다는 것을 보여줌.
-제8관: 조선국의 지정된 항구에 일본국 상민을 관리하는 官을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된 사건은 해당 지방관과 만나서 상의한다고 하는 내용. → 조선 수용 가능하다고 답변.
-제9관: 사무역 허용하자는 일본의 주장에 조선은 반대 입장 표명. 왜관무역은 거의 공무역이었음. → 그러나 결국 일본측 요구를 따라가게 됨.
-제10관: 조선인이 일본에서의 영사재판권에 대한 부분은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등한 요소 존재. 그러나 조선 측에서는 이를 별문제없이 받아들임. 흥미로운 것은 이 조항은 구로다에 의해 추가된 것이라는 점.
-제11관: 추가 회담에 대해 조선은 부정적이었으나, 결국 일본측 요구 수용
-제12관: 최혜국 조항. 조선은 절대 앞으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안 맺을 것이기 때문에 이 조항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서 삭제할 것을 주장. → 구로다가 이를 인정하여 삭제. 그러나 이것은 이미 태정관 훈령에 존재했음.

<1, 2, 3차 협상기록 중>
- 강화도조약 체결시 신헌의 협상전략을 알 수 있음
- international law(만국공법)의 번역 및 태극기의 유래를 추측할 수 있는 구절 등장

<보론> 2002년 동경대 사학 잡지, 스즈키 준의 논문: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운요호사건의 전말은 당시 운요호 함장이었던 이노우에 요시카의 보고서에 기반한 것. 그 보고서는 10월 9일자 기록인데, 스즈키 준은 9월 20일자 보고서 발굴, 이는 이노우에 요시카 보고서를 외무성이 후에 개작했음을 보여줌.

토론

강상규: 휘튼의 만국공법은 독립이라는 표현을 안 쓰던데. “자주독립”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일본이 만국공법을 번역한 판본 중 1880년대 본이 처음이다-“자주”라는 말에 “독립”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이는 일반적으로 “독립”이라는 표현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쉽게 인식할 수 없는 개념이 아니지 않았나? 이와 유사하게, 수호조약원문 번역을 할 때 “주권”이라는 단어를 번역어에 집어넣었는데, 일부러 집어넣은 것인가? 이러한 표현을 넣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가 국제라는 표현을 찾아보면서 느낀 것인데, “각국 교제” 라는 것이 “국제” 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만국공법 책 본문을 보니까, 중국인이 쓴 서론과 마틴이 쓴 범례 외에는 “만국”이라는 말이 안나오고 “공법”이라고 표현. 결국 “만국공법”이라는 표현은 책을 다 쓴 후 제목을 붙이면서 나오지 않았을까 추측되는데. 일단은 “공법”이라고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왜 公인가 하는 부분은 공법회통 등에서 이어졌던 것이지 않았을까. 당시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공도 공법으로 옮겨도 어려움이 없었겠구나,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 결국 평등지권 파트에 “주권”이라고 표현하는 문제에 있어서 더 신중해야 할 것으로 보임.

그리고 신헌의 위치를 박규수와 흥선대원군 사이로 보고 있는데, 이전에 제가 박규수와 고종, 대원군의 관계에 대한 발표를 했었지만, 오늘 발표는 그들 둘 사이에서 신헌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찾는 문제로서 제 문제의식과 이어진다고 본다. 저는 박규수 뒤에 고종이 존재했고, 강화도 조약에서 보이는 신헌의 입장은 고종과 흥선대원군 사이에 존재했다고 생각. 박규수는 실학과 북학의 가교 이상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는 국내정치적 상황을 보다 고려해야 하는 문제이다.

김봉진: “자주지방”에서 “자주”, “독립”은 만국공법에 나오나, “독립”이라는 용어는 안 나옴. 독립은 후쿠자와에 가서야 나온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쓴 “자립”라는 용어를 누르고 “독립”이라는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 더 널리 쓰이게 됨. “평등”이라는 말은 청프 조약에서 등장하게 되는데, 조약문을 통해서 근대 많은 번역어가 탄생하게 된다. 平, 均 등의 용어와 관련해서도 1858년 영청조약에 “평등”이라는 말이 그대로 나오고 이것이 굳어짐. 자주지방, 평등지권이라는 용어도 조약문에 그대로 나옴.
Parkes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 사람들이 International Law를 읽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바로 오경석, 강위이었을 것이고, 그들 뒤에는 박규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고종이 있었는데, 제 생각에는 ‘박규수 뒤에 고종’이 아니라 ‘고종 뒤에 박규수’가 있었다고 본다. 이들이 만국공법을 읽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고 본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강위나 오경석이 조약문을 베껴서 조정에 보고한 이후 의정부에서 조약문을 검토하고 논의하게 되는데, 그 내용을 알 방도는 없는가?

