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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 Schmid, 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
 

2006-07-10 
2006년 4월 15일 전파

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김봉진, 정용화, 배영자, 손열, 전재성, 김상배, 문유미
발제: 문유미, Andre Schmid, 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

I. 문유미 박사 발표

- 배후에 베네딕트 앤더슨의, 근대민족이 근대의 산물인데 왜 역사적으로 오래된 antiquity의 관점에서 상상되는가? 라는 질문을 깔고 있음. 시공간 개념의 등장. 공간적으로 민족 제한, 시간적으로 진보라는 문제. 민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문제를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라는 세 차원을 한국민족주의 등장에 있어 짚어봄. 한국 민족주의의 구체성을 탐구하는 것이 책의 주요 목적. 앤더슨처럼, 그 과정에서 인쇄매체의 중요성 역시 부각됨.

● 책의 내용

Introduction.

- 1895년에서 합방까지의 15년간 민족주의 담론과 지구화 담론이 서로 상호작용한 시기로서, 민족주의 담론은 지구화 담론을 촉진시킨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엘리트들이 그에 통합되어가는 하나의 표지로 인식. 식민주의 담론을 지구화 담론의 한 형태로 파악, 민족주의 담론은 지구화 담론은 식민주의 담론에 의해 조건 지워지며 그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 앤더슨이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고 지적하면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는데 반해, 슈미드는 민족을 이해하는 민족주의의 특정한 논리가 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성과 지구화 경향 속에서 민족국가 및 민족구성원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규정한다고 보는 채터지(Partha Chatterjee)의 입장을 따른다.
식민주의 담론과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떤 계기들에서 만나는가,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어떤 전략 채택, 그들이 직면한 딜레마는 무엇이었는가.

- 방법론적으로는 1895년 이후 발간된 신문과 잡지, 개인적 저작들에 나타난 담론과 언어를 분석함으로써 이 시기를 한국 민족주의가 형성된 역사적 시기로 인식한다.

1. The Universalizing Winds of Civilization

1895년 이후의 시기 발간된 인쇄 매체들은 한국의 상황을 위기이자 내우외환의 시기로 인식하지만, 러일전쟁 이전의 시기까지 아주 소수의 한국인만이 이 위기가 일본에 의한 주권의 상실로 귀결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을 러시아보다 더 위협적이라거나 보호국이 곧 현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쇄 매체들의 주된 새로운 메시지는 “문명개화”였다. 문명개화의 역사적 진화에서 한국이 어느 정도의 스케일에 놓여있는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었는가가 당시 매체들의 주요 논리. 황성신문 등 분석하면서, 서양에 대해 한국 주권을 옹호하고 러일갈등에서 일본 지지하는 정치적 입장, 그러나 민족주의로는 가지 않음, 동양/동아를 하나의 담론적 중간지대로 설정하고, 1895년 이후 일본정치에 대한 비판을 황성신문에서 시도함.

2. Decentering the Middle Kingdom 믕 Realigning the East

서양에 대해 한국의 주권을 옹호하고 러일의 갈등 속에서 일본의 지지. 황성신문의 편집자들은 동 혹은 동양을 당시의 정치적 스펙트럼 내에서 중간지대로 설정하면서 1905년 이후 일본의 정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함. 그러나 취약함. 중국의 중심적 위치를 재조정하고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재규정하고자 하는 노력. 이 과정에서 황성신문은 동양을 인종적으로 재정의.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와 새롭게 재규정된 동양에서 일본의 리더쉽을 인정. 그러나 1905년 보호국 설치 이후 황성신문은 동양의 단결과 일본의 행위 사이의 괴리를 지적하면서 비판.

- 보호국의 정치상황 하에서 친일과 민족주의라는 양자 사이에서 황성신문의 범아시아주의 혹은 동양평화라는 담론은 유지되기 어려움. 동양은 문명개화라는 담론을 보편화하고 동양을 중국으로부터 분화시켜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범아시아주의로 규정함. 그러나 일본 식민주의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 동양이라는 중간지대는 적실성을 상실하게 됨.

