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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A. Elman, On Their Own Terms: Science in China, 1550-1900 (07.6.2)
 

2008-10-14 
2007년 6월 2일(토) 전파모임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최정운, 김봉진, 전재성, 김상배
자료: Benjamin A. Elman, On Their Own Terms: Science in China, 1550-1900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I. 발제 (하영선, 전재성, 김상배)

(1) 하영선

- 책을 읽자고 했던 의도: “on their own terms”라는 제목에는 저자의 고민이 엿보임. 이제까지 중국 과학에 관한 기존연구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 책 전제를 관통함.

- 저자 소개: 최근에 프린스턴 역사학과로 자리 옮김. 중국 지성사, 과학사 전공. 주저 네 권 중 From philosophy to philology는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라는 제목으로 번역서 나와 있음. 최근에 이 책에 이어 A short cultural history of modern science in late imperial china가 출간되었음.

- preface: 청일전쟁의 패배원인이 중국 과학기술의 낙후성 때문이었다는 기존 통설에 반대함. “the evolution of the native China science from the 16th to the early 20th century under the Jesuits and protestant missionaries"가 주제. 18세기까지는 예수회, 19세기 후반부터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영향 중심으로.

- 중국어를 영어발음만 표기하고, 원중국어를 병기하지 않은 점은 매우 아쉬움. 그러나 미국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괴로움을 꽤 예민하게 포착. 읽을 가치가 있는 책.

- 왜 1550년부터인가? 마테오 리치. 어원상 science는 지식 중에서도 매우 자세하고 체계적인 것. 철학, 신학, 법학. science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격물치지, 의 해석론 문제 거론. 양명학과 주자학 간 입장차이.

- 16세기 명말 중국 경제의 국내외적 번성. (면, 실크, 도자기) 목판인쇄를 기반으로 출판물의 양적 팽창. nature에 대한 관심 증가.

- 이 책의 전반부에서는 3장("Sino-Jesuit accomodations during the 17th century")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

- 2장. 예수회가 중국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주목하는 것이 달력, 역법 문제. 명 때 이미 월력의 개정이 있었으나 하루 정도의 오차 보임. 서양도 이 시기에 비슷한 개정. 쥴리어스 달력에서 그레고리안 달력으로. 중국에서 월력은 천하질서 속에서의 권위와 관련되므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님. 정확한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학의 발달이 필요한데, 당시 중국의 수학은 이전의 아라비아 내지 무슬림이나 당대 유럽에 미치지 못했음.

- 3장. 유럽의 science와 명청교체기 격물치지 개념의 상호수용. science를 學文, 智로 번역하기도 했음. 사서(四書)의 영어이름에 science를 붙이기도 함. ‘방이지’의 ‘物理小識’. 質則과 통기. 앞의 것이 과학 뒤의 것이 철학. 1584-1790년까지 번역이 400여종. 그 중 30%가 science, 70%가 기독교 서적.

- 동양의 오행철학과 서양의 질료/매개 개념 비교.

- 예수회에서 제작한 지도가 중국의 세계인식에 영향을 끼치게 됨.

- 17세기 중반 양광선이 예수회를 격렬하게 비난. “不得已”이라는 유명한 글. (영어번역 하버드에서 나온 sources of chinese tradition에 실려 있음) 중국이 역법을 개정하려는 것은 천자 권위의 원천으로서 생민하는 천의 원리를 밝히려는 것인데, 예수회에서 역법에 관여하는 저의는 예수의 탄생과 부활에 초점이 있음. 그러나 어떻든 예수회 측의 달력이 더 정확했고, 일정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17세기 후반까지 예수회의 영향력은 계속됨.

- 4장. “매문정”. accommodation 과정에서 매문정이 천문학, 수학 지식을 습득하면서 청조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진행시킴. 서서히 예수회의 역할이 축소되는 과정. 18세기 초 예송문제(제사)와 관련된 논쟁. 중국 예수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정책은 유럽과 중국 양쪽의 공격을 받게 됨.

- 5장. 이후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예수회 선교활동이 금지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기여는 계속됨.

- 마테오 리치 관련 온라인 사이트: 1차 자료 다수 실려 있음. http://www.usfca.edu/ricci

(2) 전재성

- 6장. 고증학과 고대 지식의 회복. 예수회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청 중기, 후기의 문인들이 청의 고대 지식 자산을 재발견하여 실증화해 나감. 12세기 유럽이 아랍의 그리스 지식을 재수입하여 복고하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예수회의 자극을 받아 밟아감. 수학, 의학적 지식의 재발견.

