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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옥, <개화기의 군사정책연구> (06.5.27)
 

2006-11-19 
2006년 5월 27일 전파

참석: 하영선, 양승태, 최정운, 김봉진, 전재성, 김상배, 문유미
자료: 최병옥, <개화기의 군사정책연구>(경인문화사, 2000)
주제: 전재성, “유길준의 군사사상”

- 다음달 발표는 최정운, 리쩌우허우, <중국근대사상사론>(한길사, 2005)
- 다음 전파는 6월 24일(토) 3시

I. 발표

1. 문제제기

- 서유견문의 군사부분은 둘로 나뉘어 있는데, 양 자체가 많지 않음.
이 책은 갑오개혁 이전(1888-9년 정도)까지의 군사정책 변화. 그 다음은 <대한제국의 군사제도>에 잘 나와 있음. 강상규 박사 추천서.
- 군제개편사로만 연구되어 온 조선시대 군사사상/문제를 우리 입장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개화기 군사적 패러다임이 이전 전통질서에 비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시대 군제 개괄 요함. 대원군 기점으로 패러다임 변화 추측 가능. 아편전쟁,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일련의 외적의 현실적 출현에 기인함. 서구에서도 16,7세기 군사변환이 중요한 주제.
- 국내정치적 변수, 특히 정권안보 차원에서 근대적 군대개편의 동기 발견됨. 최병옥 선생 글 보면, 고종은 중앙군 강화 내지 수도방위에 치중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일리 있음. 일반 국민들에게는 군권을 전혀 양도하려 하지 않음. 왕권강화/ 국내정치세력들 간의 다툼/ 민란 등 피지배계층 통제로 대별 가능. 국제정치적 측면에서는, 외세의 압박과 개입이 중요한데, 군사근대화를 도와주는 외세(고문관 제도)의 제국주의적 의도 지적한 양계초 글이 책 중에 거론됨.
- 개화기부터 1907년 군대해산까지 대략 40년 정도의 역사. 구체적으로 어떤 소주제를 다룰 것인가. 대부분 기존연구는 군제개편에 치중되어 있는데 왜 그런가도 흥미있는 테마. 군사전략 상의 변화, 주적이 누구였는가. 무기 변천사. 군사 재정. 충원, 조세기반 등 군사의 사회적 환경 등이 앞으로 천착되어야 할 주제들.  
- 격변상황 속에서 유길준은 과연 어떤 군사 생각하고 있었는가. 군사관련 글이 얼마나 되는가. 얼마나 심도있게 고민을 했는가. 시기별 변화? (갑오개혁 이전, 이후)

2. 개화기 군사문제의 변화 (이하 자세한 것은 발제문 참조)

(1) 조선 전기의 군사

갑사(장교에 해당)와 정병(양인, 농민). 경국대전 하 개병제 원칙. 세조 때부터 군정 문란. 돈을 주고 군역을 대신하는 ‘대립’ 성행. 전쟁 없었으므로 포를 받고 대신 돌려보냄(‘방군수포’)으로써 정부 자체도 군사보다는 조세에 신경쓰는 모습.

양반 자제들이 의무적으로 군대를 갔는가? 확인 요함.

- 최정운: ‘양반’이라고 하면 문반/무반인데, 조선시대에 실질적 ‘무반’이 있었나?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김진수 참조)

고려 때는 무반에게 세습토지를 주었는데, 조선에서는 녹봉만 줌.
기능직으로서의 성격.

- 최정운: 무반과거제도에 대한 연구는 없는가?

제승방략과 진관체제. 임진왜란 중 무력함.

(2)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 중 군제개편 착수. 1953년 훈련도감 설치, 고종 때까지 이어짐. 서울의 경비와 방위. 훈련대장은 집권세력의 권력기반.

병농분리론 대두. 직업군인제 출현. 재정부담 증가.

훈련도감의 영향. 인조반정 등 정치 영역에서 군의 역할 중요해짐. 단일기관으로서는 최대 둔전 보유.

