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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2006-07-10 
2006년 3월 4일(토) 전파모임

장소: 세계정치연구소
참석: 하영선, 최정운, 구대열, 양승태, 김봉진, 전재성, 김상배, 강상규, 문유미, 마상윤
발표: 강상규박사-고종과 유길준: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조재곤, 푸른역사, 2005)


1. 강상규 박사 발표

- 저자 조재곤 박사는 61년생. 국민대학에서 학부-박사. 친일진상규명위원회 소속. 홍종우에 대한 관심은 90년대 초반부터 계속되었음. 박사논문은 보부상에 대한 것(홍종우에 대한 관심과 이어짐)으로 모 학술상을 수상.

- 김옥균에 대한 기존연구가 많은 반면, 홍종우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전무함. 이 책 자체는 대중서로 기획되어 소설적 구성을 가지고 있으나, 학술적 의미가 없지 않음.

- 본 저서에 대한 발제자의 전체적인 소감: 19세기 후반의 조선정치사는 흔히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로의 필연적인 발전과정의 한 단계로서 규정되어 왔다. 따라서 진보 vs. 수구라는 이항대립적 틀에 기반하여 근대적인 선각자로서의 이미지를 갖는 이른바 ‘개화파’를 중심으로 이 시기의 정치사를 서술하려는 지적 성향이 광범위하게 공유되어 온 것은 그만큼 불가피한 측면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동안 김옥균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있어왔으나, 그를 살해한 홍종우에 대한 논의가 거의 전무한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옥균이 추구했던 개혁의지와 방법론을 어떻게 평가하든, 개화의 선각자임에 틀림이 없는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라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그를 전체적으로 새롭게 재조명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적인 모험이자 버거운 학문적 작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가 홍종우에 대한 관심을 15년 이상 지속한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재곤의 저작이 갖는 기본적인 미덕은 19세기의 전환기적 상황을 살았던 김옥균과 홍종우라는 문제적 두 인물을, <개화의 선각자> vs. <출세에 눈먼 수구세력 내지 무뇌아>라는 기존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넘어서, ‘정치적 인간’으로 착실하게 접근해갔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동안 수구세력이자 무식한 암살범으로 이해되던 인물을 ‘관념’이라는 변수와 당대의 정치적 역학관계라는 측면에 주목하여 구체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19세기라는 거대한 전환의 과정을 겪었던 한반도의 정치적 지형도를 보다 중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하려고 하고 있다.

- 이하 책의 내용 요약은 발제문 참조.

- 4장: 김옥균 암살 사건은 조선.청국.일본 모두에게 외교상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일본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준비하던 터에, 김옥균이 암살되자 이를 청일전쟁의 명분으로 삼고자 했다. 즉, 암살의 배후에는 청국의 최고실력자 리홍장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김옥균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는 조선정부에 모종의 조치를 취해줄 것을 주장했다. 요컨대 조선정부가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김옥균 암살을 조종함으로써 일본을 욕되게 하였으며, 일본의 치안을 방해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일본의 방조 없이 김옥균이 청국으로 떠날 수 있었을까. 김옥균을 수차례 유폐시키면서까지 그의 행동을 감시하던 일본정부가 정작 김옥균의 청국행을 몰랐을 리 없다. 이는 1894년 1월 31일, 홍콩 주재 일본영사가 일본의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김옥균 암살계획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조선침략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은 김옥균을 상징화하고 대중조작에 이용했다. 게다가 일부 지식인들도 그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하여 식민지 말기에 이르러서는 아시아 지배와 조선 민중의 통제 명분을 김옥균이 주창한 삼화주의에서 찾게 된다. 일본보다 김옥균을 더 왜곡시킨 사람들은 그를 통해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조선의 친일 협력자들이었다. 그들은 김옥균을 동아시아의 선각자,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혁명가로 규정하고 그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목으로 친일행각에 앞장섰다.