김종학: 관찬자료는 없고, 어전회의를 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조항별로 내용은 안나옴. 그 이상의 자료는 없음.

김봉진: 욕심내자면 청국 자료도 추가하는 것도 좋을 듯.

하영선: 우선, 고생한 만큼 학계에 기여한 바도 있다고 봄. 일단 박사학위를 마치기 위해서는 심행일기를 빨리 버려라. 학위논문의 목적에 대한 천착 필요. 다시 말해서 신헌이나 강위 등의 인물에 주목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조일수호조규에 대한 事實적인 부분을 밝힘으로써 기존의 논의를 수정하려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국제정치학적인 의미에서 기존의 수호조규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려는 것이냐?

내가 권하고 싶은 것은 심행일기, 심행잡기를 기초로 하되, 핵심은 조일수호조규가 벌어졌던 정치 드라마를 실증적인 사료를 가지고 증명하는 작업, 그리고 사학자들이 할 수 없는 영역에서 정치적 상상력으로 사건을 재구성해야 한다. 문서를 정치적 상상력으로 읽을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 아무리 좋은 자료라도 상상력이 없으면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정치적 상상력을 위해서는 심행일기보다 심행잡기가 더 의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심행잡기가 더 재미있었음.

수호조규 맺어질 당시 동아시아에는 , 이유원에게 보내는이홍장의 글, 일본의 주장, 대원군을 위시한 전통적 시각, 개화파의 글 등. 네 개의 언어가 동시에 존재했다. 정치적 싸움을 통해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됐는데, 실제로 조규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지는 사학계가 밝혀야 할 일이지만, 그 조규 내용이 어떠한 정치적 계산에서 나왔는지를 밝히는 일은 정치학에서 할 일이다. 따라서 조규의 해석이 제대로 되어야 정치학적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위, 신헌, 대원군, 일본이 각각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어떠한 편차를 보이는가? 심행잡기 첫 부분을 보면 본인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고 있는데, 그 문장의 내용을 보면 넓은 의미에서는 해방론적인 시각을 크게 넘어서지 않고 있다. 형식은 만국공법을 기초로 하지만, 뒤에는 부강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헌, 고종, 박규수, 강위의 입장은 얼마만큼 같고 얼마만큼 다른가? 이들 시각이 전통시각과 충돌했던 정치 역학이 조일수호조규 13개 조항으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그 두 모습을 접합해서 보여주어야 정치학논문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행일기에서 떠나라! 즉 연구의 목표는 심행일기 자체가 아니라 조일수호조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왜 조일수호조규를 다시 보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함. 결국 당시 정치를 읽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을 때, 청, 일 사이에서 조선국내의 다른 시각의 충돌, 분열을 재구성해주는 것이 정치학의 역할이며, 학계에 기여하는 재미있는 논문이 될 것이다.

김봉진: 재능과 치밀함을 통해서 실증적 분석을 베이스로 좋은 논문을 쓸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 측 활약했던 중요한 인물들과 청 측 인물들을 첨부하면 좋을 것.

김성배: 회담기록을 보면, 일본 측에서는 서계거부이유를 여러 번 묻는데, 조선 측 해명하는 것을 보면 일본 내 정한론 분위기 속에서 받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제 생각 일본이 서계문제를 집요하게 추궁했던 이유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듯. 1. 황제와 같은- 호칭문제를 확립하기 위함 2. 일본 국내정치 이유: 대만정벌에 상응할 만한 공을 세우기 위해서, 사과를 받아내려고. 그렇다면 반대로 조선 측에서는 서계접수를 거부했나? 결국 이는 대원군의 유산이 아니었을까.

하영선: Lydia Liu의 Tokens of Exchange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서계의 정치적 의미가 조일간에  각기 다른 속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인데, 그 모습을 한 단계 위에서 바라보면서 논의를 이끌어가야 할 것.

국내정치적으로 보면 굉장히 중요한 싸움이 걸려있었다. 신헌문집을 보면 효명세자에 대한 애사가 24편 포함되어 있는데, 효명세자는 직접적으로는 박규수와 연결되어 있었고, 신헌도 박규수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7-8년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수호조규가 진행되면서 신헌은 입장은 박규수 쪽이지만, 대원군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국내정치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는 처지였음. 따라서 그에 맞는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또한 국제정치적으로는 이홍장과 일본 사이에서 조선의 입지를 어떻게 다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정치적 상상력을 통해서 그 두 층위를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김봉진: 이홍장은 언제부터 관심을 보이는가? 조약 맺은 후부터, 아니면 첫날부터?