- 주희에 대한 청초의 비판과 왕양명. 1676년 황종희 <明儒學案>에서부터 정주학을 비판하고 왕양명의 사물에 대한 시각을 평가하는 학문적 경향. 18세기와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은 유럽 사태에 집중하고 있었고, 중국은 예수회의 영향을 내면화하는 시기를 겪음.  

- 의학과 고대 지식의 회복. 19세기 중반까지 청은 서구 의학을 받아들이지 못함. 송대의 형이상학적 의학관 비판. 고대의 형이상학과 자연관을 회복하여 의학을 도모함. 황제내경. 청에 이르러 정주학 비판의 물결과 함께 고대 의학 복구의 기운이 생기고, 한대 의학을 연구하기 시작. 실증학 및 고증학의 연구시기와 일치함.

- 백과사전. (진원룡?) 청대에는 송대 정주학의 영향을 비판하기 위해 格致라는 용어를 의식적으로 회피. ‘실사구시’를 선호. cf. 과학은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해 격치학, 이라고 번역됨. 강희제의 실증연구적 경향과 진원룡의 백과사전 편찬사업 추진. 옹정제 역시 백과사전 편찬사업을 지속함. 그러나 강희, 옹정제는 전반적으로 예수회의 지식체계에 거부감을 보였으며, 진원룡은 예수회의 지식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킴. 백과사전의 내용을 보면 당시 유럽의 자연과학 발전의 내용은 없으며, 19세기 중반이 되어야 서구과학이 중국에 받아들여짐.

- 고대 중국 수학의 복귀. 매문정은 수학적 천문학과 고대학문을 연결시켜 청대 학자들에 많은 영향을 미침. 강희제의 수학관심으로 인하여 고대 수학텍스트들이 재발견되고, 유럽수학지식과 결합됨.

- 중국의 자체 과학발전을 19세기 유럽 산업혁명 이후 유럽의 강대화를 전제하고 연구해서는 안됨. 결과주의적, 유럽중심적 해석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

-7장. 진리탐구와 청대 수학. 청대 문인계급은 격물치지보다 실사구시를 강조, 사서보다 대학과 중용을 강조. 정주학의 영향을 비판. 수학과 자연과학의 관점을 정식 학문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노력. 수학을 고전에 포함시킨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뉴튼 패러다임과 미적분학 수학의 도입을 위한 환경조성을 한 것은 사실.

- 사물 탐구에 관한 18세기 청대의 관심. 소주, 양주, 양자강 삼각주 지역 중심으로 보존되어 오던 한나라대 고전 학문의 경향이 살아남.

- 실증학 시기 수학. 건륭제 기 1770년 경 사고전서의 완성. 360인 이상의 학자가 참가하여 방대한 지식체계를 정리함. 건륭기에는 서구의 영향, 특히 예수회의 영향을 비판적으로 봄. 신학적, 형이상학적 영향은 부정하고,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의 자연과학지식은 평가함. 예수회의 영향력 축소, 정주학과의 단절, 18세기 청의 세계관과의 상이점을 주장하는 경향.

- 전반적으로 유럽의 과학혁명과 같은 성과는 일어나지 않음. 지적 변환이 필요한데, 이는 1860년대 이후 서구의 영향이 있은 후에 일어난다고 보아야 함.

- 8장. 근대과학과 프로테스탄트. 나폴레옹 전쟁의 종식 이후, 유럽은 다시 평화를 찾고, 영국 등 유럽국가들의 복음주의, 신교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국민국가에 바탕을 둔 중국진출 선교사 그룹들이 출현하기 시작. 예수회와는 달리 뉴튼의 과학, 신교에 기반한 신앙심 등이 중요한 자산.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다윈주의의 해석을 둘러싸고, 자연과학과 신학 중 어떠한 것에 우선을 두고 중국에 진출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는 내부 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

- 1880년대까지 프로테스탄트, 교육, 근대과학. 중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 주로 중국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 광주, 마카오 지방에서 활동. 1820년부터 Canton Register를 발행. 1833년부터 기독교 출판물이 발행됨. 1842년 상해에서 Inkstone Press가 설립되는 것이 중요한 전환점. 1866년 Medical Missionary Association 설립. 19세기 초 중국의 문인-의사 계급은 서구의학의 도전을 심각하게 받아들임. Hobson이 출간한 해부학, 외과학 관련 서적에 나온 해부도의 사례: 해부도의 적나라함, 신학적 뉘앙스, 인간의 영혼에 대한 믿음 등의 문제로 보는 입장. 해부학은 중국에 점차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됨. 의학의 도입은 곧 자연과학의 도입으로 이어짐.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우주관, 신학적 우주관이 결합되어 중국에 영향을 미치게 됨. 그밖에 물리학, 화학, 지리학, 동물학 등도 소개됨.

