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act    
H. T. Buckle,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 (08.3.1)
 

2008-10-14 
2008년 3월 1일 전파연구모임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 하영선, 최정운, 구대열, 양승태, 김석근, 김상배, 전재성, 마상윤, 김준석, 홍지연
내용: Henry Thomas Buckle,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 (London: George Routledge & Sons, Limited, New York: E. P. Dutton & Co, 1904)
발제: 양승태, 전재성, 김준석

I. 발표

1. 1-8장(양승태)

(1) 인물(wikipedia 참조)
- ‘일상적’ 의미에서 19개의 언어를 구사한 천재이지만, 문명들에 관해 서술하면서도 핵심 개념인 문명 자체가 무엇인지는 성찰하고 있지 못함.
- 철학적 성찰의 부족이 이 책에서 간접적으로 칭송한 공리주의 운동 자체의 철학적 한계에 대한 비판적 태도의 결여와 더불어 밀의 <자유론>을 불후의 명작으로 파악한 철학적 판단력의 미성숙으로 나타남.
- 스스로가 속한 자유주의 전통 자체의 진리성을 신봉한 나머지, 이에 대한 비판 부족.

(2) 서지사항
- 1권은 1857년, 2권은 1861년 출간. 현재 읽은 판본은 1904년 판.

(3) 총괄적 감상
- 19세기 영국인들의 문명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도 있게 엿볼 수 있는 저작.
- 보편사=universal history 차원의 기여. 그러나 헤겔에서 나타나는 철학적 성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음.
- 영국과 프랑스의 지성사 연구(지식의 발전, 관용의 확장 과정, 리슐리외, 찰스 2세, 조지 3세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해석 등)에 좋은 참조가 됨.

(4) 내용에 대한 개관

* 1~6장:  ‘지성사’는 인류 문명 전체의 변화과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사회 사이의 광범위한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지성사로 파악. 이를 바탕으로 사회진화론, 문명관, 역사진보이론이 전개됨. 기존의 지배적 ‘反계몽주의적’ 역사연구의 기원으로서 중세시대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 7장: 영국 문명 및 역사에 대한 개관. 서설에 따르면 영국문명사는 별도의 저작으로 쓰려는 방대한 계획이 있었으나, 병으로 요절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함.

* 8~14장: 프랑스 문명 및 역사

* 15장: 스페인 문명 및 역사

* 16~20장: 스코틀랜드 문명 및 역사

(5) 1~8장 발제

a. 과학적 역사관. history of history. philosophy of history. 문명사. 보편사.
- 당대의 역사학은 사실나열적으로 파편화되어 있고 실제적 유용성이 없다. 총체적이고 법칙 발견적인 과학적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 유럽 문명은 인류 역사를 주도하는 새로운 문명이며, 특히 영국이 어떠한 점에서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가를 밝히려 함.
- 인간의 행동과 관련된 기존의 신학 내지 형이상학적 교설(=인간의 행동을 자유의지 vs. 필연성, 우연 vs. 운명의 도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의 부정.
- 그런데 버클이 인과율적 귀납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문명을 이해하거나 역사의 변화 및 진보에 대한 서술 및 설명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버클이 연상심리학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러한 논의를 전개했는지는 의심스러움. 무엇보다도 자연적/외적 요소가 인간 행동과 문명 발전에 개입한다는 것, 총체적인 사물들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과학으로서 통계학적 방법을 동원함. 역사학이란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이 결합된 통합공학, 이다.
* 자연주의, 계몽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맑스나 헤겔에 대한 이해나 언급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한계를 지님.

