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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슈워츠, <부와 권력을 찾아서>, 王憲明, <言語, 飜譯與政治> (07.5.5)
 

2008-10-14 
2007년 5월 5일 전파모임                                                     이헌미

내용: 벤저민 슈워츠, <부와 권력을 찾아서>, 王憲明 著, <言語, 飜譯與政治> 발제: 이헌미, 정연

◎ 벤저민 슈워츠, 『부와 권력을 찾아서』(한길사, 2006)
(Benjamin Schwartz, In Search of Wealth & Power: Yen Fu and the West, Cambridg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64)

0. 옌푸(嚴復: 1853-1921)  

복건성 후관현 출신. 아버지는 그 지방에서 유명한 한의사였음. 1866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과거공부 중단. 은인이자 후원자 심보정의 도움으로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푸저우 선정학당[福州船定學堂]에 입학, 전통 경전 이외에 영어. 산수. 기하학. 대수학. 해석기하학. 삼각법. 물리학. 역학. 화학. 지질학. 천문학. 항해술 등을 습득하였다. 1871년, 5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훈련선인 건위(建威)호를타고 남으로는 싱가포르와 페낭까지, 북으로는 직례(直隸)만과 요동만까지 항해했다. 1872년에는 양무(揚武)호에 승선하여 황해를 순항하고 일본을 방문했다. 1874년에는 당시 고조된 중-일 간의 위기와 관련하여, 양무 호를 이용해서 대만 동부 항구들의 수심을 측정하였다.

1877-1879년 영국(Navy Academy in Greenwich, England)에 유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학 당초의 목적인 해군관계의 학술보다는 오히려 서유럽 학술 ·사상에 더 관심을 가졌다. 당시 중국의 초대 주영공사 곽숭도(郭嵩燾)와 “중국과 서양의 사상 및 정치제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논하느라 자주 밤낮을 잊었다.”(73)고 전해진다. 1879년 심보정의 사망으로 다시 미래가 불투명해짐. 귀국한 뒤 푸저우 병기학교의 교사로 잠깐 있다가, 1880년 이홍장의 부름으로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師學堂)의 총교습(總敎習)으로 옮겨가서 1890년에 교장으로 취임한다. 이 기간에 통청파[桐城派]의 문인 우루룬[吳汝倫]에게 문장을 공부하였으며 1885년부터 네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하남의 탄광사업에 돈을 투자하였고, 아편에 중독됨.

“가슴 속에 꽉 찬 말들을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77)고 느끼던 바, 청일전쟁 이후 본격적인 논진(論陣)을 편다. 1895년 톈진(天津) 『직보』(直報)에 중요 정론들을 발표하여 봉건제도와 구문화를 첨예하게 비판하고 중국의 위기를 호소하였다. 당시 글의 제목을 살펴보면, 「세계의 변화 속도에 대하여」(論世變之亟), 「힘에 대하여」(原强), 「우리의 구제에 대하여」(救亡決論), 「한유(韓愈)에 대한 논박」(闢韓) 등.(87-88)  

1895년부터 1908년까지 Thomas Huxley의 Evolution and Ethics(『天演論』), Adam Smith의 Wealth of Nations(『原富』), Edward Jenks의 A History of Politics(『社會通銓』), John Stuart Mill의 On Liberty(『羣己權界論』)와 Logic(『名學』), Montesquieu의 De l'esprit des lois(『法意』, Herbert Spencer의 Study of Sociology(『羣學肄論』), William Stanley Jevons의 Logic(『名學淺說』)을 번역 소개한다. 옌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영국 사상가 Herbert Spencer의 Study of Sociology는 1872년에 씌어졌으며, 옌푸는 늦어도 1881년에는 이를 읽었다고 사료된다.(77) Study of Sociology는 나중에 씌어진 방대한 Principles of Sociology에서처럼 스펜서의 사회학 체계가 설명되어 있지 않으며, 사회학 연구의 서설로서 사회학의 탄생에 필요한 정서적. 윤리적. 지적인 전제들이 요약되어 있다. 1898년 출간된 『천연론』서언 각주에서 옌푸는 스펜서의 Social Statics와 Bagehot의 Physics and Politics(‘格致治平相关論’)에서 인간사회의 기원에 관한 부분을 읽고 번역했다고 말하는데, 이들 번역은 출간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슈워츠는 1895년에서 1908년까지 가장 활발했던 번역-창작 시기의 저작을 통해 엄복의 세계상을 재구성하고 있으며, 1911년 신해혁명 이후 10년간 만년의 엄복 사상 및 그 평가에 대해 11장에서 덧붙이고 있다.