- 양승태: 구체적으로 둔전 규모와 연 수확량, 군량미 소비량은 안 나왔는가?

오위: ‘의흥위’.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
훈련도감: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 체제 창설. 화약무기 본격화.
오군영.

(3) 대원군 시기

최병옥 선생 책은 대원군에 대한 평가 높고, 고종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 비변사 폐지, 의정부 정상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거치면서 강병책의 필요성 대두됨. 강화도에 진무영 설치, 화포군 양성, 무기 전선 제조. 대원군은 광범위한 군사개혁 단행.
  
고종 5년, 삼군부 설치. 군사최고기관.

- 최정운: 이 당시는 군사와 경찰이 구별이 안 되지요?
전재성: 그런 듯 합니다. 삼군부에서 국방과 치안 임무 총괄.

(4) 고종 친정 초기

고종의 군사개혁은 왕권강화에 초점 맞추어져 있다는 저자의 평가. 고종 수호와 궁정수비 강화 목적의 무위소 창설, 예산집중. 삼군부 유명무실화. 실질적인 수도방위사. 무위소 우대함으로써 타 군사들 불만. 전투장병 사기저하.  

별기군 설치. 별기군의 정식명칭은 ‘교련병대’. 무위소와 별개의 일본식 근대 군대. 1880년경 청의 지원을 받을까 일본의 지원을 받을까 영선사와 1.2차 수신사의 세력관계가 예민하게 다루어지고 있음. 원래는 청나라와 먼저 계약을 했는데, 조정 과정에서 김윤식이 무기는 청나라에서 받고 군사훈련은 일본에서 받기로 함. 청의 불만. 군사력 근대화라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했으나, 특권의식과 상부의 편애 등 군 내부 불화 조성. 구식군대 불만 증폭.

고종 18년 양영제.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기존의 오영을 정리함. 바로 임오군란 발발로, 큰 의미 갖지 못함. 청군에 의한 군사교육 협의되어 청군 주도의 개혁으로 급선회.

(5) 임오군란 이후

전통적 조선군, 청군에 의해 훈련된 친군좌우영, 일본 영향 하의 친군 전후영이 병존하는 3원체제.
1884년 친군 4영체제. 친위군적 성격 여전. 내부의 청/일 대립도 여전.

(6) 갑신정변 이후
(7)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기

아관파천 이후 러일 세력균형 속에서 대한제국의 독자적 군제개편 시기.
1907년 군대 해산.

3. 생각들
- 개화기 군사문제는 국내정치/국제정치 환경 양쪽의 고려 요구됨.
- 개화기 군사개혁이 왜 왜적수호가 아닌 왕권의 강화와 궁성수비 쪽으로 갔는가?
(i) 재정부족 (ii) 피지배층의 반란 (iii) 군사근대화를 빌미로 군제개편에 간섭하려 한 외세의 영향력
- 양계초의 논의처럼, 외세는 조선의 군사근대화를 빌미로 식민지화를 추구하였음. 외세의 군사원조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
- 대원군과 고종의 군사개혁에 대한 평가
- 군제개편 이외의 군사개혁(전략, 무기개량, 군수산업 육성, 재정확보, 전국적 군영체제의 개편 등)에 대한 조선의 상대적 무관심을 어떻게 설명?
- 유길준의 군사사상.

II. 토론

최정운: 전체 군대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전재성: “1896년에 전국 13개 지역에 약 3천명의 지방대 보유”.

최정운: 을미사변 때 경복궁 수비대가 몇 명이나 되었는지?
김봉진: 1895년, 궁정수비대 780명+수도 방위대 440명+지방대 2900.

전재성: 개화기에는 군제 변화가 심해서 오히려 조선시대보다 군대 수가 줄어든 형편.

하영선: 청일전쟁 병력수가 1500 대 300에 불과했음에도, 조선은 끼지도 못했으니.

김봉진: 삼군부에 포도대장이 속해있었던 것은 오히려 예외이고, 치안경찰력(감영의 포졸들)은 따로 있지 않았겠는가.

