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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앎과 잘남>, 하영선, “한국근대국제정치론 연구” (06.12.28)
 

2008-10-14 
2006년 12월 전파기록

일시: 2006년 12월 28일(목) 2시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참석: 하영선, 최정운, 전재성, 김상배, 구대열, 양승태, 최상용, 김봉진, 강상규, 김민전, 김준석, 황지환, 김범수, 김치욱, 손열
발표: 양승태, <앎과 잘남>-“왜 예거(Werner Jaeger)는 아크로폴리스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돌렸는가?”, 하영선, “한국근대국제정치론 연구”

I. 양승태 발표
- 양승태, <앎과 잘남 - 희랍 지성사와 교육과 정치의 변증법>(책세상, 2006) 참조.

○ 한국정신사 연구에 있어, 왜 우리에게는 우리의 구술적 학문 언어가 없는가? 한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유/토속적 신화, 사물에 대한 이해가 따로 논다. 지식인과 대중의 유리. 지식인은 오로지 선진문명의 텍스트만 받아들여 읊조리고, 일반 대중의 구술적 삶의 생명력이 학문에 반영되지 못했음.
○ 재야의 ‘仙道’에 대한 자각. 丹學의 유행. 역사 속에서 혁명적 대전환은 한글창제. 이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살리지도 못했음. 우리 고유의 언어 속에 내포되어 있는 개념정의를 알아내야 함.
○ 설사 동학운동이 성공했다고 해도, 정권안정에는 실패했을 것. 내란상태 돌입. 일제라는 악마가 오히려 구폐를 청산하고 근대화를 이룩한 측면 있음. 일제하에서 자생적 학문, 독립국가 건설을 모방, 흉내는 냈지만 전통/서구의 이분법과 겉돎을 극복하지 못함.
○ 서양 학문에 대한 근원적 이해를 통한 서양 학문의 비판적 극복 모색, 그리고 희랍지성사 연구.

II. 토론

구대열: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와 이집트 선진문물에 대해 계속 이야기한다. 그리스 일부 집단이 이집트에 가서 살고 통역이 가능해지면서 이집트 역사가 그리스어로 서술됨. 페르시아도 대국이자 세계중심이라는 자기 나름의 세계관 가짐. 페르시아와 이집트, 아테네 비교. 이들은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상호 반목, 질시, 협조, 경쟁이 활발했음. 이것이 아테네 정신력 발전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고, 그리스로 이어졌다고 봄.

양승태: 그 속에서도 종교생활은 계속되었고, 구술문화 이어졌음. 잦은 전쟁으로 시민들이 군인으로 참전하면서 정치적 의식과 권리 높아짐. 그리스 부족국가들은 오랫동안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문화적 우월성에 억눌려 지내다가, 전쟁의 승리와 자연철학의 발전에 따라 자긍심 고취, 희랍 문화 꽃피는 데 이름. 알렉산더 원정이 정점.

최정운: 이야기의 핵심은 서양정신사에서 ‘자유’라는 테제=존재의 고뇌. 존재나 영혼에 대한 느낌이 결국 발전의 원동력인가? 자유라는 것은 개인적 노예상태, 폴리스의 정치체제, 다른 도시국가들과의 관계 속에서 중층적으로 존재함.

구대열: 정신사에서 ‘자유’ 개념의 심화. <십계>에 따르면 노예가 아닌, 의식을 지닌 자유인이어야만 이집트에 항거하여 사막으로 떠날 수 있음. 실질적으로 그 시대사를 연구한 사람들에 따르면, 모세의 엑소더스의 주체에는 노예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 이들은 이집트 변방을 지키던 군사화된 집단이었다고 사료됨.