1. 기묘한 동거: (지식의) 보편성, (학문적) 급진성, (정치적) 보수성  

1905년 엄복의 영국 여행 기간에 손문과 엄복이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 기록이 있다. 엄복은 “우리 국민의 자질은 열등하고 지식은 낮은 상태다......우리의 현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우리의 노력을 교육에 쏟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다소나마 진보를 이룩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손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강물이 맑아질 때를 기다릴 수 있겠소? 선생은 사상가지만 나는 행동가요.”

- 사회과학 vs. 정치사상. 학문적 급진성 ≠ 정치적 급진성 or 행동
-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보편타당한 진리나 윤리의 성립 가능성에 대한 믿음의 정도에 따라 그 관계는 달라질 것. 따라서 “지식의 보편성과 급진성의 관계: 19세기 중국의 경우”처럼 시간 장소를 특정하여 말해야 함.
- “주도적 담론에 대한 비판이론의 많은 부분이 역시 수입된 담론을 바탕으로 전개되는데 현실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원리주의적이고 따라서 급진적 성격을 보이게 된다.”라는 고찰.
- 슈워츠의 번역정치론은 이브 드잘레이, 궁정전투의 국제화를 떠올리게 한다. agent로서 옌푸가 구조적 한계를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반영하면서 현실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19세기 말의 이른바 ‘서양에 대한 반응’이라고 하는 것의 대부분이 중국의 지적 전통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과 범주의 틀 안에서 일어났다는 점.”(51)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근대 이행기의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사상 정황에 대한 세심한 독해가 요구됨.

- 1820년 하장령이 엮은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보면, 6부의 행정. 세제. 염세. 조운. 군사조직. 아시아 내륙의 이민족. 해역방위에 대해 상세히 논의.(53)『상군서』(商,君書). 한비자. 관자 등의 책에서 이미 경제력과 군사력의 연관성이 날카롭게 지적되었음.(57)
엄복은 소심한 탓에 박해를 피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들에 친숙한 수식을 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당시의 상황이 어느 정도의 신중함을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897년에 엄복과 양계초 사이에 오고 간 중요한 편지들을 보면, 엄복은 “교의는 보전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교의를 보전하면서 진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보전되는 교의는 이미 본래의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결국 엄복의 압도적인 관심을 끈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성이었다.(97-99)

- 리쩌허우는 옌푸에게 발견되는 비유존법(批儒尊法: 유가를 비판하고 법가를 높임)→옌푸가 ‘법가’였다(마찬가지로, 캉유웨이는 ‘유가’였다)는 식의 자리매김이 철저한 오독이라고 비판한다. 이는 이중적으로 시대착오적이라고 하겠는데 첫째, presentism. 둘째, 당대 지식인들의 변화에의 강렬한 욕구와 사상적 급진성 과소평가. (신해혁명 이후 지식인들의 보수성에 대한 과소평가 내지 폄하, 또한 동일한 형태의 오류)  

- 리쩌허우 또한 슈워츠와 마찬가지로 옌푸의 반루소적. 반혁명적 입장(“그는 민주공화에 반대하고 제제복벽을 주장했다. 마키아벨리를 제창하고 철인정치의 환상을 품었다.”)(1911년의 옌푸의 『사회계약론 비판』[民約平議])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옌푸의 사상적 흐름에 있어, 1895년의 ‘전면적 서양화론’이 만년의 ‘반동적 전통주의론’으로 후퇴하거나 변질된 것이 아니다. 스펜서 사회학을 주입받은 때부터 이미 그는 사회적 토대 없는 비현실적 혁명에 반대. 보수적 정향. 엄복의 상대적인 보수주의와 신중함은 기질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가 신봉했던 특정 서구 사상으로부터 매우 엄밀한 논리로 이끌어낸 것. 스펜서가 제시한 진화는 비약없이 미세한 단계를 밟아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누적되는 과정이다. 엄복의 견해에 따르면 젊은 양계초의 개혁에 관한 글들은 적절한 우선순위나 중국의 현실적인 사회-역사적 상황에 대한 아무런 통찰도 없이 가능한 한 모든 요망 사항들을 잡동사니로 쌓아놓은 것에 불과하다.(131) 스펜서 orientation에 근거하여 옌푸 사상의 연속성을 읽어냈다는 점에서, 슈워츠의 논의가 더 섬세하다.  

2. 설득과 계몽의 수사학

(1) 역사적인 언어를 찾아서

엄복은 대중들이 자신의 번역을 당장 읽을 것이라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엄복이) 호소하려 했던 청중은 엘리트였으므로 그는 이들이 읽을만한 언어를 사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언어가 세련되지 않으면 효과가 그다지 멀리 미치지 않는다.” 나아가 “한대 이전의 문체와 어법을 사용하면 번역되는 원전의 미묘한 원리와 난해한 어구의 전달이 용이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물론 이 말도 교양있는 독서인에게만 해당된다.(141)

양계초는 “유럽.미국.일본에서 일어났던 문체의 변화는 그 문명의 수준과 정비례한다.....이와 같은 유형의 심오하고 난해한 책들이 용이하고 적확한 문체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책들이 우리 학생들에게 유익하겠는가? 번역의 목적은 인민들 사이에 문명화된 사상을 확산시키자는 것이지 쓸데없는 명성이나 구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이에 대해 엄복은 이렇게 답변했다. “내가 관심을 가진 책들은 심오하고 난해하다. 그 책들은 애당초 학생들을 육성하기 위해 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학생들이 그 책들로부터 뭔가를 얻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바로 고서를 많이 읽은 중국인들을 위해서 번역을 해왔다.”

