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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원, "정조의 악풍규제 양상" (10.03.27)
 

2012-02-29 
일시: 2010년 3월 27일(토) 오후 3시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자: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전재성, 손열, 송지원, 강상규,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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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송 지 원 박사님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정조(正祖)의 악풍(樂風)규제 양상"

송지원: 18세기를 중심으로, 보다 넓은 구도로 이야기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됨. 그러면서 영조대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을 연구하기 시작. 그러다보니 서명응이 도왔던 정조를 만나게 되었고, 당시 궁정음악을 보게 됨. 實技적 차원이 아니라 "예악정치의 핵심을 어떻게 찾았을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쪽으로 논문의 방향이 정해짐.
여기서 중요한 발견은, 법전이 만들어진 이후 이어 예서, 악서가 만들어졌다는 것. 예를 들어, 성종대: 경국대전-국조오례의-악학궤범, 영조대: 속대전, 속오례의, 악학궤범 복구하고 영조가 서문을 지음, 정조대: 대전통편, 대한예전, 여러 악서. 예서도 법전과 같이 인식되었음. 세종대는 문물정비기로서, 정조대는 완비기로서 법전, 예서, 악서 편찬.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스승이었던 서명응을 통해 중국 악서, 우리나라 악서를 배움. 한 일화로, 정조 2년 장악원을 소집하였는데 연주를 듣고 "음악이 되지 않았다(不成聲矣)"고 평가. 또한 이미 악서편찬 경험이 있는 서명응에게 <시악화성詩樂和聲> <국조시악國朝詩樂> 등의 이론서와 악장모음집을 편찬하게 하고 정조 자신이 서문을 씀. 홍재전서에 포함되어 있음.

음악에 대한 정조의 이러한 관심과 재능은 예악정치를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문체반정에 버금가는 것으로 생각되어 처음에는 "악풍반정"이라는 표현을 씀. 그러나 문체반정과는 달리 악풍에 反正이라는 말을 쓰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 같아, “악풍규제”로 바꿈. 그러나 그 의미는 같음.

정조는 궁정음악이 번잡하거나 빠르게 연주하는 것을 비난했는데, 너무 현란해지면 음악에 몰입하게 되므로 엄숙해야하는 자리가 난잡해지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정조는 음감이 있어서 종묘제례학 5향제 등에서 잘못 연주하는 것을 모두 지적해냄. 특히 악사들 전체가 짜고 한 단락을 빠뜨리거나 하는 경우도 지적.

일찍이 세종도 편종 이칙음이 높다는 것을 집어냄.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음악적 재능은 세종, 세조, 정조가 뛰어났음. 연산군도 음악적으로 뛰어났으나, 예와 악을 동일시하는 경향 때문에, 악이 뛰어난 연산군이라 하더라도 제외됨.

구대열: 악보 표기는 어떠한 방식이었나?

송지원: 우리 악보는 칸으로 표시. 그러나 당시 정간(한칸)의 한 박이 어느 정도 길이인지는 알 수 없음. 건강한 사람의 맥박과 호흡를 기준으로하는 양식척(量息尺)을 사용. 서양에서도 메트로놈이 18세기 바로크, 고전 그 사이 시기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에는 보폭으로 표현했음.

양란 이후 약 10년 동안 제례연주 못함. 이유는 종묘제례악 연주 시 악사 50-60명이 필요한데, 그뿐 아니라 일무(佾舞)도 필요. 천자는 8일무(64), 제후는 6일무(6x6 혹은 6x8) 대부는 4일무 士는 4일무. 그런데 그 곱하는 수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가 논쟁거리가 됨. 일수와 열수 논란은 계속됨. 숙종대에 합의을 보아 6x6으로 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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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악을 할 경우, 6x6, 36명이라고 했을 때, 文舞가 36명이고, 武舞가 10여 명 더 동원됨. 악사가 100명 단위로 움직여야 함. 이들의 출신을 보면 악공(향악, 당악 담당)은 천민, 악생(아악 담당)은 양인 기용, 그러나 천민이 악생을 할 수는 없었음. 이들은 지역할당제로 모집. 베한필을 월급으로 받았으며, 정기시험을 4회 치렀는데, 잘못하면 태형이 가해짐. 음악을 몰라도 해야 되었으며, 잘하는 사람은 정 6품으로 올라가기도ㅡ천민도 가능. 시험 중 악학궤범을 읽어야 하는 것도 있었음.