양승태: 소속체계가 확인되어야 함.

하영선: 이태진 선생 <한국군제사> 통계 보면, 1862년 중앙/지방군 총 10만 5800명. 그런데 실제병력은 3만 7800명이며 나머지는 허수라고 보고 있음.

문유미: 통계 잡는 방법에 문제있는 것 아닌가. 제가 본 평안도 지역의 경우 군인들이 꽤 있음.

하영선: 그걸 그대로 믿으면 안 됨. 허수. 다산 시를 보면, 삼정 문란 지적하면서 통계의 허황성 신랄 비판.

문유미: 제가 본 통계는 실제 쌀을 지급한 사실에 대한 통계. 최근 연구결과 보면, 19세기 전반까지 국가에 의한 기민(饑民)구제가 상당부분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함.

하영선: 다산 <민보의>가 1812년. 19세기 초반 대표적 저술. 1876년 한일-한미조약 때 활약한 신헌은 고종 초기의 대표적 군인인데, 일찍이 1866년 병인양요 후 상소. 군사에 관한 책을 내라는 명을 받고 <민보집설> 간행. 이는 태반이 <민보의> 답습한 것. 다산은 <민보의>에서 통계는 사기이며, 지방군은 병력이 제로에 가깝다, 그러므로 유사시 병력확보를 위해서 일종의 민방위 제도 창설 주장. 이렇게 볼 때, 3만도 많다고 봄. 중앙군은 정치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었고, 지방은 삼정문란 때문에 19세기 초에 거의 작동하기 어려웠음. 그러므로 통계에만 의지할 수 없음. 대원군 집권기인 1867년 <민보집설>에서 대표적 무기로 4개 듦. 똥포, 재 뿌리는 것, 옻 옮기는 것, 뜨거운 물 끼얹기. 일본, 청과의 싸움을 염두에 두고 <민보의>에서 다산이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 이양선 출현 시작된 것이 1830년대이고, 병인양요 치르고 나서 대원군이 하도 급해서 책을 찍으라고 하니 전국책을 다 모아보니, 그나마 다산 책이 제일 나아서 7,80% 베낌. 이처럼 외세의 침입에 전근대적 무기체제로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위기의식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대응방식으로는 낙제.

문유미: 근대국가체제로서 상비군의 외적방어능력과 그에 대한 체계적 사고의 부족은 인정하나, 실제 군인들은 존재했음.

하영선: 다산의 컨텍스트를 살펴보자. 홍경래의 난 등 내우외환 속에서 숫자를 불려서 빼주고 대신 돈받기 위해 장부조작에 전심전력하는 당대 현실에 대한 개탄. 그리하여 군사적으로는 민보의 저술, 경제적으론 여전제 주장. 일종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접합. 완전 militia도 아니고 완전 정규군도 아닌 중간적 봉합.

문유미: 홍경래 난은 관군에 의해 매우 잔인하게 진압됨. 국가가 어느 정도의 군사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반증 아닌가.

하영선: 홍경래 진영 자체도 군사적으로 약했을 것. 1860년대는 완전 다른 무기체계의 작동을 요구하는 상황인데, 여전히 똥포 수준이라니.

최정운: 그래도 프랑스, 미국 무찌른 건 우리가 유일. 병인양요, 신미양요 때는 정규군 끌고 내려갔나?

양승태: 강화도 때는 정규군. 기록에 따르면 포수들도 동원.

하영선: 그러나 결국 운양호 때 일본에 의해 박살.

전재성: 대원군 때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군사정책이 고종 때 깨어졌다는 의미?

하영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 대원군도 체계적 대응으로서는 형편없음. 1872년 말 연행사절이 북경 다녀온 뒤에도, 대원군은 예의지방 논함. 이에 비해 박규수는 1873년 서양도 예의지방이라는 전혀 다른 랭귀지 구사. 조일수호조규 때쯤 되면 똥포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주도적으로 자리잡음. 이동인을 위시하여 개화팀이 일본 뛰어간 양대 의제가 군사 문제/ 돈 문제. 돈의 일차적 용도 또한 군사력 증강에 있었음. 60년대와 70년대 군사관은 질적으로 변화.