그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엄복은 전체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문장이나 구절 전체의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한 후 이를 관용적인 중국어로 전달하려 노력했다. 현실적으로 새로운 용어를 창출하는 일에는 무한한 노고가 뒤따른다. 그 자신의 말로는 때로 “하나의 용어를 한 달에 걸쳐 숙고했다”고 한다. 대체로 엄복은 일본인들이 이미 수십 년에 걸쳐 창출해낸 신조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엄복이 일본의 신조어를 거부한 구체적인 사례는 스펜서의 <사회학연구> 서문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society’의 번역어로서 일본어의 ‘社會’를 거부하고 고전적인 ‘羣’을 선호했는데 사회구조보다는 사회집단으로서의 사회라는 서양의 개념에는 ‘군’이 훨씬 가깝다는 견해이다.(326 주8)

(2) 과학적인 언어를 찾아서

- 리쩌허우는 옌푸가 철학적 인식론을 매우 중시했으며, 영국의 경험론과 논리귀납법에 근거하여 육왕 심학을 대표로 하는 중국 전통의 관념론적 선험론을 중점적으로 공격했음을 지적한다. 옌푸는 밀의 논리학 번역 주석에서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의 여러 견해는 로크와 밀이 배척한 것”이라고 하였다. 리쩌허우는 옌푸의 사상이 실증주의에 완전히 빠져 사물의 궁극적인 본질과 실체는 불가지한 것이므로 인식하려 할 필요가 없다는 실용주의적 색채까지 띠게 된다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말년에 옌푸는 “날로 악화되어가는 상황에서 경험론을 완전히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계속하여 굳세게 신봉하던 진화론마저 포기했다. 법가인물조차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되었고 완전히 공자와 맹자에게로 돌아갔으며, 또한 극단적인 비관 속에서 장자의 허무주의 철학에 침잠함으로써 자신을 마비시켰다.”는 평가.

- 슈워츠의 옌푸 해석은 여기에서 다시 리쩌허우와 갈린다. 그는 옌푸가 밀의 저작 전체에 근간이 될 수도 있는 실증주의적인 ‘반형이상학적’ 전제들을 궁극적으로 수용한 것 같지는 않다고 보고 있다. 엄복이 노자와 스펜서의 형이상학적 전제가 형식적으로는 아무리 유사하더라도 양자를 구분짓는 실존적 태도의 커다란 간극을 인지했다는 사실, 노자의 ‘과학’과 ‘민주주의’에 관한 궁극적인 견해가 결국 질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은 동일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줄곧 부각되었다. 슈워츠에 따르면 옌푸는 진화의 흐름 배후에 놓인 궁극적이고 불변하는 실재를 인정한다. 그가 이미 중국의 민족주의자로서 무엇보다 중국을 현재의 굴욕으로부터 부강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임무에 열중했다면,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을 제공하는 특정한 자유주의의 가치를 확고하게 신뢰했다면, 이러한 새로운 믿음이 그의 인생에 중심적인 의미를 주는 데 부족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대해, 슈워츠의 자답은 “기존의 모든 것을 넘어서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는 무한한 가능성의 보고다. 엄복이 난외주에서 말했듯이 유가는 도가 무진장하다는 인식이 없었다. 이 점에서 본다면 ‘도’ 그리고 불교의 절대조차 노자와 부처의 특수한 생명관으로부터 벗어나서 포용력 있는 낭만주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귀납이란 행동주의의 한 형태로서 투쟁의 가치-자연으로부터 그 불변의 원리들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비정하고 엄연한 사실들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를 담고 있으며, 엄복이 이 방법을 중국의 지적 병폐를 치료하는 약으로 수용했다는 판단과 모순되지 않는가 이것은?  

