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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근, <문명론지개략을 읽는다>
 

2008-10-14 
2007년 11월 전파

참석: 하영선, 최정운, 구대열, 양승태, 전재성, 김상배, 김준석, 홍지연, 이헌미
발표: 김석근, <문명론지개략을 읽는다>(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역)

1. 발표

(1) 이 책은 원래 이와나미 신서 세 권짜리를 한 권으로 번역한 것.
낭독->원문인용->마루야마의 해석, 순서로 되어 있음.

(2) 방법으로서의 주석 혹은 해석의 정치학

마루야마 마사오는 에도시대 유학자들이 경전에 주석서를 달 듯,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지개략의 사상적 주석서를 만들고자 함. 경서에 주석달기는 주자학의 학문방법으로서 대표적 동아시아 학문 전통. 텍스트 주석의 역사와 해석의 논쟁을 둘러싼 사상사.

주석이 가지는 정치성/이데올로기성. 주석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수단에서 벗어나 텍스트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함. 주희의 논어집주를 통해, 주희가 해석한 공자를 만나게 됨. 텍스트 자체의 이해 및 여러 주석들 간의 비교를 통해 극복 가능.

(3) 텍스트로서의 문명론지개략

서양사정, 학문의 권유, 문명론지개략: 후쿠자와 초기 3부작. 시대의 베스트셀러. (판권, 해적판이라는 말도 후쿠자와의 조어)

문명론지개략은 여러 판본이 있으나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판본이 가장 좋음. (게이오 출판부에서 새로 나온 것도 이와나미 판본을 기초로 한 것.) 기조, 버클 관련 부분에 관한 reference 포함되어 있음.

“한 몸으로 두 삶을 살다”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의식적인 의역->원전 왜곡의 대가. 번안에 가까움.
특히 버클의 History of Civilization (2쪽 참조)
서양의 원전/대본이 없는 부분(9장 일본문명의 유래, 10장 자국의 독립을 논함)을 주목하게 됨.

한국에서의 번역과 소개
정명환 옮김, <문명론의 개략>
1996년 10월 5일 전파모임
김석근 2001.1.27 중앙일보
장인성 2007.5.26 조선일보

번역의 어려움
현재 후쿠자와 초기 3부작 번역/역주 작업 중. 개념사 연구와 맞물려 번역의 까다로움을 새삼 절감.
ex) religion-宗旨(후쿠자와 번역어)-종교/원리(현대어).
discovery-發明-발견
invention-工夫-발명/궁리

개념의 ‘미분화’ 문제
知: 앎, 지식, 지혜
權: 권한, 권리, 권력, 권위 등 복합적인 의미. 勸力이란 power의 번역어인가, 아니면 權의 힘인가?
따라서 가능한 원문 형태와 거의 비슷한 번역을 하고 주를 다는 방식 채택.

(4) 주석자 마루야마 마사오

마루야마의 두 개의 혼은 오규우 소라이와 후쿠자와 유키치
- 오규우 소라이(1666-1728): 고학파 유학자, 마루야마는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오규우 소라이를 ‘일본의 마키아벨리’에 비견함.
-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규우 소라이는 개인도덕과 정치를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유학에 대한 비판, 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는 마루야마의 평가.

마루야마는 ‘존경할 만한 적(敵)’이라고 자인한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1730-1801)의 영향도 적지 않게 받았음.

마루야마 마사오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 마루야마 칸지: 언론인 아버지
- 하세가와 뇨제칸: 작가, 평론가
- 난바라 시게루: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 동경대 서양정치사상 교수, 마루야마의 지도교수
아버지, 뇨제칸의 현실감각과 난바라 시게루의 이상주의를 함께 물려받음

1938년 동양정치사상 강좌(중일 전쟁 기간이었으므로 ‘국민윤리’적 색조) 최초 개설, 강사 초빙됨. 아래 이들이 마루야마보다 한 세대 앞서는 일본사상사가들.
- 무라오카 쯔네쯔구(1884-1946): 토호쿠 대학, 일본사상사-> ‘문화사적 사상사’
- 쯔다 소키치(1873-1961): 와세다 대학, 일본사-> ‘생활사적 사상사’
마루야마는 문학부 수업도 청강하였는데, 이 당시 영향이 컸던 히라이즈미 키요시(1895-1984; 모토오리 노리나가, 국학, 국수주의, 황국사관, 군부파시즘)를 반면교사로 삼고 경계하였음.