문유미: 이 시기 각종 잡세 때문에 문제가 많았는데, 갑오개혁 때 고종이 이를 일정 부분 개혁. 그런데 광무개혁 때는 황실 재정 확보 위해 말을 뒤집음. 조세수익을 대장원 등 황실재정에 충당하는 대신 군사비로 돌렸다면?

하영선: 제국주의적 경쟁시대의 마지막 수단은 결국 폭력. 왜 폭력적 저항 수단을 마련해지 못했는가가 19세기의 핵심 질문임. 그런 의미에서 1860년대 대원군의 손을 들어줄 수 없음. 1870년대 중반부터는 전통적 군사체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 시작. 79년 이동인, 81년 신사유람단과 영선사가 일본과 청 양쪽으로 간 가장 큰 이유도 군사 시스템을 보러 간 것. 80년대 초반이 되면 부국강병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돈이 문제다라는 싸움이 걸림.

최정운: 제 가설은, 우리나라 유생들이 부국강병으로 요약되는 근대화 의제에 엄청나게 반대함으로써 개혁이 불가능했다는 것.

하영선: 김윤식 등도 강병을 위해서는 부국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 그 싸움 와중에 1881년과 1882년에 근대 군대가 부분적으로 창설.

문유미: 기록을 보면 그 시기 평안도에서 연강세 등 잡세에 대한 저항이 극심했음. 이 세금을 군사로 이전했다면 어느 정도 재정마련 가능했을 텐데, 왜 고종은 이것을 혁파하자고 했는가? 이와 관련 박규수 등 개화파의 생각은?

하영선: 부국강병에 돈이 있어야 한다는 데 국내정치 싸움 걸려있었음. 이것이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의 의제 아니었나.

최정운: ‘부국강병’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덫이 있음. 서양의 경우 의제의 우선순위는 강병->부국. 그런데 주자학적 논리에 따르면, 강병은 패도이고, 부국은 가렴주구를 막음으로써가능해지는 것. 세금을 올리는 것은 왕도가 아니라서 또한 안 됨. 일진회의 경우 독립신문 시기에 대두된 민권, 재산보호 사상하고 맞물려 잡세혁파하자고 주장. 군사 재정 확보는 중요한 게 아니다.

하영선: ‘부강’이라는 용어는 근대 이전에도 있었음. 다산도 사용. 그러나 이것은 근대적 부국강병과는 다른 개념. 문제는 그렇다면, 일본은 어떻게 부국강병에 성공할 수 있었나? 68년 메이지유신부터 계산하면 40년만에 세계적 수준의 군사력 확보. 그에 비해 우리는 군사력 부문에서 거의 무(無)의 상태가 됨. 왜?

문유미: 메이지 전공자들의 주된 논의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대외적 위기의식, 생존위협의식이 매우 컸다는 문화적 설명.

하영선: 우리도 임오군란, 갑신정변 가면 폭력 없인 안 되겠다는 뼈저린 실감이 있지 않았겠는가.

최정운: 유생들의 엄청난 저항. 대원군-화서 갈등이 경복궁 중건 문제에서부터 바로 걸림.
서원 철폐도 재정문제에 대한 갈등과 직접 연계.

양승태: 대원군은 외척 진압을 통한 왕정강화를 군사문제보다 우선함.

최정운: 전통적 정치 사고.

김봉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안 하고 군사개혁 들어갔어도, 근대적 군사개혁을 추진할 수는 없었을 것.

최정운: 병인-신미 양요 때 만약 졌다면 오히려 군사력 증강의 계기가 되었을 수도 있음.

김봉진: 병인-신미양요도 상처 뿐인 승리. 우리 쪽 피해 컸음.

양승태: 유길준이 다산 군제개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고, 역사 흐름 속에서 의제 우선순위를 어떻게 보았는가 밝혀주어야.