3장. Engaging a Civilizing Japan.

- 한국 민족주의와 일본 식민주의는 정치적 목표에 있어서는 대립 그러나 그들의 담론과 개념적 어휘는 서로 공유됨. 이런 언어 혹은 어휘의 공통성 속에서 한국민족주의자와 일본식민주의자들이 한국 문화를 재현해내는 방식은 매우 유사하면서 상호 수렴됨. 결국 이런 상호수렴성 내에서 민족주의의 고유의 의미가 유지되거나 명확해지기 어려움. 식민주의 담론에 지속적으로 감염됨.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개화와 진보라는 전제에 기반한 근대지식이 식민화를 촉진한다는 딜레마에 빠짐.(양반과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 민족주의자들은 식민화 논리에 직간접적으로 전유되지 않을 수 있는 담론전략의 필요성 요구.

4장. Spirit, History, and Legitimacy
5장. Narrating the Ethnic Nation

- 한국민족주의자들의 새로운 담론 전략은 ‘민족’이라는 신조어의 차용과 ‘단군’ 신화를 민족의 기원으로 설정하는 신채호에 의해 ‘문명-개화’ 담론에 대한 대안적 언술 확보. 1900년 1월 12, 황성신문에 민족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당시 민족은 사회진화론적 영향 속에서 동아시아 인종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 이후 점차 이런 인종적 개념은 사라지고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지칭하기 시작.(1907) 보호국의 시작 이후 민족이라는 개념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

- 신채호-독사신론에서 민족을 역사적으로 형성된 ethnic entity로 정의. 민족을 중심에 두지 않은 역사를 역사로 인정하지 않음. 단군을 역사적 기원으로 두고 역사를 단군을 시조로 하는 부계적 혈통에 기반한 민족의 계보로 전화시킴. 민족간의 경쟁에서 ‘진보’적 역사관이 한민족의 현상태에 적실치 않음. 사회진화론적 관점에 기반하여 역사를 민족 간의 생존경쟁으로 봄으로써 ‘문명개화론’의 딜레마로부터 이탈. 민족과 국가를 분리시킴.

6. Peninsular Boundaries

- 국가와 분리된 민족 개념은 영토주권의 개념을 직접적으로 문제삼지 않음. 그럼으로 인해 민족의 영토를 규정하는 다양한 담론을 산출해냄. 중국과의 현실적인 국경이 일본 식민지 하에서 확정되어 영토적 경계가 한반도로 한정됨에도 불구하고, 시조단군의 발상지로서 백두산의 상징적 중요성, 그에 대한 관할권, 그리고 민족의 활동지로서 만주에 대한 관할권의 문제를 계속 상정하게 함으로써, 민족의 영토가 한반도로 한정되는 것을 문제시함.

7. Beyond the Peninsular

- 혈통에 기반하고 영토적 한계왁 결부되지 않은 민족 관념은 민족 외부로 이주한 집단을 민족 혹은 민족사의 일부로 지속적으로 포함시키는 담론을 형성. 만주에 대한 수복 요구. 식민지 시기 해외동포 속에서 민족의 혼, ‘국수’를 더 잘 보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등의 문제로 연결. 해외 독립운동자들이 민족주의 운동에서 지속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논리 제공.

● 책에 대한 평가

- 민족주의의 구체적 내용, 민족주의가 단순히 근대적으로 형성된 상상의 공동체 뿐 아니라 어떤 구체성을 가지고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그 이전의 민족주의의 정치적 방향, 사고양식, 행동, 전략에 있어 차이를 노정하게 된다. 민족주의의 정치적 퍼텐셜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음.