(3) 옌푸는 존재와 인식의 괴리로 인해 마음의 지옥에 빠진 것일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과학이란 진위의 문제에 관한 것이지 그 발견이 자비와 정의에 일치하느냐 아니냐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엄복의 말, 175)

3. 언어번역의 정치

(1) 스펜서는 지적 엘리트의 사회적 행동을 위한 처방전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로는 사회 진화의 장대하고 비인격적인 과정에 ‘외부’에서 어설프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응용과학처럼 사회를 의식적으로 재조성해나가는 도구로서 구상된 것이 아니라 명백히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비인격적인 과정을 이해하기 위위한 도구로서 구상된 것이다. 그런데 엄복은 「힘에 대하여(原强)」에서 “스펜서는 진화론의 방법을 인간관계와 사회질서를 설명하는 데 적용하고 있다. 그는 또한 최근의 과학원리들을 이용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원리들을 밝히고 있다. 엄복은 스펜서의 결정론적인 체계를 자발적인 것으로 왜곡시킨다. 그는 스펜서의 체계에서 단순히 세계를 설명하는 이론이 아닌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프로그램을 찾아냈다.”(80-88)

(2)『천연론』은 두 가지 일, 즉 헉슬리의 강연을 자의로 해석하고 헉슬리에 대항하여 스펜서의 주요한 견해들을 해설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엄복은 헉슬리가 우주의 과정과 인간의 과정을 병치시킨 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예리한 반론을 폈다. “사회윤리를 인간의 공감으로부터 이끌어내려 한 그의 시도는 원인과 결과를 전도시킨 것이다. 인간이 분산된 상태를 떠나 사회로 들어오게 유인한 것은 안전한 이익이다.......그렇다면 무엇이 사회집단을 효과적으로 만드는가? 상호적인 공감의식을 발전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나 공감을 느끼는 능력은 자연선택과정의 결과이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헉슬리는 이차적인 것을 가지고 근본적인 것을 설명하려 한다. 그는 스펜서만큼 철저하게 사회학의 원리들을 파악하지 못했다.”

엄복은 서양의 의론 전체가 전혀 새로운 배경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펜서는 자신의 윤리의 근거를 노자나 주희와 마찬가지로 우주에서 구했다. 그러나 스펜서의 윤리는 전혀 새로운 것이다.....순자와 헉슬리는 우주가 금욕적 도덕성을 지지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를 윤리의 본보기로 인정하지 않았다. 스펜서가 우주를 인정한 이유를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는 자기 주장과 개화된 자기 이익의 윤리를 이미 긍정한 상태지만 그래도 그 에너지들을 적절한 범위 내에 제지하기 위한 메커니즘을 계속 창출해간다는 점 때문이다.

(3) 스미스는 사회와 우주에 자아(Ego)를 맞세워 화해 불가능한 투쟁 상태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개인이 개화된 자기 이익을 완성시키는 일은 공동체 일반의 이익이 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전체의 이익’, ‘국민’, ‘사회’ 등을 가리키는 스미스의 모든 언어가 엄복의 번역에서는 너무도 수월하게 국가의 이익을 지시하는 언어로 치환되었다는 것이다. 스미스에게 ‘국민의 부’란 국민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부의 총합을 가리켰는데, 엄복에게 ‘국’의 부는 국민국가라는 비슷한 집합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하나의 집합체로서의 국민국가의 부이자 그에 따르는 힘이었다.

엄복 자신은 이기주의를 사회적 결속의 궁극적 원천으로, 동정을 그 파생물로 본 스펜서의 견해를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기는 하지만, 이 모든 원전으로부터(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로부터도) 자기 이익과 동정 또는 ‘상호성’, 이 양자가 병존할 수 있다는 견해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4) 밀이 방어하는 자유는 기업가나 탁월한 능력과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사회에서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자유만이 아니고 무능하고 재능없는 사람들일지라도 자기 나름의 존재 양식대로 행동하는 자유이기도 했다. 밀이 어느 정도 ‘힘’과 에너지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엄복은 앞서 말한 형태의 ‘개성’을 자신이 생각하는 ‘민덕’(民德)이라는 스펜서적인 개념과 연관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민덕’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육체와 정신의 강건한 힘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밀의 글에서 종족(race)이란 인류(human race)를 의미한다. 그러나 엄복은 개성의 수혜자를 개인 자신, 국민 사회, 국가의 세 가지로 들면서 난외 주석에서는 국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5) 엄복의 사상을 이루는 요소들 대부분은 허버트 스펜서로부터 유래한 것들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미묘한 변화를 겪었다. 원래의 종합에 포함된 요소들은 엄복의 관심사를 통해 굴절되어 새롭게 배열되었다. 엄복이 번역한 책을 읽은 당대의 중국인들은 자유의 문제에 관해서 밀, 스펜서, 스미스 사이의 명확한 차이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 사상에 대한 엄복의 관점을 근대 서양사상이 비서양적 정신 속에서 왜곡된 한 사례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 다윈주의와 자유주의가 엄복의 사상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면 이는 그가 허버트 스펜서의 저작에서 이미 두 이념을, 조금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서로 뒤섞인 상태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밀에게 개인의 자유는 목적 그 자체였지만, 엄복에게는 인민의 덕과 지력의 진전을 위한 수단, 나아가 국가의 목적들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엄복은 19세기의 진화론적인 진보의 개념으로 몽테스키외-특히 중국이 영원히 전제정치의 감옥에 갇힌 채로 남을 것이라고 단언한 그의 의도-를 아주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다. 엄복이 <법의 정신>을 번역하는 와중에, 각 단계가 다음 단계로 유기적으로 생성되는 사회정치적 단계라는 관점에서 역사적 진화를 설명한 에드워드 젠크스의 <정치학사>라는 애매모호한 소책자를 번역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멜빈 리히터는 조아킴 커츠(Joachim Kurtz)와 더글라스 하울랜드, 리디아 리우의 접근방식을 주변부 개념사 연구의 긍정적 모델로 제시하였다. 이들은 공히 제국이 개념을 독점함으로써 식민지는 여기에 전면적으로 포섭되거나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흑백논리를 거절한다. 그 대신 (i) 번역 과정에 개입되는 창조적 재해석의 역할에 주목하며 (ii) 개념 번역을 주도한 중요 행위자들에 주목한다. (iii) 나아가 개념이나 개념이전은 ‘원본(originals)’이나 ‘번역본(translated versions)’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가를 비교함으로써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 번역정치 과정/행위에 개입되는 contingency의 문제.