전쟁이 나면 악공들이 도망가 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아, 재충원된 악공들을 다시 교육시켜야하는 수고를 해야 함. 악공, 악생은 二六肄樂式으로 한 달에 여섯 차례ㅡ2, 6이 들어간 날에 출근하여 연습함. 궁정에 나오지 않는 날은 아르바이트를 하여 부수입으로 생계유지. <악장등록>을 보면 악생, 악공들의 생활수준이 극빈층으로로 묘사될 정도로 살기 힘들다는 기록이 많음. 예악을 중시하면서도, 악공, 악생들에 대한 대우가 그 이념과 거리가 멀었다.

현재 일본 궁내청에 천황을 위한 악사들의 경우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보수와 대우가 좋음.  조선시대 파견된 열두 차례 조선통신사 중, 초창기(17세기 전반 세 차례)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 방문시 일본 궁정음악을 들려주었는데, 중국과 한국의 궁정음악으로 구성되어있었다고 함.

구대열: 통신사일행은 쇼군만 만나고 돌아오는데, 쇼군 앞에서 아악이 연주되었나?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을 위한 음악으로 바뀐 것인가?

송지원: 통신사가 오면 쇼군들을 만나도 아악을 연주하게 함.

하영선: 문체반정을 보면서 궁금했던 점은, 당시 정조입장에서 보면 연암 류의 글쓰기가 중요한 표적이었는데, 이들은 계층으로 보면 경화사족 중 이단에 속하는 자들. 따라서 정조 입장에서 보면, 문체를 야단치면서도 연암에 대해 애정은 있었음. 문체반정의 경우 연암에게 제대로 글을 써올리면 용서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정조는 연암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규제를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임. 궁정음악에도 정조가 너무 급하다 등의 지적을 하는데, 이것은 궁중 밖의 음악이 화려해지고 간드러지고 빨라지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체반정, 악풍반정을 통합적으로 보자면, 정조의 태도는 정치적으로 더 복잡하지 않았을까.  

구대열: 反正이라고 하면, 과거에 기준이 될 만한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그리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을 규제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양승태: 당시 청나라 음악의 유포에 대한 반정으로 볼 수는 없나? 즉, 리듬이 가벼워지고 연주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민간음악의 영향인지, 청의 음악의 영향인지?

송지원: 숙종대부터 판소리 등 민간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임. 악사들이 궁궐 밖에서 연주하던 방식이 궁정음악에 영향을 미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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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악공들이 글을 읽었나?
송지원: 뜻이 있는 사람들은 글을 익혔을 것이지만, 대부분은 글을 몰랐다. <악장등록>을 보면 상소문을 볼 수 있는데, 악공들의 고민을 써놓은 것은 없음.

당시 악사들의 생활 등을 보려면 문인들이 써 놓은 기록을 보아야 하는데, 그 각각의 문집을 찾아서 제 방식으로 번역, 풀이하여 <음악가 이야기>를 썼다. 그 중 유득공의 기록을 보면 해금연주가 유우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는 노비출신에서 해방(속량)되어 용호영에서 해금연주함. 그는 음악가로서 자의식이 뛰어나서 문인의 눈에 띄게 되었음. 그런데 유우춘이 해금 악사를 하게 된 계기가 노모를 잘 모시기 위해서였다고 함.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 최고의 연주를 하려고 함. 그러나 음악성 보다도 대중성을 요구하는 현실을 보면서, 거지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신세 한탄을 함.