-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 채터지가 말하는 민족주의 형성과정에서 말하는 이론을 원용하는데, 채터지의 이론은 인도 민족주의 형성과정에서 식민주의 담론에 오염되지 않은 문화적 고유성의 창출 논함. 그러나 결국 그것이 민족주의적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민족국가의 형성논리로 귀결되었음을 지적하면서, 민족주의를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레종데타)로서 비판하는 포스트콜로니얼적 비판을 가함. 저항적 민족주의 또한 식민국가로부터 유출된 논리에 다름 아니라는 것. 근대적 담론으로 전유되지 않는 담론의 영역에서 포스트 콜로니얼 시대의 정치적 가능성을 찾으려 함. 비근대적인 민족 문화 긍정하는 채터지의 입장. 그런데 슈미드는 민족주의에 대해 채터지의 입장과는 차이를 보임. 민족국가 이념에 대한 구체적 비판도 아니고, 고유 담론에서 근대성을 넘어서는 문화적 내용을 찾는 것도 아닌, 그 중간 단계에서 오락가락. 이 사람의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 이 시기의 역사를 채터지의 이론을 적용하여 재구성했다는 점 말고, 지성사의 새로운 측면이 밝혀진 바 있는가? 새로운 지성사를 형성하고 있는가?
- 식민주의 담론에 전유되지 않는 담론 형태로서 신채호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문명개화 담론이 애초에 가졌던 긴장을 잃지 않으면서 개화, 진보, 근대성에 계속 기반을 두려 하는 민족주의는 실제로 전적으로 식민주의에 의해 전유되는가? 근대성의 한계 내에서 민족주의 담론은 식민주의 담론에 전유(appropriate, co-opt)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II. 지정토론

(1) 정용화

- 이 책이 나오자마자, 연세대 해외한국학 평론에서 서평모임이 있었음. (유영익 선생 좌장)
- 1919년까지라고 제목을 두었으나, 주로 다루고 있는 시기는 1910년까지. 그 의미는?
- 책 표지의 그림은 유길준의 <노동야학독본>의 한 대목. 그림이 상징하는 바는 당시의 새로운 민족, 시민 개념. 민족적 아이덴티티의 교육과 형성.

- (이하 전체 내용은 The Review of Korean Studies Abroad 4 토론문 참조)
- 슈미드 책에 대한 문제제기. 첫째, 한국의 민족주의나 일본의 식민주의가 발생계통상 쌍생아적이며, 따라서 일본의 식민주의가 극복되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족주의도 결국 극복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서구 중심의 근대적 인식체계 자체와 근대 서구문명 자체에 대한 비판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비서구의 비정상성만을 문제 삼은 서구적 편견의 재생산에 동참하는 것. 둘째, 근대의 민족적 자아인식은 대 서구인식, 대 중국인식, 대 일본인식의 복합적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대 서구인식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문명개화와 애국계몽사상이 문화론에 치우쳐 정치적 배경을 충분히 분석하고 있지 않은 점이 아쉽다.

- 한국의 민족주의의 형성을 다루면서 민족주의의 과잉을 비판. 한국 민족주의를 청일전쟁 전후에 형성되었다고 보지만, 중국과의 영토문제는 이미 17세기부터 계속되었다고 지적. 그렇다면, 근대적 영토관념의 기원은? 제가 보기에는 명청교체기부터 근대적 민족 의식 형성. 조선에서는 소중화사상. 중국 중심의 중화관념에서 이탈, 각자 자신을 중심으로 내세움. 일본에서는 국학. 월남에서는 大남 사상. 단군에 대한 논의는 1907년부터 보이지만, 단군 이론은 탈중화사상의 계기로 제기되었음. 기자조선에 대한 대응논리. 또하나 민족주의와 관련 중요한 개념은 ‘국수’. 슈미드는 문명개화론의 딜레마로부터 이탈되어 나오면서 국수 개념이 나왔다고 보는데, 오히려 그 속에 있다고 해야 함. 동학, 의화단의 난, 신채호 국수 개념의 공통성은 이미 서구문화가 한참 수용된 후에 나왔음. 근대화의 맥락 속에서, 보편성을 염두에 두면서 나온 특수함의 주장.