하영선: 전재성 교수 주제는 최정운 교수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됨. 나이브한 리버럴리스트, 라는 김영작 선생 가설대로 유길준이 객관적 현실 인식능력 떨어졌다고 하면, 결론은 간단. 그러나 전략적 사고 패턴으로 재구성하자고 들면, 매우 복잡.

유길준 논의 중심은 대외관계에서의 양절론, 국내적으로는 군신관계. 대원군 집권의 60년대 상황과, 고종이 친정하는 70년대부터 83,4년까지의 기간은 질적으로 다르다. 80년대 초반이면 개화팀은 알 거 다 아는 상황. 85,6년 김옥균이 일본에서 쓴 단편적인 글에서도 매우 급진적인 현실주의가 드러나는데, 왜 유길준은 이 시점에서 이렇게 글을 썼는가?

양절, 군민공치도 말 못할 사정이 있다면, 군사는 더더욱 쓰기 어렵지 않았겠는가. 고종 자신도, 미국이나 러시아, 일본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최후의 노력 기울이고 있었음. 안경수 등을 몰래 파견하는 데에서도 보이듯, 군사문제 포기하지 않았음.  

문유미: 청나라를 의식했기 때문?

하영선: 일본도, 뭐 그리 흔쾌히 도와주고 싶었겠는가.

최정운: 청일전쟁 목격하고, 일본군대가 동학군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군사 근대화의 중요성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됨.

김봉진: 실패의 원인은 역시 국제정치적 요인이 컸다고 봄. 청나라 원세개가 하는 말인즉, 군사력은 우리에게 맡기고 너희는 절대 증강하지 말아라. 그러므로 밀사 형태로 백방노력. 이동인에게도 군함, 무기 사오라고 했다가 실패. 김옥균, 박영효 계속 말함.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로 무위로 돌아감.

일본은 확실히 부국보다 강병 우선. 군인 처우가 각별하였음.

양승태: 부국하려면 양반 계층에 세금 많이 걷어야 하고, 그걸 추진하려면 정치개혁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러기는 불가능.

김봉진: 갑신정변 이후부터 갑오개혁까지 고종은 실권 없었음. 원세개 뿐 아니라 국내정치세력으로부터도 급진개화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감시 견제 대상. 밀사 보내고, 러시아 쪽에도 군사교관 요청. 미국은 무시.

하영선: 전재성 교수 논문 주제가 ‘유길준의 군사사상’으로 되어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 유길준에게는 군사사상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고 할 것인가. (국내에 이 주제로 발표된 논문은 없음) 그렇다고, 내가 금광맥을 찾았다, 는 논문을 쓸 것인가. 둘 다 쓸 수 없음. 유길준을 1880년의 시대적 상황을 일정하게 대변하는 한 사람으로 볼 때, 6,70년대와 90년대 사이의 80년대 상황에서, 복잡한 심정으로 인해 쓸 수 없었던 것을 복원한다면. 글에 드러난 것만으로 추정해서 쓰면 매우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양승태: 유길준이 진짜 깊이있는 개화 사상가였다면, 군사 문제에 대한 진지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드러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영선: 윤치호가, 유길준이 6인방으로 날뛸 때, "He is clever."라고 비꼬는데. 갑신정변 실패하고, 갑오개혁 때 다시 복권된 유길준이, 폭력이나 군사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주의할 필요 있음. 1890년대 후반과 1900년대 후반의 유길준.

김봉진: 유길준이 미국 보빙사 따라갔을 때 인터뷰한 기사. 미국에 대한 인상이, 미국은 정규군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소수의 민병조직을 가지고 있음에 깊은 감명 받았다고 함. 더불어, 미국에서 무엇을 가장 가지고 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교육제도라고 대답. 복잡한 함의를 느낌. 그럼에도, 어쨌든 급진개화파들 사이에서 군사의 중요성은 모두 공유하는 인식이었을 것.