b. 문명의 탄생과 각 문명들의 차이를 자연환경으로 설명
- 기후+식량+토양. (=자연지리 physical geography)
- 유럽 문명이 왜 그 이전과는 다른, 인류문명을 주도할 수 있는 문명으로 부상하였는가? “자연의 일반적 측면(general aspect of nature)”(기후, 식량, 토양과 함께 문명 탄생의 제4자연적 원소) 때문. 인간의 차이는 관념의 차이이며, 그 차이를 낳게 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의 결과. 자연 및 사회환경의 제요소가 상상력을 자극하는가 or 지적 탐구심을 자극하는가에 따라 문명이 갈리는데, 유럽의 경우 ‘지적 탐구심’을 자극하는 환경을 가진 문명이었음. 종교적 열정보다 냉정한 이론적 탐구를 우선함.
* 이러한 논의는 문명을 비역사적으로 현상적으로 접근하는 문제를 지녔음. 문명은 언제나 전파의 과정 상에 있음. 문명들 사이의 역사적 연속성 문제를 간과. 유럽문명이 동방문명과 게르만 문명의 유산 위에 형성되었음을 간과하고, 독자적인 ‘유럽문명’을 상정하고 있음.
- 잉여 surplus가 문명을 낳는다. 잉여가 생기려면 기후와 토양이 식량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어야 함. 이처럼 부의 축적이 있어야 노동하지 않는 계층이 생겨나 문명이 출현할 수 있음. 유럽은 온대 및 한대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열량을 많이 필요로 하고, 따라서 생산량의 많은 부분이 소수귀족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주어져야만 노동력이 확보됨. 따라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음. 그 결과, 많은 인간이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을 가질 수 있었음.  
- 지진 화산 등 자연환경이 인간에게 위압적인 경우(ex. 이탈리아, 스페인)에는 상상력과 지적 탐구심 중 전자가 강성해져 종교, 미신 등을 발흥시킨 데 비해,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은 자연환경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지적 탐구심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발전함.

c. 3,4,5장
- 3장에서 the sensualist와 the idealist 에 대해 설명. ‘형이상학적 교설’에 대한 부정 및 자신의 연상심리론에 근거한 인간 정신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접근의 우월성에 대한 설명 논리가 정신의 두 영역인 ‘도덕’과 ‘지식’의 관계 차원으로 확장된 것이 4장. 같은 논리가 지식 대 종교-문학-통치의 관계라는 사회 전체의 차원으로 확장된 것이 5장.  
- 인간 정신의 발전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의한 역사적 발전이며,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 내적인 정신법칙 자체가 아니라 그의 외적인 환경이다. 도덕적 진리란 정태적인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발전의 계기는 도덕 교육이 아니라 자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지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종교적 불관용이나 호전적 정신의 쇠퇴는 도덕성의 함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약의 발명, 정치경제학적 발견(아담 스미스에 대한 버클의 숭배!), 증기기관의 발명 등 지적발전에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례. 인간의 행위 양상은 인간의 지식에 의해 지배받기 때문에 문명 발전은 궁극적으로 지식의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다.
- 기존의 종교, 문학, 통치체제는 새로운 지식 발전을 저해한다. 영국문명의 상대적 우월성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버클 자신의 표현은 아님)를 점진적이고 성공적으로 극복한 유일한 사례라는 점에 있다. cf. 프랑스, 독일, 미국의 경우
- 프랑스는 영국에 비견될 만하지만, 점진적인 지적 발전을 이루지 못했음. (8-14장 참조)
- 독일은 극소수의 천재적 지식인은 존재하지만, 다수는 무지몽매하고 미신, 종교적 독단에 쌓여있음.
- 미국은 다소가 개명되어 있지만, 전체를 끌어갈 천재적 지식인이 없음.

d. 6장
- 역사학에 대한 역사학. 역사학의 상태가 한 나라의 문명의 상태의 지표가 됨. 근대 역사학은 신화와 무지, 미신이 혼합된 중세적 역사를 극복해야 함.