(2) 문유미

- 슈미드가 한국의 민족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는지 잘 모르겠음.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구체적 내용은 이렇다, 매우 flexible하며 정치적 생존 가능성 있다, 라고 하고 있음. Carter Eckert 같은 경우 민족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만, 슈미드의 입장은 분명치 않음.

- 문화론에 치우쳐서 정치적 함의를 충분히 분석하고 있지 않다? 각각의 단계에서 특정한 형태의 내용을 가진 민족주의를 분석함으로써, 어떤 정치적 기능을 했는가에 오히려 초점을 강하게 둔 분석으로 읽었음.

- 영토인식 문제에 있어서는, 슈미드가 콜롬비아에서 공부했으므로 하부쉬(Jahyun Kim Haboush)도 잘 알고, 17-18세기 예송논쟁, 소중화사상 등을 잘 알고 있음. 전근대 담론과 근대 담론의 연결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나,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전략은 달라졌으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주의와는 또 다른 담론이 1895년 이후에 형성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음. 물론, 시기별 담론의 연결 양상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입장.  

3. 토의

정용화: 전근대적 민족주의적 요소와 근대 민족주의적 요소의 연속성과 단절, 혹은 결합 양상. 민족주의가 근대 시기의 인위적 형성물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 논의가 주류 논의인데, 근대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의 내재적 형성 과정에 보다 주목해야 함.

구대열: 근대, 전근대를 떠나서 나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의 출발로 이해할 수 있음. 정치적으로 민족주의. 이태리의 경우 통일 직전에 카부르 등이 신문 운동한 것과도 매우 유사.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조선은 조선이다, 라는 의식은 항상 있었음. 문화적으로 정당화하려는 노력도 계속 있었음. 1895-1905년 사이에 얼마든지 꺼내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양승태: 민족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지적은 일리가 있으나, 국가를 포함한 모든 정치사회적 제도들이 결국에서는 관념적으로 상정된 것.

문유미: 17-8세기 소중화사상, 예송논쟁에 나타난 내셔널 아이덴티티,라고 하면, 우리가 유교문명의 담지자이며 계승자라는 의식이 예라는 구체적 내용으로 나타난 것을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상정하였고, 그것은 전통국가의 정치논리와 상응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나타난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주장은 그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전통국가의 정치논리는 내셔널 아이덴티의 표현을 제약하며 명백한 한계가 있다. 신채호적 관념에 와서야 국가 영역을 벗어나 해외 이주민까지 nation에 포괄시키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전개될 수 있었고, 그 점이 근대적 내셔널리즘의 잠재력이자 위험성이었다.

양승태: 국가적 위기 시에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의식과 노력은 언제나 상존했으며, 그런 점에서 19세기의 이런저런 현상들에서 ‘민족주의’가 발명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연속성. 슈미드는 우리 내부의 정신적 모색, 동태적 긴장을 놓치는 측면 있음.    

문유미: 지배/피지배 계층을 포괄하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전통 시대부터 있었다는 것? 한국의 민족적 정체성, 민족주의가 자본주의 근대성 속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양승태: 맹아는 항상 있는 것. 필요성에 의해 이념화. 지식인과 인쇄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함.

배영자: 네이션, 이라는 말은 수입된 것인가?

문유미: 문명개화론 단계의 민족론과 황성신문의 동양담론이 중요. 일본 식민주의 담론과 매우 수렴되는 사고체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화에서 탈중화하면서, 이것을 한민족이라고 말하지 않고 황인종 공동체로서 말하고, 그 속에서 일본의 리더쉽을 말한다면. 그러나 이것 또한 민족적 정체성의 한 표현임에 분명함.

양승태: 민족의 경계를 어디에 설정하는가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서양의 기독교 공동체의 관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 해체되는가를 보아도.