- 옌푸 자신의 ‘외로된 작업’으로서의 번역과 별개로, 옌푸 저작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옌푸의 번역서는 대부분 무술년 이후에 출판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개량변법운동에 복무했다기보다는, 역자의 주관적 의도가 어떠했는지와 관계없이 실제로는 막 일어나고 있던 혁명파의 사상적 양식이 되었다. 혁명파는 스펜서의 『사회통전』과 같은 옌푸의 일부 번역서에 반대의견(장타이옌의 『사회통전』참조)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캉유웨이.량치차오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으며, 아울러 다음과 같이 인식했다. [(옌푸는) 배만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그는 민족국민주의에 대해 사실 공감을 표시했으며.....옌푸의 민족주의는 『법의 정신』번역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그러므로 배만혁명이 오늘날 우리 민족의 ‘본체에 부합’되는 필요한 일임을 알았다. 옌푸가 역사에 의거하여 사회학적 진화의 공례(公例)를 들어가며 논한 것은 그 의의가 참으로 대단하다.....옌푸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사람은.....옌푸가 평화를 주장했다고 여기고.....어떤 사람은.....그가 정부를 옹호하고 민족주의를 비판했다고 의심했다.....우리가 보기에 이상의 사실은 그가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반대자의 지위에 선명하게 서 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이상 『民報』제2호, 「허우관 옌푸의 최근 정견을 서술함」(述候官嚴氏最近政見)} 이는 옌푸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던 배만 혁명사상을 그에게 억지로 갖다 붙여 옌푸를 자신의 동업자로 삼은 것이다.”

- 새로운 지식의 전유(專有)와 해석 투쟁은 서양-동양(중국) 뿐 아니라 중국 내 다른 정파들 간에도 벌어졌다. 끝없는 이해-오해의 사슬 곳곳에서 의미‘들’이 만들어짐. 저자의 손을 떠난 저작은 홀로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배와 같다.  


전파모임 2007-05-05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석사과정 정연

언어, 번역과 정치
---옌푸 譯 『社會通詮』에 관한 연구

王憲明著, 北京大學出版社(北京), 2005.

1. 서론

근대 중국의 저명한 사상가와 번역가인 옌푸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서양 문명의 만남 속에서 중국이 직면한 “數千年來一大變局”를 통감하고 동서양 문화관계와 중국의 미래발전방향에 대해 끊임없는 탐구를 해온 격변시대의 학자이다. 옌푸의 작품에 대한 수집정리 작업은 그 생전부터 진행되어 왔으나 1998년에 와서야 총 20권의 비교적 완전한『嚴復合集』이 대만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합집은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발행되지는 않고 부분 연구기관에 기증도서로 소장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옌푸 연구는 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고 옌푸 일생에 대한 결론적인 평가도1930~ 1940년대에 벌써 이루졌다. 이 시기에 옌푸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는바 “중국의 낡은 사상을 타파하고 서양의 새 사상을 도입한 첫 사람”으로 “중국의 모든 것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가진”, “획기적인 인물”이었다. 초기 옌푸 연구에서 옌푸의 사상은 3개 시기로 나누어졌는데 “전반적인 서양화시기”, “절충시기”, “복고시기”(周振甫) 이런 획분은 그 후의 연구자들에 의해 더욱 “분열된” 옌푸를 양산하게 된다. 무술변법 전의 옌푸는 전반적인 서양화를 주장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반봉건적이었으며 변법을 지지했으나, 무술변법 후에는 보수반동으로 퇴각하여 시대의 낙오자로 되었다는 이런 식의 양분법적인 연구는 옌푸의 사상과 그 가치를 판단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또 이런 결론을 중국근대사에서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양계초, 강유위, 장태염, 손중산 등에까지 확대시켜 중국근대사상 발전의 일반적인 모델로 간주하는 것은 상당한 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방법 상에서도 옌푸에 대한 연구는 중국학계의 학과 분공에 따라 분열된 연구를 해왔는바 옌푸는 성공적인 직업번역가로는 충분히 부각되었으나 그가 청말 사회에 처한 특정 위치, 대인관계 네트워크, 정치체제 중의 배역을 소홀히 함으로 고립적인 개체로서의 옌푸, 譯著와 사상도 현실 사회정치와 관계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과 관념으로만 위치지어지는 것은 옌푸 사상에 대한 정확한 해독에 방애가 되었다.