e. 7장
- 근대 서구문명은 이러한 무지와 미신으로부터의 해방 과정이며, 그러한 해방을 주도한 것이 영국문명. ‘영국지성사’의 개략에 대한 서술이 곧 근대 문명사에 대한 서술이자 인류 문명이 지향해야 할 문명의 귀감.
- 영국지성사는 종교와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에 필수적인 ‘회의주의’ 및 ‘종교적 관용’ 정신의 확산 과정. 영국에서는 ‘후커’와 같은 신학자들을 통해 신학 자체가 합리화(rational theology). 버클에 따르면, 영국지성사의 이러한 발전이 결코 순탄하고 단선적인 변화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며, 청교도혁명, 찰스 2세, 조지 3세 등의 정치사는 그에 대한 끊임없는 반동과 극복 과정.  
- 19세기 후반 자유주의로부터 공리주의가 등장하게 되는데, 버클도 공리주의적 입장을 드러냄. 실제로 버클 시대에 ‘자유주의’라는 용어가 통용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영국에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확산에 대해 논하고 있음.  

(6) 버클, 후쿠자와 유키치, 유길준

- 버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사 전반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필요한데, 후쿠자와가 버클을 얼마나 이해했을까?
- 유길준이 버클을 영어로 직접 이해했을까? <서유견문> 수준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을까?

2. 9-15장 (전재성)

14장까지가 원래 1권, 15장부터가 2권. 이 판본은 합권되어 있음.

(1) 9장 History of the Protective Spirit
- 프랑스, 영국 양쪽에서 왕정복고가 있었으나, 영국이 명예혁명 통해 근대적 정치, 지성 발전을 이루었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음.
- protective spirit=government intervention 의 뜻으로 사용함. Mill에게서 차용했을 가능성 높음. 프랑스는 p.s. 가 강했음. 프랑스는 14세기 이후 왕권이 강화되고 왕과 귀족이 연합, 평민 억압. 그 과정에서 ps는 성직자 간섭이 심했는데, 내용만 세속화되었을 뿐 지속되어서 국가의 억압적 성격 계속됨.

- 반면 영국은 ps가 상대적으로 약했고 귀족-평민 연합하면서 ps가 더욱 약화됨. 종교개혁과 시민혁명 거치면서 근대화의 길을 감. ps가 개인의 spirit, self-reliance로 가게됨.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는 지적 맥락으로서 private judgement 성장. 엘리자베스 시대 거치면서 더욱 그러함.

(2) 10장 The Energy of the Protective Spirit in France explains the Failure of the Fronde
- 프랑스 프롱드의 난은 의화와 왕권의 대입이지만, 영국 경우처럼 계급전쟁의 성격이 결여되어 있음. 영국과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프랑스 반란이 noble leaders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
- 버클은 영국의 시민혁명이 이익을 둘러싼 계급갈등이 아니라 democratic spirit의 분출이라고 봄. 혁명은 (스카치폴의 social revolution처럼) 밑으로부터의 운동이며, 평민이 주도했음.

(3) 11장 The protective Spirit Carried by Louis XIV
-루이 14세의 통치기는 전제주의 시기이며, ps의 정점. 사회를 manipulate함. 지식인들에 대한 금전적 보상으로 통제책.
- 수학, 자연과학, 철학, 동물학, 식물학 등에 있어서의 퇴보. 지식의 정체와 퇴보는 인민의 비참한 생활과 국가 전체의 퇴보로 이어짐. 반면 영국은 17세기 중반까지 지식의 발전을 이룩함. 특히, 의학.

(4) 12장 The Death of Louis XIV, Reaction

- 루이 14세 사후, 프랑스와 영국 지식인 간의 연계가 생김. 루이 14세 사후부터 프랑스 혁명까지 프랑스 지식인들은 영국 문명을 배우는 과정이 지속되었다고 봄. 특히 볼테르. 영국문명을 배우고 뉴턴을 소개. 그러나 18세기 약 60년간 프랑스 지식인들은 지배계급의 엄청난 박해에 직면하게 됨.

- 프랑스 혁명은 왕권 자체보다는 성직자들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되었음. 프랑스 인민들이 프랑스 영광이라는 여전히 ps에 심취해 있었던 민족적 특수성 때문. admiration for royalty.