김옥균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그러나 김옥균을 단순히 친일 협력자로 단정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김옥균이 개화지상주의에 함몰되어 일본의 침략본질을 꿰뚫지 못한 한계는 있었으나 초기 개화운동에서는 그 순수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초기운동까지 모조리 매도하는 것은 올바른 관점이 아니다. 김옥균에 대한 ‘선악이분법’적인 극단적 평가보다는 당시의 국내와 세계정세를 염두에 두어야 객관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 8장: 김옥균과 홍종우는 모두 조선의 근대화를 절실히 원했다. 그러나 김옥균 등이 근대화 개혁에서 소농, 소상공인을 철저히 외면한 반면, 홍종우는 이들이 제휴의 대상이라는 점을 적지않게 인식하고 있었다.....그는 이 시기 풀어야 할 시급한 과제로 황실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군주절대체제를 구축해 자주적인 근대화를 달성하는 것을 설정했다. 김옥균과 달리 홍종우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이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외국으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외부의 압력을 극복하면서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 저자의 시각에 대한 발표자의 의문: 저자의 조선 왕권에 대한 이해가 의문시된다. 저자 조재곤은 고종이 초기에 정치적으로 무능력했다는 입장임. 사실상 1880년대 이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고종에 대한 시각이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음. 그러나 저자는 조선의 군주제에 대해 생리적인 거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저자의 이러한 거부감이 당시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예컨대 윤웅렬이 지적한 바 있는 ‘갑신정변의 실패요인 여섯 가지’에 대한 평가에서 드러나고 있다. “윤웅렬의 평가는 1과 5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객관적인 입장을 언급한 것”이라는 대목(pp.51-52)(갑신정변은 왕과 왕비를 힘으로 억압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은, 당대인들의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은 비정치적 해석이라는 느낌.

- 187,80년대 조선의 기록에는 왕권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은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전통적 정치구조 및 당대 민간 사회의 왕실에 대한 인식을 연구할 필요가 크다. 

2. 토론

김봉진: 1870년대-1910년대까지 1차자료에 고종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다는 것은?

강상규: 예컨대,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읽으면, 민간의 소문에 대한 언급이 많고, 왕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편중된 시각이 드러난다.

김봉진: <한국통사>나 <매천야록>은 기록의 성격상, 고종에 대한 이야기가 소문 중심이 될 수밖에 없음. 고종이 중심이 되는 다른 자료들을 수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문유미: 고종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이 왕 중심의 기록.

강상규: 제 박사논문의 중요 문제의식은, 대한제국 시기 연구에 있어 왕 고종이 왜 등한시되었는가? 라는 것. 하나의 대답은, 사료를 보아도, 고종의 역할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 then, 당시 왕권에 대한 인식, 왕의 이미지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는가를 염두에 두고 텍스트에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음.

구대열: 고종과 조선 정부 전체의 견해 차이가 없을 때는, ‘조정의 견해’로 통일되게 나타나는데, 조정 내부에 의견충돌들이 생김으로써 군왕의 레버리지가 커질 때 고종의 역할이 부각되는 것 아닌가.

양승태: 왕이 부각되는 것은, 정국을 주도할 때. 그런데 고종이 그럴만한 인물이었는지?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에 나오는 홍길동 친위대만 해도, 낮은 계층 출신들.

최정운: 홍종우가 보부상 운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부분이 흥미로움. 보부상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대중 동원(mass movilization). 이 과정에서 홍종우의 역할이 궁금함. 조재곤 박사논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강상규: 보부상과 황국협회는 부패한 왕실 권력에 기생하여 개화세력을 탄압한 수구세력이었다, 는 독립협회측 시각에 대하여, 조재곤은 보부상의 조직과 활동을 실증적으로 접근하여 규명하고, 그와 함께 독립협회에 대한 역사적 평가 또한 복합적으로 수정.

최정운: 홍종우가 황국협회를 만들었는가?

강상규: 보부상 조직은 기존에 있었는데, 황국협회를 만드는 데에는 홍종우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

구대열: 최인호의 <상도>라는 소설을 보면, 보부상들은 지역별 조직을 가지고 있었음.

양승태: 전통적으로 보부상은 상단의 하부말단조직이었는데, 이 시기에 들어와 전통적 유통방식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

최정운: 보부상에는 동학 출신 인사들도 있었음. 홍종우가 볼테르를 좋아했다는 점도 흥미로운 것이, 홍종우가 프랑스의 민중조직+동학+보부상을 합쳐 정치적으로 동원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근대적 mass politics의 시초라는 점에서 중대한 함의를 지니게 됨.

김봉진: 본격적 연구는 되지 못했지만, 보부상에 착안한 것은 중요. 독립협회 중심 일변도의 사관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음. 홍종우는 하원 설립 주장. 독립협회는 하원설립에 반대. 반드시 독립협회=민주주의, 라고 볼 수 없음. 보부상은 갑신정변 때도 관여. 보부상과 일진회의 관계는?

