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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08.4.5)
 

2008-10-14 
2008년 4월 5일 전파모임

참석: 하영선, 최정운, 전재성, 김상배, 구대열, 양승태, 박명규, 김봉진, 김석근, 민병희
내용: 후쿠자와 유키치, 정명환 옮김, <문명론의 개략> (광일문화사, 1989)
발제: 김상배

I. 발제

0. 머리말
- 문명론이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정신(衆心)의 발달에 관한 논의.
- 서양 문명은 문명의 근본원리가 다름.

1부
1장. 논의의 본위를 정립하는 일

2장. 서양의 문명을 목표로 삼는 일
- 문명개화라는 말도 상대적인 것. 문명(산업), 반개(농업), 야만(원시)의 구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문명을 논의의 본위로 삼아야 하는 것은, 현재 인지(人智)로서 도달한 정상이기 때문
- 문명은 사물과 정신으로 구별, 문명의 외형만 취하지 말고 문명을 정신을 갖추어라
- 완력 vs. 지력: 지력이 전권을 장악하게 되면 문명이 진보를 이룬다. 문명을 진보시키는 요체는 모름지기 일을 다양화하여.....정신의 작용을 더욱더 활발하게 해 나가는 데 있다.
- 국체와 정통(政統), 혈통: nationality와 political legitimation. 국체보전은 다른 나라 사람에게 정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 정권을 잃지 않으려면 국민의 지력을 발전시켜야. 지력 발전의 요체는 낡은 습관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의 정신을 섭취하는 것이다.

3장. 문명의 본지를 논함

2부
4장. 한 나라의 국민의 지덕(智德)을 논함
- 문명은 어느 한 사람의 지우(智愚)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 퍼진 기풍에 좌우됨
- 이러한 나라의 기풍을 살피는 방법으로서의 통계학(statistics): 서양에서 널리 실상을 탐색하는 방법. 개별사물에 매몰되지 않고 천하의 상황을 살피는 길.

5장. 앞장의 계속

(1) 인민 지덕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 중론(衆論)
- 중론이란 사람의 수가 아니라 ‘지력의 분량’에 따라서 강약이 있다.
(2) 지력이 있다 하더라도 ‘습관’(제도? 규범?)을 통해 이를 결합시키지 않으면 중론으로서의 모양을 갖출 수 없다.

3부.
6장. 지덕의 판별

(1) 지와 덕을 구별
- 덕: 덕의, moral, 사덕과 공덕
- 지: 지혜. intellect, 사지(私智)와 공지(公知)
(2) 가장 주목할 것은 ‘대지(大智)’
(3) 일본이 문명에 이르지 못한 것은 국민의 지덕, 특히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4) 덕의 vs. 지혜

4부.
7장. 지덕이 행해질 시대와 장소를 논함
cf) 왜 7장을 3부가 아닌 4부에 놓았을까?
- 문명의 진보에 따라서 지와 덕은 그 양이 커지고 사적인 것을 넓혀서 공적인 것으로 전화시켜 사회전체에 공지공덕이 미치는 것을 넓히고 평화를 향해 나간다; 궁극적으로는 ‘문명의 평화’라고 부르는 상태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 덕의의 힘이 마냥 발휘될 수 있는 것은 가족에 제한. 덕의/사랑의 공간 vs. 규칙의 공간

8장. 서양문명의 유래
- 기조(Guizot)의 문명사에 의거해서 요약 서술

5부
9장. 일본 문명의 유래
- 일본 문명은 ‘권력의 편중’의 불행을 겪음; 일본에서 문명을 막는 ‘국민의 기풍’으로서의 ‘권력의 편중’
- 일본이 문명에 이르지 못한 것은 재화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력(智力)이 부족해서

6부
10장. 일본의 독립을 논함
- 과거 일본문명이 근거한 군신의 의리, 조상의 유서(由緖), 상하의 명분, 본말의 차별이라는 풍속 습관. 그런데 세상은 자국의 의리, 자국의 유서, 내외의 명분, 내외의 차별로 전환.
- 존왕론은 막부정치를 개혁하려는 민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일 뿐; 국체론의 효과를 의심하고 기독교에서 해법을 찾는 시도도 제한된 효용만이 있을 뿐(종교는 사덕에 대한 것); 상업과 전쟁의 세계에서 부국강병의 추구는 대세; 애국심/편파심에 의해 뒷받침
- 19세기 일본병은 ‘대외관계의 곤란성’: 인민동권의 논의를 너무 무차별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서로 권력을 다투는 시기가 되면 대외관계에서는 무용한 논의이다.  