최상용: 한국학자가 쓴 글 중 내가 이제까지 가장 열심히 읽은 것은 1979년 Harvard 김경원 박사논문. war and revolution이고 양승태 교수의 이번 책 <앎과 잘남>을 두 번째로 열심히 읽었음. 개인적으로 토착언어, 자기언어의 힘이라는 문제의식은 공유하지만 시각은 다름. 아레테를 통설대로 도덕성, 탁월성이라고 하는 대신 ‘잘남’으로 번역한 것은 탁견. 그러나 지금 와서 아레테를 모두 ‘잘남’으로 바꿀 것인가? 오히려 도덕성, 탁월성이라는 말이 학계에서는 더 잘 이해되고 있지 않나. 개념이란 뜻의 독일어 begriff는 ‘잡다’라는 뜻의 동사begreifen에서 파생. 현실을 파악한 것이 개념이다. 나의 답은, 한글과 한자의 변증법적 종합. 불교/유교언어를 받아들이자. 토착언어가 아니라고 버리기엔 너무나 방대하고 아까움. ‘鞭尸’(편시)라는 말이 있음. 자식이 부모보다, 아우가 형보다, 친구가 먼저 죽었을 때 가슴 아파하며 책망하는 말. 아름답지 아니한가. 살려쓰자.

동양고전과 희랍고전의 언어의 중요성은 인정. 그런데 그 중요성의 내용은? 중국-일본-한국 사전에 재력, 금력, 권력이라는 말이 모두 있는데 ‘언력(言力)’이라는 말 없음. 언어에 대한 부정적 의식 있음. 교언영색보다는 눌변을 높이 침. 그렇다고 언어를 경시하지는 않음. 남아일언 중천금. 논어에 보면, 지도자는 言忍. 말을 참으라, 아낄 것. 동양고전에서는 말을 ‘덕’과 관련해서 이해하지 않았나 싶고, 서양고전에서는 말을 ‘설명력’, 권력과 관련시키지 않았나. 말의 힘에 대한 사상의 근본적 차이. 그러므로 함부로 일괄적으로 생각할 수 없음.

양승태: 한자를 버리자는 이야기는 아님. 순한글을 개발해서 공존시키자. 그리고 탁월성-잘남과 같은 번역어 문제에는 논쟁이 요구됨.

최상용: 그것은 semantics의 문제. sociology=사회학이라는 번역도 어원론적으로는 틀렸지만 오랜 논쟁을 통해 결정된 것이므로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 기존에 통용되는 번역어를 버릴 수는 없고, 현실적으로 혼용할 수밖에 없음. 앞으로 들여오는 말에 대해 그런 고민의 과정을 거치는 것엔 대찬성.

구대열: 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해야 한다는 요즘 추세는, 이를 생략하자는 것. 생각 자체를 막음.

김봉진: 로고스중심주의의 한계에 대한 비판론이 나오는 작금의 현실과 양선생님 책에서 말하는 ‘로고스’와의 관련성은?

양승태: 하버마스, 리오타르 등을 위시한 linguistic turn에서 언어이해는 지나치게 기호학적. 울림, 음성, 목소리로서의 언어를 도외시함.

최정운: 언어 자체의 생명력, 경험성이라는 문제.
    
양승태: 로고스=언어인데, ‘지나친 로고스중심주의’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음. 현대에 들어 언어 자체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구조주의 철학에서는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경시함.

최정운: 하지만, 언어기호가 인간을 구조적으로 구속하고 억압하는 것은 엄연한 사회현실.

양승태: 그것은 이미 소피스트 시절부터 지적되었음. 새로울 것 없음. 한 사회는 언어를 통해 구조화되는데, 그 자체가 틀린 것 아니며 하나의 현상일 뿐, 언어 자체가 고착화를 기본으로 성립. 텍스트 중심주의, 텍스트 중독까지도 인간의 삶의 부분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야 함.

김봉진: 이기상 선생님의 우리말 철학하기 운동. 제도권 학자들이 경시하는  사상,  철학에 대한 양선생님의 견해는?

양승태: 말의 단순한 기의, 가 아니라 그 기의 속에 내포된 우리 민족의 사물에 대한 이해를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함. 실증적 연구 및 실증적 연구의 심화를 요함.

김봉진: 마지막으로 한가지. 양선생님 책에서 변증법 이야기하시는데, ‘음양론’ 속의 상생-상극이 더 낫지 않을지?