- 이러한 상황은 루이 15세 통치를 지나면서 성직자에 대한 비판이 democratic mind를 성숙시키고 정치질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짐.

(5) 13장 State of Historical Literature
- 15세기 말까지 프랑스에서는 역사적 회의주의, 지식에 대한 탐구가 존재하지 않았음. 루이 14세 시기 거치고 볼테르에 와서 새로운 인식이 만개. 몽테스키외의 역사서술과 사회연구에 대한 긍정적 평가.
- 결국 18세기 프랑스 역사가들은 민주적 운동의 무의식적 지지자였으며, 역사를 영웅 중심의 서술로부터 탈피시키는 성과를 보임. 지식인 계급의 운동을 해방시키고, 자극하고, 박해로부터 이기는 힘을 주었으며, 더욱 대범하게 될 수 있도록 고무함.

(6) 14장 Proximate Cause of the French Revolution
- 프랑스 혁명의 원인, 시작 시점을 찾는 방법론에 대한 고민. 프랑스 혁명을 위한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을 1750년으로 간주. 프랑스 혁명의 발발은 지적인 발전, 특히 자연과학의 발전에서 원인을 찾음. 우선 1750년대 Necker 등 정치경제학자들의 프랑스 사회비판, Rousseau 등의 정치비판이 시작됨. 엘베티우스와 백과전서파의 저작들이 1750년대부터 저술됨.
- 프랑스 혁명은 루이 14세 때 억압되었던 자유정신의 실현으로, 그 직접원인은 자연과학지식의 발전. 이것이 social rebellion으로 이어짐. 자연과학 지식의 발전으로 귀족계급이 독점하고 있다고 보았던 3대 요소, 즉, morals, intellect, knowledge가 무력함이 밝혀지자, 이전의 종교비판이 정치비판으로 이어진 것. 결국, 자연과학의 진보가 사회를 혁명화하고 다양한 계급들, 양성 간의 구별을 없애는 소위 republican mind를 만들어낸 것. social equality 개념의 확대.
- 이러한 정신의 구체적 실현공간으로서의 ‘클럽’. 1782년 최초로 개설된 클럽들은 혁명 7년 전부터 많은 담론과 대화의 장소, 계급과 성의 구별이 없는 자유공간, 지식공간으로 역할을 함.
- 1776년 미국 혁명은 자유정신의 확산에 있어 기름에 불을 부은 격.
- 14장은 원래 버클 책 1권의 마지막 장으로, 책 말미에 버클은 자신의 역사방법론이 기존 역사가들의 방법론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함. 우선 지식사와 문명사의 관련 파악, 체계적인 역사 파악, 사실의 엄밀성, 광범위한 지식 수집이라는 점에서 스스로를 차별화함. 2권에서 버클은 독일, 미국, 스코틀랜드, 스페인에 대한 비교연구를 하겠다고 계획. 그러나 미완성.

(7) 15장 The History of the Spanish Intellect

- 스페인은 종교 영향이 매우 강했으며, 자유 인식이 미약함. Lawlessness는 있었지만 liberty는 없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종교적 ps 영향이 강했으며, loyalty & superstition이 스페인역사의 두가지 중요 특징
- 스페인에서 insurrection은 있었지만, revolution은 없었음. 스페인의 지성사를 지배한 경향은 상고주의. changes in knowledge가 없었기 때문에 문명 건설에 실패.

(8) 총평
- 신학과 종교의 역할에 대한 적대감. 특히, 자연과학에 기초한 실증적 정신이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주지주의 경향.
- 지식의 발전, 특히 자연과학 지식의 발전이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연결되고, 이는 혁명과 같은 사건으로 이어진다는 견해.
- 문명 개념의 중시. 진보의 개념과 연결. 단선적 역사철학.
- 프랑스의 문명화에 대한 영국의 자극을 매우 중요시함. 영국에 대한 자부심. 영국이 가장 앞선 문명이라는 생각.
- 계몽주의 등 개념적 파악, 개념화된 역사서술을 하지 못함.
- 프랑스 지식인들의 지식운동 경향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지 못함. 자연과학 중심이며, 철학, 사회과학 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약함.