하영선: 동주 논의의 반복일 수도 있는데, 민족과 민족주의의 구별. 우암 송시열의 담론과 단재의 담론을 다르게 볼 수 있는가? 소중화는 멸청인 동시에 숭명사상 포함. 근대적 관점에서 숭명을 포함한 멸청은 내셔널리스틱하다고 볼 수 없음. 그러나 소중화를 종속으로 비판하는 것은 당대의 컨텍스트에 적절하지 않음. 소중화론 당시에 종족적 구분의식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나, 숭명이 뭐냐? 그 때의 명은 바로 문명에 다름아님. 청은 문명이 아니기 때문에 멸해도 되지만, 문명에 소속되는 하위 단위로서 우리 종족은 부끄럽지 않아야 함. nation consciousness와 내셔널리즘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중화사상을 내셔널리즘으로 보려면, 숭명이 있어서는 안됨. 문명으로서는 중국과 같이 가고 싶어하고, 그 안의 족(族)으로서의 야만인 청은 멸하고자 함. 다산이 연행사 가는 친구에게, 우리가 문명으로 가기 위해 청나라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작금에 연행사 간다고 희희낙락하는 게 말이 되냐, 고 질타한 유명한 편지가 있음. 국가와 국가로서의 구별의식 분명히 보임. 그런데, 다산의 시를 보면, 나는 다시 태어나면 중국에 태어나고 싶다고 함. 그러고도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은 것이 바로 당시의 이중적 논리.

그렇다면 19세기에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범아시아주의는 역설적으로는 소중화 발상과 비슷한 일면을 가짐. 한-중-일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문명의 구심이 있다면, 그것과 나누는 것을 덜 부끄럽게 생각. 그런데 단재의 내셔널리즘은 내셔널 컨셔스니스와 다름을 분명히 밝히고, 피-역사-문화 같이 한다고 반드시 민족주의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에 선행되는 가치체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 우암의 논의에는 숭명이 들어있기 때문에 민족주의 될 수 없음. 위정척사 쪽으로 연결되는 논리.

슈미드는, 제국들 사이에서 단재적으로 드러난 민족주의 모습을 보여준 점에서 일정 기여. 그렇다면 동양평화론자들은 뭐냐? 소중화 때 가지고 있던 이중적 딜레마. 바보라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소중화 때 그 시대를 극복하려고 했던 우암의 발상과 비슷한 양면성 가짐. 문명의 담지자이자 침략자로서 일본의 두 얼굴에 대한 긴장과 갈등.

그런데 한국에 서양적 의미의 내셔널리즘이 전개된 양상을 잘 정리했다는 것 외에, 새로운 게 뭐냐? 슈미드의 이야기가 정말 재밌냐? 생각도 못한 충격이 팍팍 느껴졌냐? 그렇진 않다. 상징적 실수가 있으니, p.202. 장지연 생몰연대가 정약용 생몰연대로 잘못 표기되어 있음. 좋은 교과서이나 감동이 없다. 한국학 하는 사람 중 한국어를 가장 잘 하는 인물이라는 인상은 받았음. 그런데, 유길준에 대해서 쓴 부분은 이광린 선생의 논지를 답습. 독립신문, 유길준, 신채호 등의 내재적 고민까지 못 들어갔다는 인상. 서구 내셔널리즘 자체가 민족주의적 요소와 국민주의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음. among이 아니라 between empires라고 한 것으로 봐서, 청과 일본 양제국을 상정한 듯 한데, 청일전쟁 시점이 되면 이미 청은 제국으로서는 끝난 것 아닌가. ‘양’ 제국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청은 하강, 일본은 부상하는 제국이었음. 그런데 왜 단재는 몰락하는 제국의 지식인인 양계초의 영향을 적극적으로 채택했을까? 거기에 단재의 핵심적 고민이 있을 수 있음. 슈미드는 단재를 논할 때 양계초의 영향은 겨우 한 페이지 논함. 슈미드는 커밍스 이후 주목할 만한 한국학 연구자임에 분명하나, 내재적 고민의 깊이는 아쉬움.