양승태: 변증법이라는 말 속에 이미 상생-상극이 다 들어 있음.

김봉진: 변증법이라고 하면, 상극-상호대립의 의미가 주?

양승태: 말로 증명한다는 ‘변증’이라는 번역어도 꽤 고심 끝의 산물. 그러나 끊임없는 교류, 새로운 종합이라는 뉘앙스는 그만 사상됨. 헤겔 비판의 핵심은 변증법을 기계화시켜 살아있는 대화의 과정을 사상시켰다는 것. 뮈토스, 라는 것은 로고스로 기호화되기 전의 울림.

최상용: 벤자민 슈월츠가 중국의 음양사상 논한 논문 보실 것.

하영선: 첫째, 양교수 책에서 그리스 철학에 대해 호메로스=천재 등장의 기적이라고 평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운명적으로 느껴짐. 우리도 조선판 호메로스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가? 운명 대신 분석적으로 접근해 주시면 감사하겠음.
둘째, 호메로스만으로 그리스 철학이 되는 것은 아니고 집단知가 필요한데, 집단지를 창출할 전략은 무엇인가? 올바른 전파 내지 번역을 호응하고 실천할 학문집단이 필요함.

양승태: 호메로스(歌人)의 작업을 통해 구술시대의 정신사가 집약, 전승. 모든 집단이 호메로스같은 인물을 가질 수 있느냐? only God knows. 어디까지나 섭리의 문제. 17-18세기 후진독일에서 괴테, 피히테, 슐레겔 등의 수많은 천재들이 출현하는 이유? 설명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은 그냥 ‘받아들여~’야 함. 궁극적으로는 운명이라는 얘기지만, 운명이나 섭리가 실현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님.
한국 학계가 왜 이 모양인가? 자기가 하고 있는 작업의 근원을 모른 채, 서양 추수하기 때문. 학자의 타락을 부추기는 사회구조가 1차적으로 문제지만, 결국 자신의 지적 헐벗음을 깨닫는 자의식, 지적 자각에 맡길 수밖에 없음.  

최정운: 희랍도 암흑기라는 것을 겪었다. 암흑기를 된통 겪으면 새로운 문명 창출의 계기가 된다는 역설적 낙관론 성립 가능.

최상용: 희랍지성사에 대한 양교수의 설명과 가장 유사한 외국 학자는 누구인가? 그런 사람을 댈 수 있어야 함. 그렇지 않으면 유아독존.

책을 처음 본 사람 입장에서는, 교육과 정치의 변증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김. 책 전체적 논지를 볼 때 부제로서 납득이 되지만, semantic consistency가 문제됨. 이를 증명할 수 있다면 대작.

양승태: 뮈토스의 세계란, 공유하는 정신활동에 다름아님. 누구나 동일하게 공동체 사고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함. 호메로스는 ‘탁월한’ 가인. 교류된 것을 독자적으로 해석해서 자기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지적 능력에 달렸음. 엘리트-대중 간의 지적 능력차. 앎이란 공유하는 것이므로, 공간적/세대적으로 확산됨. 전달, 전파되는 행위로서의 교육. 그런데 전달, 전파될 때엔 필연적으로 세계에 대한 해석이 개입됨. 이 때 인간들의 잘남의 차이가 드러남.
호메로스 <일리아드>의 근원적 긴장구조인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갈등을 예로 들어 보자. 아가멤논은 총지휘관으로서 전쟁이란 총체적 산술의 결과임을 이해하고 있는 데 반해, 아킬레우스는 개인의 용맹을 앞세우며 분노함. 서로 다른 앎/ 잘남의 개념. 이러한 일련의 역사가 희랍의 정신사-정치사-문명사. 이를 ‘변증법’이라고 표현했음.

최정운: 아가멤논은 조직론자/ 아킬레우스는 개인적 영웅주의자였다고 할 때, 아가멤논의 비극적 최후가 시사하는 희랍문명의 향방?

양승태: 아가멤논의 가장 큰 비극은, 공을 위해 사를 희생한다는 것. (딸을 죽임) 이는 통치자로서 인간의 근원적 비극.