- 일본의 난치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국의 국민 이외에는 달리 의지할 바가 없다: 암살론, 양이론, 군비투자는 실용에 맞지 않음(군함보다 무서운 것이 ‘빚’). 그렇다고 국체론, 기독교론, 한유론(漢儒論)도 민심을 잡을 수 없다.
- 내외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일본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문명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 자국의 독립보다 지고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가?: 세계의 양상을 볼 때 아직은 지덕의 극치를 논할 상황이 아니다. 나라가 없으면 더 지고한 문명을 논할 수 없다. 진실한 독립은 쇄국이 아니라 개항 이후에도 독립으로 남는 것. 문명의 산국(産國)이 아니라 ‘기류지’로서의 일본.

발제의 단상
- 산업문명 vs. 정보문명
- 19세기 지력(智力) vs. 21세기 ‘지식력’?
- 독립 vs. 병립(竝立)?
- 국민(國民, nation) vs. 다중(多衆, multitude)

II. 김석근, “<문명론지개략>의 서지와 외국어 번역”
  
III. 토론

양승태: 후쿠자와 유키치는 중국에 언제 소개되었는가?

김봉진: 양계초가 최초.

양승태: 일제시대에 후쿠자와 유키치가 많이 읽히지 않았는가?

김석근: 이광수 경우 후쿠자와 유키치에 열광, 번역 필요없이 일본어로 읽었음. 1916년 동경유학 당시 이에 관한 글을 싣기도 함.

양승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지개략>, <서양문명사정> 등이 백만 부씩 팔렸다고 하면, 당시 독자 규모에 비해 어느 정도 베스트셀러?

박명규: 에도 시대에 이미 방각본 소설이 몇십만 부 규모로 출간, 판매되었다고 함.

김봉진: 이를 고려해도 매우 베스트셀러.

하영선: 신소설은 얼마나 팔렸을까?

최정운: 신문에 연재되었으므로 판매부수 자체가 많지는 않았음.

양승태: 일본 최초의 일간신문은?

김봉진: 1850년대 말부터 영자신문 나오고, 1862,3년 되면 잡지가 나옴. 막말 개국 후 10년쯤 지나면 일간신문이 폭발적으로 늘어남. 메이지 초기는 각 지방마다 전국적으로 수십종의 소신문의 전성기.

하영선: 핵심적인 질문
1.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론의 개략>을, 유길준이 <서유견문>을 쓴 목적은 각각 무엇인가? “논의의 본위를 정립하는 일”의 뜻? 1870년대 당시 논쟁의 잘못된 본위를 이 글을 통해 바꾸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1870년대 일본 문명론 논쟁에 대한 배경지식을 요함. 한편, <서유견문>의 논의의 본위는 무엇인가? 후쿠자와와 달리, 유길준의 1장은 천체, 지리에 대한 장황한 논의에서 시작됨. 이 차이가 의미하는 바는?
2. 지덕을 논함, 은 버클의 <영국문명사> 논의(intellect/moral 양분법)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고, 유길준도 이것을 다시 차용. 그런데 후쿠자와가 문명, 반개, 야만의 3분법을 쓴 데 반해, 유길준은 개화의 원수, 개화의 병신 등 6분법 사용.
3. 가장 중요한 장은 9장) 일본문명의 유래인가, 10장) 일본의 독립을 논함인가? <서유견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은 무엇인가?
‘문명’이라는 개념 내지 용어를 빌려쓰되, 그것의 함의는 달라지는 모습이 규명되어야 함.

최정운: 9장, 10장 중 어느 것이 핵심인가는 2차적인 문제라고 봄. 후쿠자와 자신은 굳이 선택하지 않았고, 9장을 강조한 것은 마루야마의 해석. 가장 중요한 것은 논의의 본위를 정하는 것=agenda setting. 사세의 급박함으로 인해 ‘논의’의 차원을 넘어서는 사실상 폭력적인 문제에 대한 대응이 아닌가 함. 유길준의 서유견문 또한 마찬가지.

양승태: 논의의 본위를 정한다고 할 때 ‘논의’는, 비단 문명론지개략에 한정되지 않고, 당대 개화 및 문명론 일반의 핵심을 정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라고 봄.

하영선: 1장에서 대뜸 논의의 본위를 정해야 한다고 들이대니,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

박명규: 이 ‘본위’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 본위’라고 읽을 수는 없는가? 문제의식 problematique라고 할까.

하영선: <학문에의 권유>가 몇십만 부나 팔렸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컨대, 1873년에 이미 의논이 매우 분분했음. 후쿠자와의 회고에 따르면, 의논 중에서도 전통적인 부분(유학적 문명론)과의 충돌이 가장 문제가 되었음. 따라서 <문명론지개략>에서 비판의 중점 또한 유교 문명론.

김석근: 후쿠자와가 문명론지개략의 주요 독자층으로 겨냥한 것은 50대. 자기보다 조금 윗세대.