마루야마가 <문명론지개략>을 읽는 방법
- 책 전제를 ‘소나타’ 형식의 구성으로 파악. 1,2,3/ 4,5,6,7/ 8,9,10 삼분법.
- 총결에 해당하는 제 10장(자국의 독립을 논함)의 마루야마식 재구성. 당시의 다양한 주장들을 a. 존왕론적 국체론 b. 유교의 성인의 도 c. 기독교 입국론 d. 만국공법 또는 천지의 공도론 e. 양이론 및 군사적 내셔널리즘 f. 쇄국부활론으로 분류하고, 이들 각각을 비판적으로 검토.
- 후쿠자와의 결론: 목적을 정해서 문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목적은 자국의 독립이다->주권적 국민국가 형성

후쿠자와에 대한 해설
- 후쿠자와의 출판 텍스트 뿐 아니라 후쿠자와가 남긴 초고, 대본, 수택본까지 검토.
-기조 및 버클의 대본과 대조함으로써, 후쿠자와의 번안을 확인하고 평가. 후쿠자와는 기본적으로 서양 원본을 ‘지적으로 구사’했다고 평가함
- 여타의 장들이 출판본에 따라 수정이 가해진 반면, 9, 10장은 초안이 끝까지 갔음
- 후쿠자와에 대한 과잉해석이랄까, 후쿠자와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마루야마식 추정도 곳곳에 있음. 이것은 차라리 미덕이겠으나, 문제는 마루야마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도그마, 즉, 마루야마 주석의 숨겨진 이데올로기.

마루야마의 <문명론지개략> 활용과 응용
- 마루야마 자기 시대 현실에 적용. 2차대전 직후 미군의 점령을 후쿠자와가 말하는 ‘국체’의 단절로 파악.
- 일본 사회 병리분석 및 비판. 마루야마는 논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에서 ‘권력편중’과 ‘억압이양의 원리’ 지적. ‘문어항아리’, <일본의 사상>에서 ‘이다’(데아루)사회와 ‘하다’(스루)사회의 개념화
- 후쿠자와가 제시한 주장/가설에 대한 검증
‘네이션’과 내셔널리즘 연구. 무사의 에토스와 행동양식 연구. ‘권력’에 대해 자립과 저항을 보여준 ‘가마쿠라 불교’ 연구 등. 9장 일본문명의 유래 부분에서는 발표자 김석근 선생도 흥미로운 연구주제를 많이 발견. 가마쿠라 불교에서 보였던 종단의 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 내지 양립성이 에도시대로 들어오면 사라지고 권력에 종속됨.

(5) 마루야마 읽기에 대한 비판과 또 다른 주석

마루야마 유키치 신화?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한 후쿠자와 유키치 이미지 고착화 비판
- 야스카와 쥬노스케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마루야마가 평가한 것처럼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제국주의자였다고 역설. ‘전형적인 시민적 자유주의’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이미지는,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서 조형되고 확립된 것. 후쿠자와 저작의 자의적인 취사 선택과 마음대로 읽음으로써 만들어낸 허상이다. <전집>에 기초해 후쿠자와 유키치의 실상을 밝힘과 동시에 허구적인 ‘마루야마 유키치’ 상을 깨뜨리고자 한다.
-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가 <문명론지개략>에 국한하여 주석을 달고 있고, 후쿠자와의 사상적 전회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스카와 쥬노스케의 비판은 정밀하지 못함.  

또 하나의 주석, 고야스 노부쿠니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지개략을 정밀하게 읽는다>(김석근 옮김, 2007)
- 마루야마의 <문명론지개략을 읽는다>는 ‘후쿠자와를 위한 변명의 책’이라고 비판.
마루야마 마사오는 “2차 대전 이후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몽적 해독자”, “근대주의적인 시각”으로 읽고 있다고 비판.
- 고야스 노부쿠니는 일본 내 대표적 마루야마 비판자. 다소 비판을 위한 비판의 색채가 없지 않으며, 일본 국내보다 중국, 대만, 한국에서 인기.