3. 16-20장(김준석)

(1) 정치적으로는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의 전통 rebellious
- 지리적인 요인(험준한 지형은 중앙권력이 오지에까지 미치는 것을 막음. 동시에 저항의 근거지 역할)이 중요. 도시와 도시민 계층 발달이 미미했음에도 귀족들 중심으로 왕권에 저항.

(2) 이념.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강한 종교의 영향 superstitious
- 종교개혁 이후 캘빈교의 압도적 영향력으로 인해, 16세기 이후에도 문화적으로 매우 낙후된 상황
- 종교권력의 부상은 정치권력이 그만큼 약했던 데에 기인
- 일종의 제정일치 사회의 도래. 매우 비타협적이고 비관용적인 사회. 금욕주의와 성직자에 대한 절대복종.
- 그 결과 스코틀랜드의 문화적 수준은 매우 낙후, 이화 함께 사회의 정치.경제적 발전도 뒤처지게 됨. (밀의 영향 느껴짐)

(3) scottish Enlightenment: marvellous but disappointing in the end
- Francis Hutcheson, Adam Smith, David Hume 등 일련의 사상가들이 18세기 스코틀랜드의 학술부흥을 선도. 하지만 이러한 학술발전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못함. 원인은 캘비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이들이 연역적인 방법론을 사용했기 때문.
- 인과관계causation에 관한 흄의 잘 알려진 주장은 표절(!). 궁극적으로는 연역론자.
- 영국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귀납적인 방법론이 발달한 사회에서 학문과 과학의 발달이 사회 일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 스코틀랜드, 독일, 고대 그리스에서와 같이 연역적인 방법론을 사용하는 경우, 학문의 발전이 소수 지식인에 국한됨.

II. 토론

양승태: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사정에서 버클을 인용했는가?

김석근: 참조는 했지만 주로 인용한 것은 <서양사정>. 3장 문명의 본질부터 7장까지 버클 인용 허다함. 버클에서 인용된 자살 사례가 인용되기도 함.

양승태: 버클 저작 전체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있는지?

김석근: 서양사정에서는 영국, 프랑스 사례 인용 많고, 문명론지개략에서는 종교탄압 등에서 스페인 박해 인용.  

영국 초판과 후쿠자와가 본 미국 번역 초판에는 약 10년의 갭이 있는 듯. 1875년 8월, 정부산하기관인 번역국에서 일본어 번역 초판 <영국문명사> 나옴. 책의 양으로 볼 때, 진작부터 여러 사람이 번역하지 않았나 싶고, 영국초판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높음. 번역국의 번역가는 전문 번역가로서, 버클 뿐 아니라 스펜서 등 다양한 서양이론 번역. 4년 후에 다른사람에 의한 일어번역판이 또 나옴. 1923-4년에 새로운 일어번역. 통산 3차례의 일어번역 나옴. 영국개화사, 영국문명사, 세계문명사 등 제목도 바뀜. 기조, 버클은 당대의 유행서. 그만큼 수요가 있었으리라 추측. 당시 조선인 중 이를 누가 보았는지는 확인 안 되었음.

약 200페이지 정도 되는 <문명요론>이라는 요약본도 나온 바 있음. 이 당시 기타 버클 책 번역된 것은 <자유지리평론>이 있음. 밀의 <자유론>에 대한 버클의 평론서를 번역한 것.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이 무엇인가? 물으면서, 한두 사람이 아닌 여러사람의 정신의 발달, 이라고 정의함. 여기에서 버클의 영향이 느껴지며 그만큼 버클을 깊이 있게 이해했다고 생각함. 버클이 중세적 역사관, 지금까지의 역사서술을 비판한 것처럼, 후쿠자와도 동양 전통의 역사서술-유교의 영웅사관, 맹자시대의 순환적 역사관-을 비판.