최정운: 아가멤논은 결국 통치자로서도 끝난 것 아닌가?

김상배: 최근 인터넷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식의 생산, 소비, 교환과 관련시켜 생각하면, 대중적 차원에서 구술되고 있는 지식을 어떻게 체계화할 것인가? 네티즌이 만들어내고 있는 지식. 앎과 잘남의 개념 자체를, 개발자이자 사용자이며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네티즌들은 다르게 이해할 듯함. 탈로고스적인 대표적 현상이 인터넷에서 발생하고 있음. 호메로스같은 천재적인 존재가 아닌, 인터넷이라는 기술적 매개를 통해 만들어지는 집단지성.

양승태: 앎, 지식의 다차원성을 전제해야 함. 인류가 지닌 앎의 세계를 창조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최첨단 지식인의 임무. 그것을 공유하고 전파시키는 것은 하위 지식인들. 그와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다수의 대중. 네티즌은 이미 생산된 지식을 이용한다고 봄. 네티즌은 문자문화(텍스트)의 존재를 전제로 한 구술문화라는 점에서 호메로스와는 구별되어야 함. 네티즌의 활동양상이 어떤 영감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이를 파악하는 것도 결국 지식인들.
지성사의 근원적 문제는 도그마화, 독단화, 교조화되어 고착되기 쉽다는 데 있음.

최정운: 앎보다 잘남이 먼저 아닌가? 길가메쉬 서사시를 보면, 길가메쉬가 워낙 잘생겼음. 잘났다는 게 선행하고, 앎으로 잘남을 써포트하는 것 아닌가?

양승태: 동물행동학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원숭이 사회에도 철저한 잘남의 위계가 존재. 그러나 이러한 잘남-개체들 간의 생물학적인 질적 차이-을 의식하고, 언어화. 체계화하는 것은 인간 뿐.

최정운: ‘소피아’와 현인의 개념.

양승태: 앎을 가졌다는 것이 사회적 지위로 연결된 것이 현인. 이미 정치질서의 표현.
헤시오도스의 경우처럼 ‘총체적 앎’을 가진 자=현인. 공자도 이러한 자의식을 가졌음.
기술적 지식으로부터 자연과 사물에 대한 총체적 앎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짐으로써, 현인이라는 개념의 등장이 가능해짐.

구대열: <일리아드>도 전사(前史)와 후사(後史)가 막대한데, 최초의 서술자 호머가 어떻게 그처럼 기막힌 처음과 끝의 시기를 잡았는지 경이로움.

양승태: 작품이란 구술문화의 기계적 집합이 아님.

최정운: 미케네에도 문자가 있지 않았나?

양승태: 미케네 시절에도 문자가 있었지만, 그 기록된 내용은 대부분 장부기록에 불과.
    
최상용: 잘남에 지적, 도덕적 자원 이외에 경제적 자원도 들어가는가?

양승태: 정치적 자원의 일부로서 당연히 들어감.

강상규: 양선생님이 우리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신데, 그러한 노력은 우리 역사에 면면히 존재했다고 생각. 한글창제는 신유학이나 성리학의 기반 없이 불가능했음. 조선 시대 교육과 정치가 만난 대표적 자리인 ‘경연’이 한 예.

III. 하영선 발표
- 원고는 외교학과 하영선 교수님께 문의.
○ 90년대 초반에 반강제적으로 과의 사정에 따라 한국외교사 수업을 맡게 됨. 그 이전까지는 관심이 주로 postmodern에 있었는데 이를 더 잘 알려면 premodern을 알아야겠다는 의식.
○ 기존의 한외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판단. 우리 국사학계나 정치학계에서 가지고 있는 삼분법을 벗어나 오분법(해방론/ 원용부회론/ 양절체제론/ 자강균세론/ 국권회복론)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했음. 이 오분법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리라 예상함.
○ 국제정치‘론’으로 과거의 저술에 접근했던 것 자체가 틀렸음. 이들은 ‘論者’=armchair 국제정치학자가 아니었음. 김옥균은 삼화주의를 피로 썼음. 근대 한국국제정치 담론의 빈곤을 말하기 이전에 이들의 삶 자체를 섬세하게 읽어주어야 함.