구대열: 악사들의 신분이나 소속을 기록한 문서가 있는지?
송지원: 서양의 경우 하이든과 에스테르하지 계약서가 존재. 조선시대의 경우 심용, 이정보 등은 음악가(악기연주, 소리꾼)들을 기본 6-7명 데리고 있었고, 평양감사 회갑연에 자신의 악공을 데리고 가기도 했음. 그러나 조선에서는 악사와의 계약서가 존재하지는 않음. 제가 쓴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고>에서도 언급했지만 계섬은 아전집안 출신으로, 부모 잃고 공노비가 되었는데 창을 잘하여 당시 대제학까지 지낸 이정보 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함. 소리를 배우러 찾아온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영선: 정조가 죽으면 악풍반정은 실패하는가? 이 문제는 정조의 정치적 딜레마와도 관련이 있을 것. 그 하나는 부친의 죽음관련, 다른 하나는 국가적 위기. 악풍이 단순히 樂이 아니라 나라전체를 다스리는 것과 관계가 있으므로, 악풍의 경우도 나라를 다스리는 문제와 관련하여 해석해야 되지 않을까.

송지원: 악기, 예기가 연결되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실제 음악이 예의 척도가 되었을 것. 저도 공부하면서 모순을 느끼게 된 것이, 궁중 바깥의 자유로움과 풍성함이 정조의 규제와 어떻게 이해되어야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 정조의 음악정책을 발표 했는데, 민간과 궁중의 모순을 어떻게 풀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궁중은 중심이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라는 의식이 기반이었을 것.

최근 정조 편지도 발견되었는데, 사실 정조 자신도 격정적인 정서를 내포하고 있었으나, 스스로 이를 철저하게 규제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연암의 문장은 자유로워서 잘 안 읽히는데, 문체반정 연구한 학자들을 보면, 정조는 그렇게 문체반정을 강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문체반정 당시, 정조가 그를 귀향 보낸 것도 쉬다 오라는 뜻 아니었을까?

구대열: 조선의 궁정음악이 느린 반면, 청나라 음악은 굉장히 섹시하다고 생각됨.
송지원: 그렇기 때문에 청조가 망했다고 하는 것.

양승태: 말씀처럼 문체반정이 사실 그렇게 강력한 정책은 아니었을 것같다.
강상규: 그래서 반정을 다시 생각하자는 의미에서 “반정”이라는 표현 대신 “규제”라고 지칭하게 된 것인가?
송지원: 그렇다. 反正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큰 의미를 가졌던 것인지 의심이 들어서. 또한 인조반정 등 정치적 사건을 지칭하는 용어를 음악 쪽에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강상규: 처음에는 문체반정이라는 표현에도 의문을 제기되었다. 정조가 일군만민사상, 자신을 북극성에 비유하는 것을 보면, 신하는 군주와 다른 레벨이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았나. 그런 측면에서 이것이 정조 정치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듬.
그러나 제가 본 정조는, 似과 正을 구분하지 않고, 일단 正을 세우면 似는 자연히 없어진다고 보지 않았을까 생각됨. 그런 리더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정조와 정조 이후의 정치 흐름을 대비하여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천주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하영선: 결국 정조가 생각한 正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본다. 악풍이나 문체를 바로잡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正이 무엇이었는지 규정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이야기까지 진행되면 다른 학문 분야에도 의미가 있을 듯.

정조에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는 것. <시경강의>에 정조와의 질문과 대답 주고받은 내용을 보면, 정조는 왕이기에 앞서 대단히 뛰어난 학자라는 생각이 듬. 문제의식을 꺼내는 방식을 보면, 경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뛰어났고 문제의식이 상당히 앞서감. 정조나 다산은 청의 모기령에 반대하는데, 그를 미워하면서도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 그 내용에는 반대하면서도 새로운 지식은 받아들임. 정치적 위협은 차치하고라도 학문적 내공이 대단했으며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한 학문적 수준에 통치자로서 가지는 문제의식까지 갖고 있었음.

양승태: 당시 청나라 음악은 어떠했나? 명나라 때와 많이 달라지는가?