양승태: 마루야마가 후쿠자와를 리뷰하면서, 후쿠자와의 버클 이해에 대한 검토와 평가가 있는가? 단순히 평면적 비교의 수준에 그치고 있는가?

김석근: 그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제가 결론을 내리기는 뭣하나, 형태나 내용적 유사성을 지적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평가가 있음. 통계학, 자연법칙에 대한 논의 등은 하여간 버클과 매우 유사.

전재성: 후쿠자와의 경우 기후, 환경에 대한 언급도 많은지?

김석근: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음. 자기 유용한 부분을 취사선택하는 면모.
서양사정 6장에 들어가면 지식과 도덕을 분리하여, 도덕은 천년이 지나도 별로 변하지 않지만, 지식은 변화하며 필요하다고 말함.

양승태: 결국, 인용과 답습일 뿐 후쿠자와가 서양을 직접 치밀하게 연구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루야마도 마찬가지로 후쿠자와와 버클을 비교 대조하는 데 머문 것 아닌가?

구대열: 서양 인쇄문화의 전통을 보건대, 버클의 책이 매우 가치있는 베스트셀러였다면 분명 축쇄판이 나왔어야 함. 그런데 정작 축쇄판은 일본(!)에서 나옴.
김석근: 이후에도 서양에는 버클에 대한 연구 자체가 많지 않음.

하영선: 첫째, 후쿠자와는 버클과는 학문하는 저세에서 정반대의 사람이 아닌가 함. 후쿠자와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학자라고 부르기 어려운 인물로서, 독서 방식 자체가 매우 다름. 영국문명 자체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독서의 목표가 아님. 구체적 초점이 맞추어진 전략적 독서. 왜 유럽은 잘 나가고 동양은 잘 못나갔는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유럽 방문했다가 발견한 책이 기조와 버클임. <문명론지개략>을 보면, 기조보다 버클 인용이 훨씬 많음. 오늘 버클 책의 4장을 보면, 영국문명의 발달은 (i) physical이 줄어들고 mental이 늘어남. (ii) mental 중에서도 moral보다 intellectual이 늘어난다는 공식이 나옴. 후쿠자와는 이것을 유럽발달의 핵심으로 이해한 뒤 지와 덕으로 번역하여 그대로 인용함. 프레임웍의 측면에선 전면적인 수용이라 하겠음.
유길준의 경우, moral과 intellect 중 후쿠자와보다 훨씬 강하게 우리 상감오륜의 덕(德)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며 유럽에서 배울 바가 전혀 없고 오히려 우월하므로, 지(智)만 유럽에서 배우면 된다고 주장함.

둘째, 요즈음은 잘 모르지만 그 시절에는 버클이 널리 읽혔음. 1880년대, 1958년 미국에서 버클에 대한 전기 연구가 나옴.(위키피디어에 서지사항 나와있음) A Victorian Eminence가 가장 최근에 나온 버클 연구로서, 영국문명사도 한 챕터 다룸. 그런데 19세기에 그토록 베스트셀러였다가, 20세기에는 왜 잊혀졌을까?

양승태: 토인비 등 대형학자가 나오면서 밀려난 측면이 있겠고, 아마추어 학자라서 기성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배제했을 가능성도 있음.

하영선: 자연에 법칙이 있듯, 역사에도 법칙이 있다는 점에서 버클의 주장은 명확하며 학문적임. 그런데 후쿠자와의 관심은 역사의 일반법칙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서양과 동양-일본을 비교하여 서양발전의 비결을 발견하려는 실천적인 데에 있었음. 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 정치학자의 유길준 읽기는, 버클의 글쓰기나 후쿠자와의 독서방식을 넘어서야만 하지 않겠는가.

양승태: 버클에 대한 근원적 비판은, 그의 체계 자체가 연상심리학과 인간의 동기 문제를 다소 단순하게 처리했다는 점에서 엉성했기 때문일 텐데, 서양에서 버클 평가가 과연 어느 수준에 있는지는 알아보아야 할 문제.