1. 해방론(海防論)

위정척사 vs. 개화라는 기존의 이분법을 버리고 문건 자체를 시대의 문맥 안에서 읽으면 뭐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박규수와 유길준의 만남. 1873년의 가을. 19세의 나이에도 유길준의 총명함은 명성이 높았음. 박규수가 유길준에게 <해국도지>를 주었다는 것이 통설. 박규수 스스로 해국도지를 높이 평가했음을 추측케 함. then, 박규수는 해국도지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박규수는 평양감사 시절 조일수호조규에서 중심 역할. 재동 사랑방(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이 개화파의 아지트. 그러므로 흔히 개화의 선구자로 생각되어 왔음. 그러나 실제로 박규수의 초기 저작을 읽어보니 그렇지 않음.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생각해야 함. <환재집> 에 국제정치 관련 분량 많지 않음.

(1) 초기: 1848년에 조선판 해국도지(중국 원본은 1842-3년). 박규수가 윤종의, <벽위신편>에 대해 서평 쓴 것이 벽위신편에 실려 있음. 박규수를 개화론자가 아니라 해방론자로 보아야 할 근거는? 이 시대는 ‘척사론’이 주류였다는 것이 통설. 척사론은 상대를 동등하게 보지 않고 야만/동물로 봄. 그러나 해방론은 적어도 상대방을 1:1의 적으로 상정하고 적정을 잘 알고자 함. 윤종의의 글은 벽위에 관한 ‘新’편인 것을 주목해야 함. 정조 사후에 기독교 수용을 전면 금지했는데, 그러지 말고 허용해도. 궁극적으로 성리학이 이길 것이라는 주장.

(2) 중기: 1866-67년 간의 외교문서. 김윤식이 박규수의 수제자 격인데, 선생님 문집을 내면서 평하기를, “선생님은 이미 그 당시에 미국과의 수교를 원했다”고 함. 그러나 정작 박규수의 글에는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 ((발표자는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의 소수해석을 지지함))

(3) 후기: 조일수호조규 1876년 전후의 변화. 김기수가 76년 1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고. <일동기유>라는 자세한 글 남겨놓았음. 김기수가 쓴 책 뒤의 서문을 보면, 기본적으로 해방론적 입장이지만 초기의 해방론과는 다름. 박규수는 일본에 간 적은 없고 청나라에 두 번 연행하면서 영향받음. 그러나 76년 일본은 청과는 수준이 다름. <일동기유>에서 김기수는 일본의 만국공법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지 않음. 막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상대방을 알아서 이를 이용해야 한다는 뉘앙스.

2. 원용부회론: 1870년대 중반~80년대 초반
- 만국공법을 받아들이되, 문명의 표준으로서가 아니라, 이를 빌어서 서양을 관리하기 위함.
- 우리 동양에서도 당시 밀려들어온 서구근대국제정치의 원형(ex. 춘추전국시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됨.

(1) 1880~1881년이 중요한 시기
80년 김홍집 2차 수신사 방일히여 <조선책략> 받아 옴.  
81년 소위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 때가 되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짐. 공식적으로 63명+현지 통역 2명. 12명이 핵심멤버였음. 홍영식이나 어윤중 정도가 시대보다 조금 앞서가는 사고의 정형을 보이고, 나머지 10명은 전통적.  12명이 고종에서 바친 복명서가 흥미로움.
고종-개화-위정척사보다는 덜 보수적인 사람들 간의 묘한 관계.