문유미: 1905년 이후 보부상 활동에 대한 조재곤 박사 논문을 두 편 읽었음. 이 시기에 들어 보부상 단체들(공진회, 황국협회)은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기존에 독립협회에 테러한 것을 반성하며 개화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힘. 다분히 친일적 뉘앙스. 이에 대해 조재곤 박사는 기회주의적이라 비판. 공진회는 보부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윤효정 등을 중심으로 친일적 성향을 보이면서 일진회와 충돌. 보부상 반수(반장)는 지방행정조직의 경찰조직과 연계하여 일진회를 탄압함. 고종이 실각하면서 보부상은 유명무실해지고 일진회가 부각됨.

보부상의 정치화, 는 커다란 주제이긴 한데, 이미 대원군 때부터 활동.
대중조직으로서 독립협회-황국협회-일진회의 차이는, 보부상 자체는 행동력이 탁월했으나,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나 활동 면에서는 유보적임.

김봉진: 1905-6년이 되면, 독립협회 출신 다수자가 일진회 친일로 전향하는 반면, 흥미롭게도 보부상 출신들은 반일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보이지 않는가. 보부상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 내지 계몽이론가는 없을까.

하영선: 리딩 방식을 좀 달리 해야 하지 않나 싶다. 고종과 유길준의 만남을 논문으로 쓰려고 할 때, 특정시기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전체 모습을 그릴 것인가. 논문의 핵심은, 보부상은 아닐테고, 고종과 유길준 사이 친화/갈등/애증의 열쇠는 개화의 스펙트럼상 두 사람의 위치의 차이 아니겠는가.

이 책을 강상규 박사가 골랐다고 했을 때, 내가 예상한 발표는, 친고종적 입장에서 김옥균을 비판하고 홍종우를 띄우는 것. 그런데, 오늘 발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음. 홍종우를 넓은 의미에서 자주적 개화로 보고, 김옥균을 외세적 개화로 볼 때, 고종을 어디에 둘 것인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개화의 스펙트럼이 강상규 박사 논문의 핵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강상규: 전체 시기를 쓰려고 생각하고 있음. 이 책은, 명성황후나 대원군 이외의 인물을 비교적 긴 호흡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호감을 느꼈음. 그러나 역시 고종은 빠져있다는 점이 아쉬움. 187,80년대 고종을 보지 않고 당시 정치를 논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음. 이것은, 조선 왕권의 행사 방식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작업을 요함.

하영선: 왜 고종과 유길준은 주기적으로 애증이 엇갈렸는가? 변수 1. 고종의 왕권. 변수 2. 조선의 개화. 이 두 개의 변수가 착종되는 모습을 설명해 주기 바람.

김상배: 고종 개인을 넘어서서, 고종과 친위세력(의 변화)의 집단적 성향을 시기별로 살펴보는 것이 의미 있겠음.

양승태: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은 민비 시해 후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고종에게 접근하여 출세하려는 권력적 요인이 가장 큼.

문유미: 조재곤 박사는 결론에서 김옥균 vs. 홍종우를 세계주의 vs. 국가주의의 대립이라고 보았는데, 책에서는 증명하지 못했음. 애초에, 홍종우가 김옥균을 죽인 이유가 김옥균의 삼화주의 때문이었다고 하면, 후일 황국협회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체, 김옥균이나 유길준이나, 이 시기의 개혁주의자들이 모두 왕을 끼고 일을 진행시키는 진의가 무엇인가.

양승태: 조선조 후기 왕권체제의 정치공간은 권력이 군주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 구조적 한계.

하영선: 1894년, 유길준을 비롯한 재야 6인이 갑자기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오는데, 그것을 일본의 영향력이라고 파악할 것인가, 고종의 선택이라고 볼 것인가? 김옥균 암살지령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유길준이 등용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강상규: 상징권력으로서의 왕권과 실질권력으로서의 왕권 문제가 존재한다고 봄. 19세기에는 왕이 신료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정책을 주도적으로 집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 그런 의미에서 친위기구로서 통리기무아문이 중요해짐. 고종은 갑신정변 일어나기 전, 민영익과 김옥균 양쪽의 의견을 신중하게 조율하고 있었음. 임오군란. 갑신정변 이후 군사권 상실하고 유명무실한 군주로 세월을 보낸 뒤, 대한제국 수립한 까닭은 왕의 정책결정력이 약한 전통적 정치구조에 대한 개변 의지.