문유미: 최병옥 선생의 책 중요. 고종은 개화파 영향 받았음. 72년도 친정체제로 이행하면서 제일 먼저 한 것이, 대원군이 전통 사고 내에서 실용적으로 하려던 군사제도 혁파. 고종과 개화파 관계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82.84년으로 가면, 임오군란 실패 후 청의 압력으로 공개적으로 강병할 수 없는 여건 내에서, 개화의 의제 중 무엇에 초점을 두고 정치적으로 실현하려고 했는가. 그 속에서 군사문제의 위치는?

김봉진: 박영효는 그 사이 시기에 지방 가서 나름 군대도 키움. 군사 관심 매우 컸음.

문유미: 그렇다면 스팬이 너무 짧았다. 84년 갑신정변이 그동안 키운 군대를 아예 망가뜨릴 정도로 실패했다면, 개화파 의식 스팬이 너무 짧았다.

하영선: 갑신정변의 핵심문제는 국내적 정권확보.

문유미: 갑오개혁에서 개화파가 전면에 대두, 정책 제시. 그런데 그 이후의 고종은 대원군 식으로 재정집중 왕권강화, 정치적으로는 개화파에서 멀어짐. 그렇다면 고종이 갖게 된 황제권 중심의 개혁방식 아이디어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개화파와의 관계는?

군사 부분을 다루긴 다루되, 개화파 전체를 이해하면서 그 일부로서 군사문제를 접근해야 할 듯.

하영선: 1885년 유길준의 <중립론>. 전체적으로는 국제정치적으로 리버럴리스트인 듯 보임. 그러나 “나라와 나라 사이가 힘이 대등한 관계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딱 한구절이 의외로 중요함. 85년에는 이미 강권정치적 현실주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 그렇다면 그에 대한 대응논리를 어떻게 전개하고 있는가.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논변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살아남은 개화파들의 말하는 방법.

또 하나는, 시기구분 문제와 어디까지 쓸 것인가 문제. 94년 이후로 가면, 독립신문 등의 정세판단에서 폭력, 군사문제에 세력균형에 대한 기대가 짙음. 삼국간섭 때문. 그러나 바로 10년 후 우리는 일본에 먹힘. 90년대 개화론자들이 바깥에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을 국제정치를 국제사회론적으로 본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기 어려움.

문유미: 외교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상당히 성공적이었음. 적은 군사력으로 효과적 왕조 유지. 엘리트 계층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연속성 상에서 중립론 등의 사고가 전개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시대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탈근대적 시각에서는 재평가할 부분.

최정운: 일본이 군사력 없으면 끝, 이라고 말했던 데 비해, 한국은 이승만에 이르기까지 ‘외교주의’ 계속 시도. 현실주의의 발로로 파악해 주어야 함. 독립신문의 논변도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 문명개화 되어서 서양사람들 인정받으면 일정한 안보가 보장된다는 것.

문유미: 근대성이 전통과 양분되지 않고 연계되는 측면.

최정운: 이 문제와 관련, 기존의 모든 논의가 군제개편에 대한 서술로 일관할 뿐, 실제 전투력이 어땠는가-무기, 훈련, 전술, 전략-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빠져 있음. 군사문제에 접근하는 유교적 방식 때문에 실록에 남아있는 군사관련사항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 아닌가.

하영선: 오늘날 탈냉전 군사 변환과도 동떨어진 얘기 아님.  미국이 전통적 동맹체제에서 탈피, 유동군 개념으로 전환했음을 아무리 말해도 ‘작전권 환수 자주국방’ 논의에서 벗어나지 못함. 21세기의 대원군 사고나 마찬가지. 미국, 일본과 비교, 우리 국방예산 적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음. 그렇다면 어떤 안보전략을 세워야겠는가?

문유미: 이 책이 나름대로는 유용한 것이, 자료를 보면서, 대원군에서 고종으로 이행하는 시기의 ‘공치제’를 언급. 고종을 계몽군주로 보는 강상규 박사 시각과는 배치됨. 또 하나는, 전-후군, 좌-우영이 친청/친일의 정치색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외세가 얼마나 내부에 거점을 확보하고 침입하고 있었는가, 개화진영은 이를 얼마나 인식하고 대응했는가. 별로 몰랐던 것은 아닌가 등의 질문을 던지게 됨. 새로운 사실들이 많았음.