문유미: 하버드의 영역 간행된 한국자료들(통감부 연례보고)은 다분히 식민지 근대화론적 논지를 띰. 그런데 슈미드는 그 부분을 매우 세련되게 지적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음. 민족주의는 식민주의 담론의 파생물, 이라는 채터지의 post-colonial 논리를 상당히 수용하면서도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절충적이면서도 애매모호한 태도. 전근대적인 한국의 담론(17-18세기 영토성, 소중화, 한글)과 근대적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를 무지 고민하다가 취하게 된 봉합적 태도가 아닌가 함.

김봉진: 앤더슨의 상상적 공동체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의 기원에 있어서 pre-modernist vs. modernist 논쟁. 앤소니 스미스는 이에 nation 대신 ethnie를 생각하자라고 주장. 슈미드도 스미스의 논지를 공유하는 것 아닌가. 정용화 박사 토론문에서 언급한 홉스봄의 ‘invention’ 개념에는 이미 내가 주장하는 전통과 근대의 이중교배 관념이 들어가 있음. 창조가 아님.  슈미드도 그러한 절충론자.

문유미: 여하튼, 한국인들의 실제적 생각들을 통해 민족적 관념과 민족주의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보여주지는 못함. raw data로서 황성신문만은 부족하고, 황성신문 자체도 교조적으로 읽는 듯. 단재의 논의는 헤겔 독일철학의 논리를 따르는데, 비서구 민족주의의 한 전형이기도 함. 슈미드의 접근방식이, 이제까지 사상가나 한 주의를 중심으로 논하는 기존의 방식과 차별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점이 무엇일까.

김봉진: 치밀한 개념사적 연구가 밑받침되어야 하고, 민족주의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의 측면에서는 미진하다.

양승태: 서양 것을 받아들일 때에는 그에 대한 우리 입장에서의 평가가 필수적. 예를 들어, 진정한 민족주의는 오히려 일본과의 결합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식의 민족주의 이념도 상정 가능하다. 구한말 민족주의의 이해를 위해서는, 이전에 오랫동안 잠재해 있던 심성이 어떤 지식인들을 계기로 드러나는지 동태적으로 파악해야 함. 비단 이 시기의 표면적 현상에 서구 이론을 적용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

김봉진: 한국 민족 관념과 민족주의에 전통적 기원이 없으며 전적으로 근대적 고안물이라는 것이 서구의 통설. ‘네이션’의 개념 규정이 관건. 민족주의의 기원보다는 ‘기반’을 물어야 함.

문유미: 콜롬비아의 하부쉬는 혜경궁 홍씨, 영조, 예송논쟁을 논문에서 다룬 바 있음. 한국의 혈연중심 내셔널리즘은 영토와 국가를 분리. 슈미드의 논의는, 그 이전 시기와의 연속성을 설명하지 않으면, 민족주의 담론이 식민주의 담론에 종속된다는 함정에서 벗어나기 힘듦.

구대열: 이러한 논의가, 당시 절실한 의미를 가지는가?

문유미: 민족주의적 동원이라는 측면에서. 공동체와 주권을 정당화하는 논리.

김봉진: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연속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라고 하면 자본주의 맹아론과 유사하게 내셔널리즘 맹아론 비슷하게 근대주의에 함몰될 위험이 있지 않을지?

문유미: 내셔널 아이덴티티가 근대 이전에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저는 아직 입장이 없습니다만, 내셔널리즘의 오리진으로서 존재 유무를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존재 양상과 인식 형태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나와야만 한다는 것. 의병일변도의 기존 내셔널리즘 이해가 가진 한계. 하바드 사람들, 한양대 임지현 교수 등이 언급하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쌀을 나눠주니 기층민의 지지가 있었다거나, 노비들이 왕궁을 습격한 등의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제 논문인 일진회 문제도 마찬가지고. 황사영 백서 사건의 경우에도 프랑스 측과 적극적으로 내통하는 양상 드러냄. 네이션을 적극적으로 배반하는 이러한 인물들과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신채호 이전에는 내셔널리즘이 헤게모니를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함. 내셔널리즘이 헤게모니를 잡아가는 과정의 chronology.