이 책은 의식적으로 원본에 대한 정리와 精讀으로부터 시작하여 옌푸가 번역의 모본으로 삼았던 젠크스(Edward Jenks)의 “A Short History of Politics”와 옌푸의 譯本『社會通詮』을 text와 context 대하여 비교대조하면서 옌푸 사상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시도하는바 학술문화와 사회정치의 상호작용, 동서양문화의 융합과 상호注釋의 관점에서 근대사상사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옌푸가 관심을 가진 문제는 비록 광범위하지만 핵심은 대체로 2가지: 하나는 立國문제, 즉 근대국가의 건립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서양의 이질 문화의 긴장과 대립의 해소 그리고 더불어 양자의 장점을 융합시킨 중국의 새 문화의 창출 문제이다. 서양이 주도한 세계체제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이며 중국은 서양이라는 타자를 외면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처받은 자아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가장 절박한 문제로 다가왔으며 이런 자아의 위기대응능력의 부족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가 자아를 재건하는데 선행해야 할 중대한 과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옌푸는 근대서양철학, 사회학, 경제학, 법학, 정치학 서적들을 대랑으로 번역했으며 그 중에서도 『社會通詮』은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을 반성하고 근대국가의 건립문제를 탐구하며 건국의 청사진을 제시한 중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우기 이 譯著가 20세기 초기 중국의 주요 정치파별, 특히 양계초를 대표로 하는 입헌파,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혁명파, 陳獨秀, 李大釗, 胡適 등을 대표로 하는 신문화파에 대한 영향을 감안하면『社會通詮』을 연구하는 것은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며 지금 중국이 당면한 현실을 이해함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 Edward Jenks

옌푸의 譯著 중에서 『天演論』이나 『群學肄言』에 비하면 『社會通詮』은 원저에 대한 이해나 저자에 대한 이해가 모두 명확하지 않으며 옌푸 연구에서도 중요한 저작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社會通詮』의 저자 젠크스(1861-1939)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영국법 교수로 있었는데 그의 전기작가는 젠크스를 교육가로 보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수십년간 전문적인 과제나 영역에 집중적인 연구를 진행한 학자라기보다 흥취와 기연이 맞는 대로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젠크스의 “A Short History of Politics”도 위와 같은 작품으로, The Temple Primers 시리즈 시민 교양서적의 일종으로 씌어진 것이다. 1900년에 출판해서1918년까지 적어도 7판까지 나왔던 것을 보면 구미에서도 보급이 상당히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젠크스의 이 저작은 어디까지 교양서적에 지나지 않으며 중국학자들이 생각하는 고전 학술저서는 더욱 아니다.(중국 번역본 3종: 廣學會1903, 옌푸1904, 張金鑒1923)

3. 옌푸가『社會通詮』을 번역하게 된 동기

벤저민 슈워츠(Benjamin Schwartz): 스펜서의 사회정치제도의 유기적 발전을 신봉한 옌푸는 몽테스키외의 『法意』에서 나타는 사회의 정지적 본질에 대한 반론으로 『社會通詮』을 번역했다고 한다. (1. 시간:『法意』1906/ 『社會通詮』 1904; 2. self-referentiality )
傅斯年: 名利
저자: 1) 의화단운동 전후 排外와 媚外 사조에 대한 반성
2) 대인관계 (도표)

4. 社會, 國家, 小己, 制度

젠크스의 “A Short History of Politics”와 옌푸의『社會通詮』을 비교한 결과 10만여자의 『社會通詮』에서 옌푸가 넣은 案語, 주석을 제외하면 본문은 8.6만자인데, 이 8.6만자에서 1.9만자는 옌푸가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첨가한 것이라는 것이 발견된다. 20%나 되는 옌푸의 자기 주장이 들어있는 『社會通詮』을 젠크스의 글로 취급하고 인용했던 지난 날의 연구작업들에 대해 심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근대 동서양 문화의 번역은 두 가지 다른 가치관 사이에서 진행되는 “문화번역”이다. 이 양자의 유기적인 전환을 집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데 옌푸의 『社會通詮』 중 키워드는 “社會”, “國家”, “民族”, “小己” 등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키워드들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옌푸가 젠크스의 원저에서 나타나는 주요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알아낼 수 있고 옌푸가 중국민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다시말하면, 이런 키워드들을 통하여 옌후가 어떻게 동서양 문화를 융합했으며 이 두 가지 상이한 문화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옌푸 譯 『社會通詮』의 구성: 본문, 案語, 주석)