하영선: 후쿠자와는 지덕론에서 주로 ‘지’에 집중, 그런데 유길준의 경우 후쿠자와보다 훨씬 전통적.보수적 분위기에서 <서유견문>을 썼기 때문에, ‘덕’에 관한 논의에 상당부분을 할애함.

최정운: 서양사정이 1866년, 그 다음이 학문의 권유. 서양사정 당시와는 달리, 문명론지개략이 나왔을 때에는 이미 대세는 서양개화로 기운 시점.

박명규: 후쿠자와는 전통론에 대해서도 반대하지만, 서양문명론을 직역 형태로 수용하는 것 또한 비판하려는 이중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

하영선: 이미 학문에의 권유에서 무분별한 서양추수를 비판했음.

최정운: ‘논의의 본위를 정한다’ 함은, 전통론 vs. 문명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학의 이슈(인간이 어떻게 살고, 평화가 어떻게 오느냐)에서 지금 일본에게 급박한 이슈(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를 제기하는 것 아닌가 함.

김석근: 후쿠자와 자필초고 가운데 ‘문명론의 플랜’이 있는데, 거기에는 9장이 없음. 집필 순서는 10장, 8장, 9장, 나머지 앞엣장이라고 함. 처음제목도 개략, 없이 <문명론>이었음. 다른 장의 경우 여러 초고들이 있는데, 10장의 초고는 한 가지였다는 점에서 10장이 제일 중요했다고 봄.

최정운: 10장. 일본의 독립을 논함, 이 논의의 본위가 되는 것.

구대열: 일본근대사의 양대 주제가 security vulnerability 와 treaty revision인데, <문명론지개략>을 보니까 단박에 이 문제를 깔고 있음. 또, 부흥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철저한 자기부정.

김봉진: 이 당시는 이미 일본 개국 이래 20여년. 일본에서는 이러한 논의의 지적 풍토가 형성되어 있었고, 후쿠자와의 저작 탄생. 반면, 유길준은 개국 이전에 유학 나갔다 들어와서 쓴 글.

양승태: 후쿠자와의 저작을 읽기 전에는, 버클과 기조를 베꼈다는 선입견을 가졌었는데, 버클과 기조의 논의를 한 장 정도 차용했지만 나름 소화해서 수용. 근대화 논쟁, 문명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떠나 후쿠자와 자신이 지적 훈련이 되어 있음. 이에 반해, 서유견문은 교과서적인 논의이지 자기 식견이 드러나지 않음.

김봉진: <서유견문>은 후쿠자와가 10여년 전에 쓴 서양사정을 번역하면서, 행간에 자기의견을 집어넣고, 미국유학경험까지 합쳐서 쓴 것. 이에 비해, 후쿠자와는 젊을 때 난학 배우고, 에도에서 영어/영학 배우고, 1860년 일본최초사절단으로 미국에 감. 1863년 구라파 가고, 1867년 다시 미국에 감. 직접 서적을 구매. 후쿠자와의 원전해석능력을 유길준과 단순비교할 수는 없음.

최정운: 유길준은 미국 체류가 길게 잡아야 1년 반에 불과함.

김봉진: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역으로 읽으면, <문명론지개략>은 후쿠자와가 근대주의자가 되는 전환점이며, 이후에는 과격한 국가주의자로 경사됨. 1873년 결성된 메이로쿠샤 논의할 때, 서구적 문명화 자체가 불가피하다는 것은 이미 동의됨. 문제는 문명화의 방법. 메이로쿠샤 지면에서 논쟁 전개. 후쿠자와가 가장 급진적인 문명론자. 다른 사람들은 전통, 덕에 대한 일정한 미련을 보임.

최정운: 후쿠자와 문명론에서 ‘정신’이 매우 중심적인 개념인데, 이것을 헤겔적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름.

김봉진: 정신은 ‘인민의 기풍’.

양승태: 버클, 기조에게 있어서 정신=에스쁘리, spirit도 상당히 직관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바탕에는 헤겔적 geist의 관념이 깔려있다고 봐야 함. 몽테스키외가 법의 에스쁘리 말했을 때, 이는 법만 말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 기풍.

최정운: 헤겔적이라고 하면 이미 국가주의, 엘리트주의.

양승태: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아무리 엘리트가 국가주의를 주창해도, 국민의 기풍/ 시대적 분위기가 이것을 수용할 만하지 않으면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없음.

구대열: 관습, 기풍을 헤겔적 측면보다는 socio-economic한 측면에서 보면 분석적 사고가 가능했을 텐데, 그러지는 못함.

양승태: 기본적으로 근대 사회의 동학을 이해하지 못함.
그나저나 ‘합중정치(合衆政治)’라는 용어의 유래는?