- 프로테스탄트와 상해의 근대과학. 1860년대에 이르면 상해가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함. 1857년부터 Shanghae Serial이 출간되면서, 각 과학분과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짐. 1호는 5천부가 찍혀 5개 개항장과 홍콩에 배부됨. 화학, 지리, 동물, 천문학, 미적분학, 전기학, 역학 등의 내용. 더불어 자연신학, 신, 창조, 구원에 대한 개념도 삽입. 그러나 다윈주의의 수용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의 모습도 보임. 1860년 뉴튼의 Principia가 부분 번역되어 출간됨.

- 근대 수학과 calculus. 1859년 미적분 관련 서적들이 번역 소개됨. 뉴튼적 사고, 중국에는 낯선 새로운 기법. 그러나 1860년대 태평천국의 난 이후 남부중국을 중심으로 정착됨. 이후 무기제조와 선박건조에 미적분학 사용됨.

- 상해의 과학기술학교와 도서관. 1874년 일련의 서양학자들이 상해에 설립. 자금문제 등의 혼란을 겪은 이후 1880년대에 정착되는 모습. 1885년에 이르면 교육 내용도 점차 정리됨. 청일전쟁 이후 서양학에 대한 자세가 적극적으로 변해가면서 더욱 발전. 1876년 The Chinese Scientific Magazine을 필두로 많은 잡지가 창간됨.  

- 생각해 볼 점들.
° 청대에 독자적으로 발전한 실증학문에 ‘근대성’이 있는가? early modern vs. late imperial 패러다임 논쟁의 지식적 측면
°  예수회의 과학/지식의 영향 속에서 명말청초, 특히 Qing formation에서 world-historical time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까? 혹은 Eurasian 경로가 있었는가?
° 18세기 건륭제 때 집대성된 실사구시의 실증학문은 왜 ‘과학’이 되지 못했는가? 서구의 과학혁명이 가능했던 배경과의 차이점.
° 지식의 발전경로가 ‘신학적-형이상학적-실증적’ 경로를 따른다는 콩트의 시각은 동아시아에도 적용가능한가?
° 청대 이래 ‘준비된’ 실증과학적 기반이 19세기 서구 영향으로 인해 폭력적으로 정복되지 않았다면, 동서양 지식질서가 조화롭게 합치될 가능성이 있었을까?
° 조선의 실학은 청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혹은 독자적 ‘형이상학->실증학’의 경로를 따랐는가?

(3) 김상배

- 9장. The construction of modern science in late Qing china

- 개신교 선교사들은 중국에 굴절/왜곡된 버전의 서구 과학과 수학을 소개. 특히 청 말의 번역에 기독교의 문화코드를 심어 넣음. 청 관료나 문인들은 자연 신학 분야의 번역이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함. 그 대표적 사례가 Darwin의 뒤늦은 소개. Edkin은 Christian Darwinism 시각에서 진화론을 소개 번역함. 이에 따라 가장 업데이트된 형태의 서구 과학이 중국에 소개되지 못함.

- 선교학교, 공공학교의 과학입문서. 1868년 William Martin이 최초의 과학 입문 교과서 간행. 과학, 지리학, 동식물학 등 분야 번역. 사회를 연구하고 근대성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정치학, 경제학도 과학으로 인식.

- 문인이 과거시험을 위해 경전을 마스터하듯 과학에 대한 저술을 육성.

- 10장. Government, arsenals, science, and technology in China after 1860

- 청불전쟁(1884-85)과 청일전쟁(1894-1895)은 태평천국의 난(1850-1864) 이후 자강개혁의 실패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청의 패배가 관리, 엘리트, 대중의 인식 변환을 낳았음. 이는 한족들 간에 국가적 위기감을 야기, 서구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의 선례를 따르자는 인식의 부상.

- 1842년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은 청 왕조를 위해 일하게 됨. 병기창에서의 번역 사업 등.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의 군사력에 대처하기 위한 자강운동이 추진됨. 1865년 이홍장이 설립한 상해의 강남 병기창은 1870년경까지 동아시아 최대의 근대적 무기 생산공장.

- 번역은 주로 물리학, 수학, 응용과학, 제조업 등 주로 자연과학 분야. 번역용어의 표준화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 그런데 이러한 번역과정에서 문제점은 중국인 보조자들의 역할을 경시했다는 것. 그리고 이전의 번역용어와 신 번역어간의 갈등 문제. 그런데 1890년대에 이르면 중국인 번역가들이 기독교적 색채가 탈색된 과학서들을 일본을 통해 들여와 번역하게 됨. 특히 청일전쟁 이후.