3. 양절체제론

- 유길준은 어윤중 수행원으로 따라가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 홍영식, 어윤중보다 더 개화쪽으로 나아감.  
- ‘양절체제’라는 용어도 일본학계에서 채택한 것. 김봉진 vs. 강동국의 논쟁이 있었으나 발표자 입장에서는 싸울 필요 없다고 봄. 유길준이 양절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 아니지만, 당시 원세개와 같은 양절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 당시 청도 근대적 대외관계와 전통적 대외관계를 이중적으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조선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이를 ‘양절’이라고 함. 그러나 조선과 청의 관계에서,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자주를 보장해주는 속국자주의 전통관계가 아니라 속국종속화하는 근대적 방향으로 청의 영향력 강화. 이러한 상황에서 유길준은 80년대 이전의 관계로 몰고 가려는 묘책으로 조공독립의 양절체제를 주장한 것임. 김영작 선생님은 유길준을 naive idealist로 폄하하셨는데, 유길준은 그보다 훨씬 노회한 현실주의자 논객임. 유길준의 담론 전략과 같은 세련된 고심이 오늘날 우리 국제정치학에 있는가.

4. 자강균세론

- 서양 근대 국제정치의 기본원리.
- 1880년 김홍집이 일본 갔을 때 황준헌과 만나 필담. 황준헌, “세상이 바뀌었으므로 옛날 약으로 몸을 고치려다가는 죽는다.”고 함. 양절보다 더 나간 얘기. 직책은 하여장이 공사로 더 높았지만, 실제 문서작업은 모두 황준헌이 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당대의 문사. 그러나 김홍집은 황준헌에게 동의하지 않음. 80년에도, 균세자강을 문명표준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것.
- 임오군란 후 고종이 발표한 긴 글에서도 균세자강론은 표면화되지 않음. 결정적 계기는 1894,5년의 청일전쟁. (전쟁의 중요성. 1840년 아편전쟁, 1860년 애로우전쟁 등이 동아 정세에 가져온 변화)
- 대표적 자료는 독립신문. 독립신문의 1차적 의제는 ‘독립’, 두 번째는 ‘문명개화’, 세 번째는 ‘인민의 교육계몽’. 그러나 정책적으로 실현될 겨를 없이 다음의 국권회복론의 ‘나락’으로 떨어짐.

5. 국권회복론

- 동양평화론에 대한 단재 신채호의 비판.(대한매일신보) 전형적 저항민족주의. 모든 국가들이 국가주의에 전념하고 있는 시대에 동양주의를 말하는 것은 오류. 역으로 동양주의가 당대에 상당히 만연했음을 알 수 있음.(대한자강회, “동양평화론의 불가피성” 논설) 1차적으로는 단재의 승리. 그러나 이로써 독립신문이 제기했던 ‘독립’의 숙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국제적 차원에서 문명표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딜레마가 남는다.
- (i) 국제적 차원에서 문명표준의 충족 (ii) 독립 (iii) 국내정치세력들의 정치투쟁이 투영된 형태로 드러나는 담론의 양상을 성공적으로 품지 못한 결과로서, 당시 국제정치 담론의 빈곤함.
- 대한매일신보가 폐간되면서 15회에 걸쳐 연재된 ‘宇內대세와 한국’ 논설.

IV. 토론

김봉진: 각 담론들 간의 관계를 규명하는 문제가 남아있다고 생각. 유길준의 양절체제론 텍스트 자체를 보면, 양절체제 비판. 원세개식 내정간섭에 의해 양절 중 한쪽 절이 왜곡되었기 때문. 그 의미가 무엇일까? 예부에 보낸 자문에 보면 ‘양전(兩全)’이라는 말이 나옴. ‘양전’ 논리는 조청관계에 있어 내적으로는 자주지방이되, 외적으로는 속국임을 인정하는 논리. <국권>, <답청사조회>(여기에는 ‘有異之體制’라는 말이 나옴)에서는 양전논리 따름. 따라서 ‘양절론’이란, 대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전통관계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비판.

양승태: 수사적 차이 아닌가? 고종이나 유길준은 청국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에.

최정운: 전체적으로 비판해 보자면 매우 환원적인(deductive) 모델이다. 중화질서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것을 5분법으로 짜신 것은 논리적이지만, 5분법의 기준과 근거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하영선: 역사 사료 리딩이 더 필요하다는 점 인정.

구대열: 우리의 과거에 대해, apologetic하게 써내려가야 하는가? 라는 narrator's position 문제.