구대열: 첫째, between과 among은 겸용하므로, 제목의 empires에는 서구 제국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봄. 둘째, 왜 황성신문인가? 당시 황성신문의 구체적 위상에 대한 자리매김 없이 자료를 인용하는 문제. 민족주의 논설은 대한매일신보에도 보임. 셋째, 차머스 존슨의 중국 연구에 따르면 30년대의 중국 내셔널리즘은 peasant interest가 훗날의 national intersest와 일치한 것에 다름아님. 그렇다면, 내셔널리즘이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해체하고, 진정 이 시대에 한국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문유미: 담론의 유착과 갈등으로 이 시대를 보려는 슈미드와 같은 연구자가 한계 내에서 어떤 자료들을 보아야 하는가는 고민해 볼 문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당면한 최대과제가 무엇이었겠는가. 일진회의 경우도 국가 보전이 목적이 아님. 인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존을 목표로 내세움. 일진회는 대중적 통제 노선인 데 반해, 일본은 국가 통제를 분명히 하고 대중동원을 억압함. 내셔널리즘을 만들고 보유하고 확산시키는 계층은 엘리트 집단. 비엘리트 계층에게는 자신들의 문제가 따로 있었고, 그것이 반드시 내셔널리즘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음.

양승태: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된 담론 활동과 그 정합성 및 파급력의 정도를 논해 주어야 하고, 그를 통해 이전 시기의 지적 자원이 어떻게 부인되거나 이용되었는가를 밝혀 주어야 함.

정용화: 윤치호의 일본제국 내 조선민족의 위치. 동양의 스코틀랜드.

문유미: 슈미드는 윤치호가 문명개화와 진보를 지향한 나머지 민족주의로서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봄. 그리고 신채호로 넘어감. 그러나 과연 그 방법밖에는 없는가? 친일하지 않으면서도 개화와 근대를 지향하면서 신채호적으로 후퇴하지 않을 대안은 없는가? 민족주의 담론은 언제 식민주의 담론에 흡수될 수밖에 없는가? 그렇다는 것이 차터지와 슈미드의 입장. 다음으로, 슈미드 책에서 인용한 유길준 책의 대목에 따르면,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의 계몽적 동원에 대해 피지배층은 순종적. 그러나 실제 일진회의 사례를 보면 그렇지 않음.

정용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지개략> 마지막 부분을 보면, 문명개화의 목적은 일본의 독립. 다음으로 ‘동양’ 개념. 동문동종. 천하 개념에서 개별 네이션 개념으로 가는 중간 단계로 파악. ‘동양’ 개념에 좌절하고 배신당하면서 ‘민족’ 개념이 부상하는 것.

구대열: ‘동양’ 개념은 전형적으로 개별적 이익을 위해 집단을 내세운 사례.

정용화: 김옥균의 삼화주의. 동양평화론의 한국식 원조. 김옥균의 목표는 탈중화와 서세동점속에서의 생존. 혼자서는 안 되므로 삼화주의 주장. 그런데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되고 중국이 반식민지 상태가 된 1930년대에는 다시 친중 주장.

하영선: 이동인이나 박영효, 김옥균은 일본 방문시 일본의 흥아회에 참석했었음. 청의 주일외교관이었던 하여장과 황준헌은 흥아회에 대해 본국에 보고하면서, 일본의 사기라고 판단함. 다자안보체제는 사기이고 일본은 일국 중심 체제이다. 그러나 한국의 개화팀들은 흥아회를 방문하여 관심을 보였음. 갑신정변이후 김옥균은 일본의 흑심을 간파한 중국쪽 시각을 다분히 반영하고 있음. 그런데 94년의 김옥균의 삼화론은 무엇인가. 이홍장과의 동양평화 위한 담판을 하러 상하이에 간다고? 지금 우리가 6자회담을 통해 북핵문제가 과연 해결될 수 있을까 설왕설래하지만. 김옥균이 암살된 여관의 이름도 아이러니하게 동화(東和)양행.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조선의 일부 백성으로부터 좋은 호응을 받고 명군이 잔혹행위로 지탄받았다는 것과 같은, 주류 해석과는 배치되는 이견(異見)들이 역사 속에 무수히 존재함. 그렇다면 이것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내러티브는 어떻게 가능한가. 19세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어떻게 읽을 것인지, 굉장히 조심스럽다.    