구대열: 자연환경이 인간 사회조직의 변화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그것이 정신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어떤 기여를 한 것인지, 정확한 인과관계가 논의되고 있지 않음. 열대지방에 먹을 것이 많고 노예제도가 발전했고, 한 대지방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논의는 어불성설.

양승태: 로마제국이 발전하고 기독교가 확산되는 맥락에서 비유럽 문명과의 상호작용은 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많지만, 통찰력과 이론적 잠재성은 높이 평가받아야 함. 영국제국의 발전과 national pride를 배경으로 씌어진 저작이라는 점도 참작.

구대열: 이 작품이 씌어진 1860년대는 빅토리아 민주주의가 최고조에 달해 있던 시기. 대륙의 지식인들이 모두 영국으로 눈을 돌리던 때. 지적 오만성이 나타날만 했음.

전재성: 후쿠자와가 버클의 자연과학론도 인용을 하는지?

김석근: 그러함. 물리학보다는 화학, 통계학. 사회현상에도 법칙이 있다는 아담스미스적 논의에 열광하는 모습 보임.

양승태: 당시 일본에서 버클 책이 얼마나 읽혔는지?

김석근: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많이 읽혔음. 버클 책 번역본이 재판이 찍혔을 뿐 아니라, 후쿠자와 책 같은 경우 당시 이미 이백만 부가 팔렸다고 함. ‘원서강독’의 ‘원서(原書)’라는 말 자체가 이 때 번역서가 나돌면서 생겼다고 함.

양승태: 유길준이 버클을 직접 언급한 적 있는지?

하영선: 없음. 그러나 알고는 있었음. 서유견문과 문명론지개략의 관련성은 명확하기 때문에, 문명론지개략이 버클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는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음.

후쿠자와가 오늘날 통상적인 의미에서 ‘학자’에서 벗어난다면, 유길준은 더더욱 학자가 아님. ‘문명관료’ 정도로 스스로 identify 했을 것,

양승태: 우리나라 전통 양반은 학자이자 관료였는데, 왜 이 시기 관료들은 학문적 엄정성을 견지하지 않았는가?

하영선: 전통적 유학자들의 시대와 유길준의 시대는 질적으로 다름. 유길준의 경우, 후쿠자와 밑에 1년 반, 미국에 1년 반 있다 돌아온 뒤에는 계속 가택연금 상태였음.

김석근: 갑오개혁 이후 일본 망명해서 오히려 더 많이 읽고 많이 씀.
고대 도서관에 유길준 일가에서 유길준 소장저서들을 기증한 콜렉션 있음. 일조각에서 나온 유길준전집 5권 이외에 발굴되지 않은 자료가 꽤 있으리라 생각함.

양승태: 유길준의 한학 소양은 얼마나 되었는지?

하영선: 순한문으로 씌어진 한시들과 저작들이 적지 않음. 박규수가 유길준에 관심있었던 것도 어린 유길준의 문장이 훌륭했기 때문.

김석근: 유길준의 한시에 관한 연구서가 작년에 나온 바 있음. 한문으로 씌어진 <평화광복책>의 경우, 황성신문에 실렸음.

하영선: 평화광복책은 고종의 관직하사를 사양하는 글(실록에 들어가 있음)과 상당부분 겹침.

구대열: 버클의 경우,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에서 하면 rebellion이고 프랑스나 영국에서 하면 revolution이란 것은 편견에 찬 차별이 아닌가. 왕이 ‘반역’인가, 라고 물으니, 아니오,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유명한 일화도 있지 않은가?

양승태: 혁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몇몇 인사의 봉기선언 수준을 넘어서서 사회전반적인 지식의 확산 및 대중적 지지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명사적 판단이 무조건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을 무시했기 때문만은 아님.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 등에서 언급되는 살롱 문화, 출판 부흥 등도 이와 관련됨.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