- 마루야마도 후쿠자와 문명론의 ‘담론’적 성격과 ‘사상투쟁’ 측면을 부인하는 것 아니다. ‘후진국 근대화’ 또한 논의했음.  

(6) 쟁점

a. 문명은 상대적 개념이다
-고야스 <정독>: 마루야마는 문명의 상대성을 후쿠자와의 상대주의(relativism)라는 사유양태와 관련해서만 해석한다. 문명, 반개, 야만이 후쿠자와에게 ‘문명화’의 한 단계로서 상대적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한다.
- 마루야마 <읽는다>: 문명이란 문명화이며 따라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 <정독>의 반론: 95쪽.

b. 탈아론, 탈아입구
- <읽는다>: 탈아론은 2차대전 이후 재발견되어 전전일본에 덧씌워진 것. ‘탈아’라는 용어 자체는 후쿠자와가 메이지 10년대에 사용한 이후에는 거의 사어가 되엇음. 게다가 후쿠자와에게 탈아는 어디까지나 시사론인데 반해, 입구는 원리론.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 초고에는 ‘일본’이라 쓴 부분을 일부러 ‘아세아’로 바꾸어 쓴 부분도 곳곳에 있음.
- <정독>: 탈아론은 1885년이라는 한 시기에 대한 후쿠자와의 발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서양문명에 본위를 정한 문명론 혹은 문명화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다

c. 중국 및 조선에 대한 인식
- <읽는다>: 134쪽, 777쪽. 후쿠자와의 중국 비판이 문명진보와 관련된 특정 조건에 국한하여 진행된다.
- <정독>: 62쪽. 마루야마의 서술은 후쿠자와가 중국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2. 토론

최정운: 마루야마가 후쿠자와 <문명론지개략> 해석을 통해 부각시키려 한 부분은 자유주의 중 시민사회에 대한 부분이 아닌가?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학교, 교회, 회사가 각각 자율적 영역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 일본헌법 제정할 때 중요한 논의 중 하나가, 일본에는 기독교가 없으므로 천황제 신도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음. 그렇다면 근대 일본은 후쿠자와의 주장과는 정 반대로 갔음.

하영선: 김박사 번역 참 고생많으셨음. 최교수 지적은 중요한 부분. 마루야마는 9장 권력의 편중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았고, 최교수도 그 부분을 지적. 그렇다면 대체 7,8,9장은 왜 오는가? 권력의 편중이 전통적으로 일본에 존재했고, 이 부분을 어떤 식으로든 깨야만 일본이 문명화될 수 있음.

하지만 그렇다면 10장을 왜 썼는가? (일본인이 아닌) 우리가 보기에는 1장과 10장을 <문명론지개략>의 핵심으로 읽고 싶어짐. 그래야만 후쿠자와를 탈아론자로 몰아가기에 편리. 10장의 논리는 7,8,9의 목표로 가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일단 독립이 필요하다는 것. 후쿠자와가 상대적으로 국제정치영역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버클리 연설을 보면, 마루야마가 후쿠자와 <문명론지개략>을 왜 1967년 대학원 강의에서 읽었는가를 지적. 마루야마는 어디까지나 1967년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서 후쿠자와를 해석. 따라서 1880년대 후쿠자와를 후쿠자와 문제의식에서 읽어줄 필요. <문명론지개략> 2장은 1장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 논의의 본위는 서양 문명을 목적으로 하는 일.

최정운: 후쿠자와 논의는 이기적인 개체들이 각자 생존을 위해 노력해야 문명화된다는 주장이므로, 반드시 10장이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음. 19세기 자유주의 강국정치는 노재봉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안-밖의 문제를 따로 생각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도 이 연장선상에 서 있음. 이러한 논리는 독립신문에서도 드러남. 서양문명 제국주의에 대한 국가 독립과 국가 내 개개인들의 자립은 모순되지 않음.

하영선: 논리적으로 일관되려면, 국제 영역에서도 권력의 편중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2-9장은 기조, 버클을 읽지 않으면 내용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한국사람들은 통상 <문명론지개략>을 1장과 10장만 읽고 후쿠자와를 비판함. 논의의 본위는 일본 독립에 있다는 식. 그러나 실지로 후쿠자와에게는 9장이 진짜 문제였을지도 모름. 그렇다면, 후쿠자와를 공정하게 읽기 위해서는 1장에 대한 대답이 9, 10장에 모두 있다고 보아야 함.