김종학: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본은 청나라에게 조선의 위치를 확답 받으려는 시도를 함. 모리 아리노리는 이홍장을 찾아가서 ‘자주’, ‘속국’이 무슨 의미냐고 물음, 이와 관련한 회견 세 차례 이루어짐. 강위가 1870년 전후 북경에 가서 필담을 하는데, 이홍장을 이미 알고 있다, 이홍장이 조선을 잘 보살펴주고 있다, 등의 이야기를 함

김봉진: 속국자주론은 나중에 나온 것이지만, 병인양요 때부터 ‘자주’ ‘속국’ 등 다양한 용어가 나오게 된다. 1975년 즈음 모리가 청에게 조선이 속국이나 자주냐, 물을 때만 해도 이홍장은 조선에 관심 없었다. 즉 속국이지만 ‘자주’(너희 알아서 해라)에 더 힘이 실려 있었다.

하영선: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심행잡기 첫 구절이 인상 깊었는데 -요즘 논문으로 말하자면 잘 쓴 서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첫 구절에서 그는 구로다가 조선에 온 이유를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말하고 스스로 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답을 보면 해방론(海防論)적인 시각이다.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은 무력으로 나올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이홍장적인 답변이다. 강위의 언어는  만국공법이나 부국강병론 이전 해방론의 틀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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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조선의 정치적 딜레마 속에서 고종, 박규수, 강위, 신헌, 대원군의 드라마는 문헌만으로는 재구성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한 시각에서 논문을 완성해야 할 것. 이 책은 부록도 참 좋은데 심행잡기, 이홍장, 등 여러 시각를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빨리 학위 논문으로  발전시킬 것.

김종학: 저의 본래 관심은 협상과정에서 오경석, 강위 등 초기 개화파 이전 시기 인물들의 사상적 배경과 역할이었음. 사실 저는 조일수호조규도 오경석의 역할이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 가지고 있었음. 현재 논의되는 ‘개화파’에 대한 시각이 일본에 의해 정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음.

김상배: 결국 사학에서 문제제기하는 방식과 정치학에서 문제제기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심행일기의 국제정치’를 넘어서서 ‘조일수호조규의 국제정치’를 보아야 할 것. 기초적으로는 당시 근대 개항조약과 암묵적인 비교 시각을 갖추고 있어야 할 것, 그리고 그것이 21세기까지 주는 시사점을 찾아야 함. 또한 ‘문화의 국제정치’와 ‘외교사’를 결합시키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봄. 마지막으로 제 연구와 관련하여,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됨. 이를테면 서계문제를 둘러싼 청, 일본, 조선의 상징의 정치학 같은. 사대질서 안에 갇혀 있었던 조선을 일본이 개항시키는 과정에서, 즉, 일본이라는 요소가 네트워크를 치는 과정에서, translation이 일어나고 그것이 다시 상호 네트워크 치는 과정에서 벌이는 고차원의 파워게임으로 볼 수도 있을 것. 최근의 사회과학계의 이론적인 논의를 적용해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마상윤: 냉전시기 외교사를 했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문서에 침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주의해야 할 것.

김성배: 장점을 살려서 사길을 생동감 있게 그리되, 보다 권력 문제와 연관시켜서 쓰면 좋을 것.

하영선: 다행히 조일수호조규에 대한 기록은 남았는데, 인물, 국가간 미묘한 관계가 모두 드러나 있지는 않다. 강위는 한문을 잘해서, 오경석은 박규수나 고종의 견해를 잘 알았기에 수호조규팀에 포함되었을 것인데, 이들의 기록만을 가지고 현실을 완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기록이 더 나온다고 해도 당시의 모습을 100%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기록만을 가지고 현실이 복원될 수 없다. 그 빈 공간은 정치적 상상력으로 메워야 한다.

강상규: 한중일의 정치판과 외교를 둘러싼 큰 논의의 틀을 가지고만 보아도 재미있는 논의가 될 것. 다만 ‘국제정세’라는 표현은 변별해서 쓸 것 -과연 당시에도 ‘국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일정한 부분에 있어서는 기존 논의를 무시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일본을 두려워하여 받아드리게 되었다, 등의 이야기는 -이미 병인 신미양요를 거친 이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타당성이 없어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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