문유미: 하부쉬 같은 경우, 예송 논쟁 등을 통해 근대 이전 시기에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함. 그러나 예송 논쟁은 전근대 왕정 내 정당성에 대한 논의이지, 그것이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파악될 수 있는지는 의문.

하영선: 내셔널 아이덴티티라기보다는 문명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 그것을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읽는 것은 소중화를 매우 서구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유럽의 double identity와 비슷. 청은 문명에서 배제됨.

김봉진: 민족주의가 식민주의에 흡수될 수밖에 없느냐는 문유미 박사의 질문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의 양면성-자유민주/ 지배폭력 양쪽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모두 사용 가능-을 지적하고 싶음.

문유미: 채터지 논의. 채터지는 민족주의가 식민주의에 흡수되는 측면을 지적하면서, 네이션의 내부의 분열을 논함. 여성, 소수자 등등.

하영선: 중국의 천하론도 유사 이래의 최대 사기였는지 모름. 일본의 동양평화론은 그에 비하면 궁색한 사기. 중국이 사기를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도 그 사기에 상당 부분 동참함으로써 천하질서를 유지한 반면, 일본의 동양평화론(식민지 근대화론-문명개화론)은 매우 일국중심적이라서, 상대적으로 조선으로선 흡수될/결합할 여지가 오히려 적었다.

정용화: 신채호가 1910년대에 ‘동등적 모방’과 ‘동화적 모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조선의 현실을 후자로 비판.

문유미: 이 책을 식민지 근대성 비판을 위한 징검다리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식민지 근대성론을 강화하는 징검다리로 볼 수 있는가는 상당히 애매한 문제인데, 토론 끝에 저의 생각은 아무래도 강화하는 쪽이 된다는 것. 근대로 이행하는 개화의 내용과 식민지 담론의 차이가 marginal하며 따라서 co-opt되는 측면을 강조하고, 국수나 혼과 같은 매우 제한적인 담론 차원에서만 이탈이 가능하다면, 자본주의 근대에 대한 전반적 비판 이론은 될 수 있을 지언정, 그 하위체제인 식민지 근대에 대한 민감성은 약하다고 하겠음.

구대열: 자생적 근대, 자본주의의 길이라는 것이 사회전체의 방향성과 함께 가야 하는데, 우리나라만 외세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그리스에서도,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있었음. 외부의 아무런 간섭이 없었을 때 자본이 축적되자 중국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기득권 강화에 사용되었음. 타율이든 자율이든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산업화 과정의 부정적 현상을, 유독 식민지 한국에서는 일본이라는 변수로 인해 악으로 취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문유미: 일본이 서구화되면서 일본적 전통이 서구화되지 않은 잔여물로 인정됨. 서구에서는 일본적 근대성 형성의 경로로 천황제를 봐줌. 우리 근대화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틀로 파악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근대화의 과정과 결과의 특성을 논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슈미드가 군데군데 고민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식민지 근대성을 논하는 하버드 스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손열: 나지타(Tetsuo Najita) 선생의 전언에 따르면, 찰스 암스트롱은 전형적 시카고 역사학파 전통에 따라 이론이 강함. 안드레 슈미드는 이론 부분은 약한 반면 실증적 연구가 인상 깊었음. 결국 안드레 슈미드가 상을 타고, 토론토로 감. 오늘 책을 읽어보니, 슈미드가 매우 자세하게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결국은 차터지의 이론틀이 관통하고 있음.

문유미: 차터지가 그람시의 수동혁명 passive-revolution의 사례로 간디를 다루고 있음. 네루디안 내셔널리즘. 슈미드는 신채호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간디 내셔널리즘이라고 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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