김상배: 처음에는 부정적 뉘앙스로 보아 populism의 번역어인가 싶었는데.

김봉진: 민주정치. 이미 미국을 ‘합중국’이라고 중국에서 번역해 놓았음.

최정운: ‘독립’을 궁극적 가치로 놓고 있는 것에서, 후쿠자와가 미국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

양승태: ‘일이 많다(多事)’는 것은, 분업의 세분화를 의미하는가?

김봉진: ‘다사쟁론(多事爭論)’이란 말은 지금도 일본에서 사용됨.

양승태: 정통(政統)을 poltical legitimacy가 아니라 legitimation이라고 번역한 것은, 그 차이를 알고 쓴 것일까?

김석근: 마루야마는 (기조.버클의) 원전에는 legitimacy라고 되어 있는데 번역 과정에서 일어난 오류라고 지적.

최정운: 이 당시 유럽에서 legitimacy, legitimation 이라고 하면, 막스 베버 이전이므로, 주로 왕통, 혈통에 대한 논의.

박명규: 문명론의 단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서양 문명’에서는 서양을 단위로 삼으면서, ‘일본 문명’에서는 일본을 단위로 삼음. 그렇다면, 이 책을 쓰던 당시 ‘동양 문명’에 대한 생각이 어떤 위상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결국 문명은 국가 단위의 것인가?

최정운: ‘중국 문명’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가 아닐런지?

김석근: 처음에는 아시아 문명과 서양 문명을 대비하다가, 마지막 장에서 독립의 단위로 국가를 들이댐. (‘자국의 독립을 논함’.)
유길준은 분명히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과 10장을 읽었을텐데, 왜 독립을 논하지 않고, 도덕을 중시했을까 의문.

최정운: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갑오경장이라는 사건의 성격-동서양 사이의-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함. 또한 갑신정변의 트라우마로, 군중을 자극하지 않고 위에서부터 조용히 개혁하는 노선을 취하려는 것 아닌가.

김봉진: 유길준이 10여년이나 지난 다음에 <서유견문>을 쓴 이유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지개략>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뿐더러, 조선의 상황에 적절치 않았기 때문. ‘독립’을 논하지 않은 것도, 당시 조선에서 개인주의나 독립론이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 유길준이 덕을 강조한 것도 근대비판적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해 주고 싶음.
‘일본 문명’ 운운에 대해서는, 일본 문명화에 대한 후쿠자와 나름의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생각.

하영선: 기조나 버클에서 ‘유럽 문명’이란, 사실상 자국 문명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 기실 프랑스 문명이나 영국 문명을 유럽 문명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후쿠자와가 이들에게 충격받은 것도 역사서술의 단위가 일국이란 것이었음.
한편, 유길준은 1887년경 <서유견문>을 쓰고, 이후 실제로 갑오경장 주도. <서유견문>은 후쿠자와의 3부작이 하나로 섞였다고 볼 수 있음. 1887-1889년 정치상황은 ‘양절’론을 논하기도 조심스러웠는데, ‘독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

최정운: 유길준의 논의에 따르면, 지선지미한 문명이 있고 거기에 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서양문명이 절대적으로 유일한 문명이 아니라고 함.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서구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 그런데, 14장을 보면 개화의 병신, 원수 등 강렬한 적대감을 드러내는데, 이 적대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갑신정변의) 정적들에 대한 정치적 보복심.  

김봉진: 후쿠자와가 문명을 시간적으로만 상대화하고 그 귀결로서 서양문명을 절대화된 목적으로 삼는 데 비해, 유길준은 문명을 공간적으로도 상대화.

하영선: 9장의 주장은, 일본의 권력 편중을 비판하면서, 서양의 경우처럼 개인들로 이루어진 civil society의 형태로 이것을 다시 합쳐야 한다는 주장. 문제는, 개인들을 통합할 구심점이 무엇인가라는 것 임.

양승태: 기조가 프랑스 인민에 대해서 strong state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처럼, 후쿠자와는 ‘국체’를 내세움.

하영선: 그 경우 국권론 vs. 민권론 논쟁으로 넘어가는데, 결국에는 이 두 가지가 병립해야 나라가 발전하지 않는가.

최정운: 그런 의미에서 유길준의 ‘군민공치’론도 반드시 입헌군주론을 의미하지 않음. <서유견문>을 읽어보면 ‘군민공치’는 민족주의를 상당히 숙지하고 있음.
‘정신’이라는 것이 결국 확고한 리더쉽을 가지고 일본을 문명화시키는 쪽으로 이전됨.

하영선: 양절 또한 사실상 그 속에는 독립론을 깔고 있음. 결국, 양절과 군민공치는 독립과 민권론의 한국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1880년대는 군(君)을 업지 않고 민(民)을 논하는 게 불가능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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