최정운: 후쿠자와를 국권론자의 오명에서 구출하여 민권론자로 읽어줄 여지가 없는 것 아님. 하지만 <문명론지개략>의 방점을 9, 10장 모두에서 발견한다고 해서, 후쿠자와의 위상 자체에 큰 변화가 오는지는 모르겠음.

김석근: 9장과 10장의 관계와 관련, 다른 번역자 정명환 선생의 경우에도 후쿠자와의 논리에는 금이 가 있다고 비판.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표리를 이루는 것 아닌가 함.

구대열: 후쿠자와가 주장한 문명의 실질과 탈아입구는 엄밀히 말하면 관계 없음. 그 시대 일본이 직면한 security dilemma를 해결하려는 것.

하영선: 사지, 공지, 사덕, 공덕의 관계에 대한 후쿠자와의 입장은?

양승태: 기조와 버클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가? 후쿠자와의 대본인 기조와 버클의 원저에 대한 내용 고찰 및 평가가 선행해야 하지 않는가.

김석근: 그건 선생님께서 해 주셔야....

하영선: 버클의 책은, 역사의 과학을 쓰겠다는 야심찬 기획. 당시에 기조나 버클은 대단한 베스트셀러였음. 후쿠자와는 다분히 이들로부터 영향받아서 ‘지’에 방점을 둠. 특히 공적인 지.

최정운: 당시로서는 후쿠자와가 매우 독창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함. 천황제가 서양 절대국가의 전파의 한 형태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기조/버클을 받아들인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은 이에 대한 댓구로서 매우 논쟁적인 주장. 이와 관련, 당시 일본인들이 후쿠자와 저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알 필요가 있음.

하영선: 서양에서는 권력편중을 해체하기 위해 기독교가 있는데, 일본의 구심점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존왕론이 등장.

최정운: 강력한 존왕론은 유신전 막부 말기에 서양 절대국가 사상이 전파되면서 등장한 것. 그 이전 천황은 전혀 실권이 없었음.

김석근: 후쿠자와가 9장에서 하는 이야기는 종교, 학문, 난세의 사무라이도 권력편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그렇다고 후쿠자와가 천황제 지지하지도 않음.  

최정운: 시민사회라는 것이 매우 무정형적인 것인데, 민권이라는 것이 반드시 시민사회론과 합치되는 것 아님.

구대열: 1870-80년대 유럽의 정세 및 새로운 사상동향을 후쿠자와가 보고, 일정한 인상을 받았을 텐데. 프랑스 공화국, 영국 자유주의, 독일 국가권력, 미국을 본 뒤의 후쿠자와의 선택이라는 식으로 접근해 볼 수는 없을까.

최정운: 보불전쟁, 수에즈 운하, 만국박람회 등 유럽 문명의 위대함을 본 후쿠자와의 충격.  
최정운: 주자학의 정치사상적 핵심내용이 시민사회에 대한 것인데, 오규 소라이를 비롯, 일본 사람들이 과연 주자학의 종지를 이해했는지 의구심이 듦.

하영선: 후쿠자와가 정계로 진출하지 않고 끝까지 학계에 남은 이력을 9장 및 10장과 관련해서 좋게 해석해 주면, 정치와 학문의 분리라는 신념을 체화한 것인데......

김석근: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정계 측으로부터는 권유가 있었는데, 사양함. 청일전쟁 즈음해서는 언론 및 학술활동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 발휘.

이헌미: 혁명 및 전쟁에 대한 후쿠자와의 입장은 무엇이었는지요?

김석근: 혁명에 대해서는 옹호. 세이난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썼는데 생전에는 출간 안 하고 있다가 사후에 나왔음.

구대열: 19세기 말에는 전쟁은 창조의 어머니, 라는 식으로 폭력을 긍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음.

최정운: 19세기 말부터 수단은 목적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사상사적 이노베이션이 일어남. 소셜 다위니즘 하에서 흑인들을 교화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과 결합하여 전쟁 옹호.

구대열: (후쿠자와 유키치와 나카에 초민이 죽은) 1901년은 빅토리아 여왕이 죽은 해이기도 함. 그와 함께 유럽에 있어 절대왕정을 기반으로 한 영광의 시대도 저물어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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