전재성: 논점을 정리해보자면, 첫째, 근대국가의 시스템의 결과로서의 강병. 군제변화나 재정확보같은 행태적 수준이 아닌, 시스템 변화가 언제 오는지의 문제. 유길준이 썼던 군사 내용도 그 부분에선 기존 것과 꽤 다른 것이 발견됨. 장교 교육 문제라든지, 프러시아 국가 근대화를 상세히 논하면서 군사력의 경제적 기반, 조직적 양성 문제를 거론. 대원군의 전근대적 강병책과 차별화되는 개화파 군사관. 둘째, 유길준이 직접 쓰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갑오개혁 당시 군제변화를 통해서 이전 개화파의 복안 재구성하는 방법. 94년 이후 유길준의 사상을 이전 박영효가 남긴 글들과의 비교 연계 속에서.

최정운: 유길준의 개화 방략 핵심은, 만국공법을 대대적으로 찍어서 배포하겠다는 것.


문유미: 공법 매뉴얼을 해관 관료들에게 대대적으로 배포. 비록 나라가 망했지만, 공법에 나온 근대 국제정치관을 깊이 받아들이고, 폭력과 군사에 대한 부분을 상대화시켜 받아들인 것이 매우 한국적인 무엇.

하영선: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 만국공법 연구 1세대가, 만국공법의 수용 문제를 밝혔다면, 만국공법의 국제정치적 의미와 한국측의 변용을 연구 2세대가 밝혀야 함. 마틴의 만국공법 번역은 서양세력의 침입 때문에 서양을 알기 위한 노력. 유길준도 만국공법에 집중한 것이, 세상이 공법적으로 돌아간다고 나이브하게 믿었던 게 아니라, 저들과의 대결에서 적어도 만국공법을 일정한 논거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던 것.

최정운: 서유견문 보면, 유길준 왈, “권리는 자연의 것이고, 세는 인위적인 것이다.” 법적인 문제를 자연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파악.

하영선: 문장은 있는데, 그 두 개의 역학관계에 대한 유길준의 생각은 달랐다고 봄. 의(義) 론과 세(勢)론 사이에서 유길준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가.

최정운: 세는 일시적인 것이고, 결국 의가 이길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조선인민들에게 독립 의식 고취시킨 것.

하영선: 나는 이중적이라고 봄.
이승만 <독립정신>은 <서유견문>과 사실 굉장히 비슷.

최정운: 이승만은 리얼리스트.

김봉진: 만국공법이나 권리 개념에 호소함으로써 약자로서의 논변 전개. 폭력이나 강병 필요하다, 는 인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내세울 수 없음. 자기모순.

최정운: 유길준도 미국 유학 후 돌아와서 한 얘기는 결국 국민교육. 이 세대의 문제의식.

하영선, 김봉진, 최정운: <유길준과 일본>, <박영효와 일본> 연구 필요.

문유미: 엘리트 계층으로서 개화파의 사회적 파급력 측정 필요.

최정운: 1920년대까지 동학군은 완전 반도(叛徒).

김봉진: 개화파의 경우 국내 보수파만 누르겠다는 생각 뿐 아니라, 외세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강력한 리더쉽을 갈망.

최정운: 개화파와 민중세력이 최초로 merge된 것이, 독립협회 잔당과 동학 잔당이 합류된 일진회라고도 할 수 있음.

김봉진: 3.1운동이, 동학/위정척사/개화 구분 없이 하나로 만난 최초의 사건.

문유미: 개화파가 결국 나라도 망했고 정권탈취에도 실패했지만, 노론 전통의 완고한 주자학 의식을 혁파했다는 점에서는 정치적으로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 후에 유생들도 만국공법 많이 받아들임.

양승태: 그것이 과연 개화파의 공로인가 아니면 현실의 교훈인가는 생각할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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