최정운: 전파가 우리에게는 frustration으로 다가오기 때문.

강상규: 해방론 부분은 좀 산만하다는 인상 받았음. 년도, 용어 재검토 필요함. 목차 및 5분법적 구성이 담론변화의 동태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함. 1880-81년이 중요한 시기인데, 정통한 연구가 많지 않음. 조사시찰단 복명 내용(“의복변화 등 일본의 서구적응은 우리에게 부적합하다.”)에 대한 고종의 반응이 반드시 보수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덧붙여, 만국공법에서 다루는 ‘주권’ 문제에 대한 언급 필요하다고 봄.

최상용: 65년 모겐소의 책-6 principles-을 보고 대실망했던 기억이 있음. 그에 비하면 하선생의 5분법 나쁘지 않음. 3,4분법으로 고착화되어 있던 기존 학계에 신선한 기여 될 수 있음. 아리스토텔레스는 “to study is to classify.”라고 말했음. 발표자는 본인의 서술방식이 전략이자 한계로서 ‘episodic’하다고 했는데, 양승태 선생이 말한 ‘신화’도 결국 에피소딕. 밀고 나가기 바람.
문제는, 당대 사람들이 노력하고 고심했음에도 외세는 강력하고 대내적으로 분열되어 실패했다는 eternal triangle. 이것은 지정학적 소국의 운명. 결국 담론주체가 권력주체가 되거나 권력주체에 영향력을 주고, 국민통합을 해서 국가 존속을 도모할 수밖에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 년 전과 지금이 동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음. 양적.질적으로 담론의 수준이 그 때보다 나으며, 그 당시에는 주자학적 fundamentalism의 유산이 너무 강고했던 데 반해 지금은 그렇지 않음. 사상의 빈곤이기도 하지만 적응력이 크다는 얘기도 됨.
맹자에 나오는 ‘사대’는 사대‘주의’와 달리 부정적 뉘앙스 없었음. ‘사대’에 대한 기능적, 현실주의적 정의는, 비대칭적 관계에서 상대적 소국이 상대적 대국에 적응하는 행위에 다름 아님. 이것을 보편화시켜야 한다고 봄. 자주/동맹 이분법이 아니라 ‘사대’에 토대를 둔 자주.

양승태: 동주 선생이, 양성지를 인용하면서 책략적 사대를 이미 논한 바 있음. 그러나 조선은 성리학 체제이기 때문에 사대가 구조화되면서 사대주의로 흐름. 정책으로서의 사대가 이념으로 고착화된 것에 대한 연구들은 존재함.

최정운: 1894년 이후의 망국 과정을 어떻게 서술해야 할지는 참 난감함.

구대열: 이 모든 배후에 ‘위정척사’가 있지 않나?

하영선: 1장을 위정척사로 써야 할지 고심했었음.

양승태: 적/동지의 구별 없는 정치학은 없음.

최정운: 단재조차도 위정척사의 연장선상이라고 봐야 함.

김봉진: 원용론과 부회론은 구별해야 한다고 봄. 그리고 양절체제론의 대립쌍은 속국자주론이라고 봄. 또 국권회복론 시절에 위정척사운동이 불같이 다시 일어나므로 이에 대비되는 ‘존화자주론’. 이런 식으로 하면 저는 9분법.

최정운: 1907년 단재는, 친일파가 이미 조직되고 난 뒤 민족주의가 들어왔다는 점을 우리 민족주의의 문제로 지적.  

노재봉: 친일, 친로, 친미 이런 말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가?

김봉진: 당시 일본 외교문서에 이미 나옴.

노재봉: 親日이라는 말보다는 向日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향일파. 그리고 ‘사대’는 당시 예의 체제에서 생존을 위한 훌륭한 외교정책이었다. 국제질서는 예나 지금이나 불평등함. 다만 만국공법이 들어오면서 주권평등이라는 형식논리를 현실로 착각한 데서 문제발생. 친일파, 사대주의라는 식으로 우리 선조, 우리 역사를 전면부정해선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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