1) 사회

역사분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대사회의 발견은 18세기 계몽운동을 통하여 진보개념을 적재하여 역사발전의 거대한 장막 속에 놓이게 되었다. 세계의 모든 민족의 역사와 사회는 모두 이런 분기법의 부동한 단계에 놓이게 되었으며 젠크스의 저작도 이런 노력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젠크스는 당시 구미 인류학, 신화학, 언어학, 고고학 등 여러 방면의 지적 성과를 원용하여 통속적인 언어로 인류사회 형식에 대해 총체적인 논술을 진행했는바, 3 가지 종류의 인류사회를 제시한다.(the savage, the patriarchal, the military) 그는 이 3가지 인류사회를 묘사할 때 유형이라는 types를 사용했지 stages가 아니었다. 한 글자 차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의미의 중요성이 존재한다. 유형으로서의 사회는 시간과 공간 상 공존 가능하지만 단계로서의 후자는 동일 시공간에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선후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유형의 구체적인 토론 가운데서는 유형이라는 개념을 단계로 바꿈으로써 사실상 3가지 유형의 사회를 역사 진보의 3가지 단계로 대입시켰다. 동일한 단락을 옌푸의 번역에서 보면, 비록 정확하게 types를 형식으로 인식하고 번역하지만 “始于图腾,继以宗法,而成于国家”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젠크스보다 명확한 사회발전의 규율성을 드러내고 있다.(endeavor to trace) 옌푸의 사회발전 3단계론은 중국인이 인류역사발전과정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고 있으며(公羊三世說, 五德終始說) 역사는 저급단계로부터 고급단계로 발전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의 발전단계에 대한 인식은 근대 중국인이 중국을 세계 각 민족의 역사발전과정 속에 놓고 관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국가, 민족, 소기, 제도

근대국가의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국가, 민족, 국민(개인, 혹은 소기) 등 기본개념은 그 기저를 이루고 있다. 근대 서양에서 국가 사상의 발전에 “權”, “力”, “利”은 시종 핵심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19세기에 와서 국가의 3요소(영토, 주권, 인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천하국가” 관념에서 주체를 차지하는 것은 폭력이나 강력이 아니라 “仁”,”德”이었다. 젠크스의 관념 중에서 국가는 소집단을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설립된 것이며; 국가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국가형식에는 좋고 나쁨이 없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라면 다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정체의 국가라도 주권은 필히 주어진다고 이해했다. 사실 젠크스에게 있어서 국가라는 것은 특수한 사회의 형식임을 의미하는데 비해 옌푸는 국가에게 일반 사회가 구비하지 않는 특점을 번역 속에 첨가했다. 그리하여 옌푸의 국가는 “人道所不可离”의 조직으로 나타나고 인류가 분투해야 할 목표로 부상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옌푸의 국가 사상은 정통적인 서양 의 국가사상과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는바 오히려 전통적인 천하관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p. 93, 为人道所不可离,必各有所专属,三也;其关于吾生最切,养生送死之宁顺,身心品地之高俾,皆从其物而影响,四也;为古今人类群力群策所扶持,莫不力求其强立而美善,五也。) 국가의 특성에 관해서는 대체적으로 근대서양의 주권과 영토 개념을 정확하게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古今” 의 발견빈도)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옌푸가 쓰고 있는 “민족”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젠크스의 nation을 번역한 적이 없다. 젠크스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僞유사 개념으로 tribe인데(152차) 이는 혈연관계에 기초한 현대사회와 융합불가능한 사회정치조직 이고, 그에 비해 nation은 모두 13차 밖에 없었으며 nation은 tribe라는 사회정치조직을 소멸한 다음에야 나타나는 근대적 의미의 정치조직으로 국가(state)와는 다르며, 국가의 정치적 관리를 받는다. 옌푸는 種族, 種人으로 혈연관계를 기초로 하여 결합된 집단을 지칭하고 있으며, tribe, race, blood등을 이 두 단어로 번역했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단어는『社會通詮』에서 25차 나타나는데 그 중 13차는 원문과 대응관계를 가지지 않는 자의적인 첨가이다. 그렇다면 원문과 대응되는 곳은 7곳인데 tribe, clan, patriarch, community를 번역한 것이다. (일본유학생, 보황당, 혁명당의 민족과의 차이점)

史記의 小己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젠크스의 individual를 번역하는데는 옌푸가 국가와 국가를 구성하는 매개인의 대립과 상호작용을 드러내는데 적당한 방법이었다. 옌푸는 젠크스의 국가와 개인 관계에 대한 논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중간집단의 부재로 국가와 개인이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개인이 권리를 가진 국민으로 성장하여 근대사회의 기초가 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신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民皆平等”의 시대에 “程度极高之社会”가 올 것을 기대했다.