- 또 하나의 특징은 당시 번역서들이 수학이나 자연과학보다는 기술이나 기계학에 대한 쪽으로 초점이동. 외국어학교에서도 기존의 사서오경과 병행하여 서양의 기술자 양성 교육을 함. 학교는 네 개의 제도로 구성. 1) 번역국 2) 외국어학교 3) 숙련노동자 훈련학교 4) machine shop.

- 1868-76년에 강남 병기창에서의 배 건조가 가장 활발했음. 당시 일본의 요코스카 조선소보다 기술적으로 앞서 있었음. 그러나 점차 유럽의 철갑판 배나 compound engine에 기술적으로 뒤떨어지면서 1890년대에 이르면 일본이 앞서감. 한편 병기창에서는 대포와 소총도 제조했지만 부족해서 유럽에서 수입.

- 청일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조선기술 이외의 변수들. 해군의 리더쉽, 남양과 북양함대의 분리, 전함의 기동성, 포탄 부족, 암호해독능력 등등. 청일전쟁의 패배는 서구화 정책의 불철저성에 대한 비판 높임. 서구의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양무운동에 대한 자성노력의 시발. 베이징제국대학이 설립되지만, 의화단의 난으로 단명.

- 11장. Displacement of traditional Chinese science and medicine in the 20th century

- 청제국 말기(20세기 초)의 근대과학 수용은, 자체적인 번역보다는 일본을 통한 번역에 의존(특히 1900년 이후).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를 대체하여 빠르게 부상. the Japanese Wave. 1898년 변법자강운동. 일본을 모델로 한 과학과 산업 부문의 교육확대. 캉유웨이: 일본처럼 서구의 산업, 광업, 상업을 배우자, 새로운 industrial-commercial society 지향.

- 해외에서 돌아온 중국 학생들은 점차 전통 중국의 natural studies와 modern science 간의 accommodation 포기. 근대과학은 서구과학을 의미하게 됨. 중국의 전통과의 단절을 위해 일본에 눈을 돌림.

- 변법개혁가들은 중국 학생들의 일본유학을 독려하고, 일본의 저널을 번역 편집. Post-Boxer educational reform(1902-1904)는 일본식의 과학기술에 우호적인 방향의 교육개혁. 1904년에는 일본의 과학 교과서가 모든 수준의 중국 교육 모델로 채택. 중일사전을 개정 편찬(1903년), 중국 출판사의 일본 텍스트 번역 출판. 일본의 과학번역어가 종전의 강남 병기창 번역어보다 널리 사용됨. 베이징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 초빙.

II. 토론

최정운: 중국이 이 책에서 말하듯 근대과학지식의 독자적 발전 & 밖으로부터의 수용에 그처럼 노력했는데, 왜 결국 실패했는가? 라는 문제에 대답 못하고 있음. 격물치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과학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철학적이고 본질적인 차이로 인해, 격물치지를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서양식 근대 과학에 대해서는 내적 저항이 커지는 것 아닌가.

서양과학의 지구적 확산의 핵심은, 조직화, 체계화. codification. 표준화된 전승과 지식의 축적 및 발전이 가능해짐. 그런데 격물치지는 sense를 주축으로 함.

양승태: 형식화 문제. 동양에는 아리스토텔레스식 논리학 전통이 없음. 근대 수학과 데카르트의 혁명.

최정운: 동양의학에서는 맥을 짚는 것이 perception의 방법. 가장 sense가 발달한 사람이 맥을 잘 짚음. 이에 비해 서양과학이나 서양의학은 sense가 가장 둔한 사람도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기준을 발달시킴.

기학(氣學)이 과학으로 가느냐? No.

김봉진: 예전에 주자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 논문 쓴 적 있음. 서양의 과학혁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 객관적 지식과 윤리.도덕의 분리. 둘째, 표준화.

구대열: 서양과학 중 많은 부분이 중국에 기초했다는 것은 사실. 그러나 지동설 등등은 이미 전통중국에서도, 산업혁명 이전의 유럽에서도 발견됨.

최정운: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technic이 아니라 technology를 발전시켰다는 것. 기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지식으로 조직화, 공식화. 기본적으로 어떻게 자연을 perceive할 것인가와 관련된 철학의 차이. 데카르트는 누가 봐도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의 형식을 역설하였음.

하영선: ‘格致’와 science가 그처럼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과학을 무엇이라고 번역해야 했을까?

김봉진: 격치가 science의 맹아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접근은 말이 안 되지만(서양에서도 과학이 근대적 의미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격치를 science 개념의 매개로 사용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음.

최정운: science가 들어와서 格致를 대치했다, 는 단순화된 일반화 대신, 중국사람들이 근대과학을 어떻게 체험했는가 들여다보아야 함. 다위니즘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봄. 혁명가 손문이 의사였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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