송지원: 조선은 청의 궁정음악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악(통일신라부터, 나당연합군에 의해 들어옴, 잔치음악 포함)과 향악(실크로드 통해서 들어온 것 +우리악) 그리고 아악(1116년 들어온 송나라 제사음악)이 기초가 됨.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음악이 수입되지는 않고, 기존의 음악을 정리하는 수준. 다만 중국의 악기는 들어옴. 정조는 악서, 법전, 예서 순서로 만들었는데, 상당히 치밀한 모습이 보인다. 세종대 궁정음악은 많이 연구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정조대는 덜 조명됨.

구대열: 조선왕조에 있어서 주자학이 정립 전에 아악을 정리했던 세종의 업적은 분명하다.

강상규: 그러나 소중화 인식, 조선중화주의 속에서 정조의 고민은 세종의 고민과는 달랐을 것ㅡ문명적 차원에서. 명이 망하고 나서 중화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인식이 조선후기 식자층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구대열: 영조시대는 건륭제, 옹정제에 해당되는데, 청의 절정기였던 당시 청에 가서 문물 보고 받아들였다면, 소중화의식이 당시 어떻게 반응했는지 궁금.

송지원: 영조대 국가전례를 보면, 굉장히 많은 의례에 영조가 친히 참여했다ㅡ친림의례.  

강상규: 기본적으로는 왕권강화 차원, 그리고 보여주기 위한 차원. 일본에서도 巡行이 메이지유신 이후 보여주는 행위가 된다. 질문 한가지: “악풍반정” 혹은 “악풍규제”라고 했을 때, 그로써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 어떤 것이었을지? 세종대의 것을 구현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본래의 음악을 구현하려고 했던 것인지?

송지원: 述而不作의 전통은 조선시대 일관되게 유지가 되는데, 즉 새로운 것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입장이다.

하영선: 연구를 하면서 역사학계에서 얼마나 도움을 받는지 궁금하다. 이 시기는 북벌에서 북학으로 가는 시기인데, 정조의 대청 인식에 대해 역사학계 쪽에서는 합의된 것이 있는지?

송지원: 정옥자 선생님 등의 연구가 도움이 됨. 정조의 주자학에 대한 평가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가 되어 있는데, 방법론적 측면에서는 열어놓고 있다.

하영선: 경세유표를 보면 중국의 전통제도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북벌에서 북학으로 가는 것에 대한 정조의 입장은 불분명하다. 다산의 경우도 거의 대부분을 경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원시유학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정조 편지도, 노론을 한번에 교체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들어있다. 정치학적 상상력이 더 필요하다.

송지원: 제가 연구를 하면서 사회과학 쪽에 한국학을 하시는 분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 연구를 위치지움 해주는 역할을 정치학에서 맡아야 한다.

하영선: 정치적 상황과 음악사가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우리 쪽에서 연구가 부족하다.

송지원: 학계 전반의 문제이다. 연구자가 많은 듯 해도.

하영선: 동주는 조심스럽게 정조와 다산의 군사적 관심을 지적하고 있음. 정조가 5군영을 치안병력으로 키우려고 했어도, 수원으로 물러난 이후에 하려고 했을 듯. 정조가 다산에게 읽으라는 책을 보면, 중국과의 군사문제와 관련된 것 많았음. 국내 안보가 확보된 후에는 청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려고 했을까? 그 전체 그림을 보면 정조가 굉장히 복잡한 생각을 했을 것.

강상규: 북벌론은 일차적으로는 국내정치적 효과를 노린 것. 그러면서 송시열 이야기를 원용하는데,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문체반정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선생님의 정조 발표를 들으면서 굉장히 신선하다고 느낌. 공맹 단계의 예, 악을 기반으로 그것이 어떻게 정조대에 나타났는지를 연구하셨는데,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생각.

하영선: 후학은 있는지?

송지원: 저는 개인적으로 한문공부를 부친께 받았고, 93년부터 다산 자료를 읽어오고 있음. 조선 예악을 보려면 사서삼경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석사과정에 와서 그런 초보적인 공부부터 다시 시작하여 문헌을 다루기까지는 힘들다고 생각함.

오늘 발표와 관련하여 <장악원, 우주의 선율을 담다>가 곧 출간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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