옌푸에게 있어서 긍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은 국가과 소기, 민족은 종족사회의 잔여물로서 소멸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국가는 종족적인 민족 간의 담을 허물고 진정한 통일체를 구성하며, 국가와 소기가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게 되는 근대사회는 민족이라는 중간집단을 없애야만 했다. 비록 국가, 민족, 소기는 젠크스의 글에서도 핵심단어이지만 옌푸의 번역에서 나타나는 이런 중요성은 중국이 당면한 현실을 변화하려고 시도하는 구체제 개혁의 실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옌푸에게 서양의 삼권(옌푸의 번역: 刑法, 議制, 行政)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가 주목한 점은 입법과 행정 양권, 그리고 중앙정부의 정치체제 및 지방자치였는데 모두 국가, 민족, 소기의 관계에 입각해서 전개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옌푸는 중국에서 영국식의 준공화제 혹은 미국식의 공화제를 채용하기를 원했고 중앙정부는 삼권분립을 실시하며 대의제와 정당제를 실시할 수도 있고, 중앙정부 지도 하에 지방자치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정치체제문제는 19세기말, 20세기초 중국사회에 있어서 핵심문제 중의 핵심이었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社會通詮』의 번역출간은 당시 사회 각 정치파벌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5. 정치적 논쟁과 사회적 영향

商務印書館에서 출판사 광고서평에서 옌푸 譯 『社會通詮』에 대한 평론은 민족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 泰西에서 기원하여 근간에 중국에 수입된 것으로 외세를 배척하는 것이 그 주요한 특징의 하나라고 했다. 이는 옌푸가 번역한 『社會通詮』에서 민족의 개념을 훨씬 벗어난 주장이었고 민족주의를 이미 체계적인 사상으로 간주한 언설이었다. 그리고 『社會通詮』을 소개한 “東方雜志”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정치적 배경이 있었던 간행물이었기때문에 당시 혁명파와 개량파의 혁명과 개량에 대한 논쟁 속에서 정치와 무관할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원래 양계초가 『社會通詮』의 주요 비판대상이었을 수도 있는데(개인-가족-부각-국가) 1903년 양계초가 미국을 방문하면서 민족주의로부터 국가주의로의 돌연적인 사상전환을 함으로써 공격대상이 혁명당으로 전이된 것이다. 혁명당은 자신의 이론적 근저인 민족주의를 공격하는 일체 언론들에 대해 대항함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고저 했으나 많은 혁명당인들은 옌푸의 역서들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또 옌푸의 사회적은 영향력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옌푸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책략적이고 조심스러웠다. 그들은 가능한한 옌푸의 영향력을 혁명당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일조하고자 고심했던 것도 있다. 혁명당 내의 해외파들의 고심과는 달리 전통문화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은 장태염은 보다 직설적이고 강경한 anti-Manchuist었다. 물론 그의 이런 反滿주장은 혁명을 동원하는데는 유리하였지만 신해혁명 후에는 현실에 걸맞지 않은 주장 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신문화운동 중의 대부분 인사들은 옌푸의 저작을 읽으면서 성장한 세대로서 종족제도와 君師제도에 대한 비판, 단어사용의 유사성, 그리고 유물주의 경향 등은 신청년파의 사상적 전통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는데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결론

서양의 보급형 교양서적이 漢語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저자와 역자의 교류는 새로운 문화 환경에서 새로운 언론을 창출시킨다. 역자의 사상이 상당부분 가미된 譯著에서 옌푸의 근대국가사상과 전통 천하사상의 접목을 엿볼 수 있으며 진보의 관점에서 중국사회가 발전해야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인류보편사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설정한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보겠다. 혼란한 현실 속에서 중국이 장악할 수 있는 질서있는 세계의 건립이 가능하다는 것, 구질서로부터 신질서로의 이행, 逆序로부터 順序로의 기대, 이는 중국 근대사상의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서양 근대정치사상의 키워드의 漢化에서 볼 수 있는 옌푸의 사상은 단지 민족주의자와 비민족주의자, 자유주의자와 비자유주의자로 양분하여 판단할 수 없는 것으로 청말 이래 나라가 수모를 당하는 현실에 직면하여 민족주의에 허리를 굽혔지만 중국 지식인의 보편주의적 고민을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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