김봉진: 고종 친정체제로 들어간 것이 1864년. 그러나 정국을 전혀 주도하지 못하다가 80년대 통리기무아문 통해 부상. 임오군란, 갑신정변 이후 94년 청일전쟁까지는 뒤에서 암약하는 명목상 군주로 후퇴. (홍종우, 안경수.....) 고종 개인의 자질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문제였다는 점에서는 강상규 박사 의견에 동의.
1894년은, 유길준 6인방 뿐 아니라 고종도 컴백한 해.  고종 자신도 대원군의 영향력 아래 돌아올 수 있었음.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1897년 환궁하여 대한제국 건설함으로써, 1880년대 초 통리기무아문 이래 처음으로 다시 고종이 주도권을 잡음. 고종 자신도 권력의 부침이 있었음. 

구대열: 고종이 개화파을 중용한다고 해도, 개화 그 자체가 고종의 목적이었는지 회의적임. 언제나 유보적이고 균형을 잡으려 함. personality 연구에서 항상 거론되는 문제인데, 중요한 것은 결단력. 역사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시기는 존재하지 않음. 과연 고종이 그러한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는가?
 
문유미: 제가 고종을 읽기로는, 첫째, 광무개혁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조선에서 왕권이 신권과 갈등하면서 왕이 채택해야 했던 전술들-당쟁을 부추기고 그 상황에서 왕의 레버리지 파워를 강화시킨, Palais 논의-을 전형적으로 사용한 왕이 아닌가 싶음. 둘째, 당시 조선에, 군주 차원에서 비전과 과감성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했다면 성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고 봄. 그런데, 고종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음.

최정운: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판단은, 이미 갑신정변 때 내려졌음. 강령 1조가 대원군의 환국. 위기를 돌파할 정치지도자로서 고종은 부족하다는 것.

강상규: 김옥균이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해서 고종에게 올린 지운영 상소를 보면, 청에서 대원군을 데려올 것을 건의. 지금쯤은 대원군도 어느 정도 머리가 깨었을 테니, 실권을 주되, 잘못하는 것은 고종이 옆에서 시정하라고 함.

대원군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 카리스마 이전에, 역설적으로 그가 왕이 아니었기 때문임. 때맞춰 오페르트 도굴 사건 등에 의해 대중적 지지를 획득.

구대열: 그 이전에 삼정이 문란했기 때문이 아닌가.

강상규: 병인양요 이전에는 대원군이 실권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함. 고종이 개항 이후에도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대원군이 상대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은 ‘조선의 왕’이었고, 대원군은 아니었던 때문이다.   

3. 책에 대한 총평

- 제목에서 말한, 홍종우의 김옥균 암살 이유, 가 이 책에서 ‘새롭게’ 규명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통설(권력과 구복을 위함)을 재확인시켜준다는 인상. 김옥균의 삼화주의에 반대한 민족주의적 동기가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 약함.

- 홍종우의 황국협회 관련 활동은, mass movilization이라는 19세기 유럽 정치의 인스피레이션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중요. 착안은 좋지만, 깊이 있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음.

최정운: 1890년대 후반부터 조선은 거의 내란 상태. 독립협회 해산부터 러일전쟁까지 소위 잃어버린 10년, 역사의 공백. 이 사이 벌어진 각종 class의 이념과 이익 투쟁이 제대로 조명된 예가 없다.

하영선: 정치사회세력 분석/ 왕권 분석/ 외세 분석이 균형감각을 갖춘 논의가 젊은 연구세대들한테서 나와줘야 할 때이다. 19세기는 전형적으로 내란의 시대일 뿐 아니라 외란의 시대였기 때문에, 계급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최정운: 서재필의 독립협회는 미국에서 수입한 것, 홍종우는 프랑스 수입..... 전파적 시각에서 보아도 이 시기는 흥미진진한 혼란의 도가니.

구대열: 잃어버린 10년, lost decade, 는 서양 사람들이 한 말. 1894-1904년까지. 기회가 있었는데 잡지 못했다는 비난.
mass movilization 문제는 우리 근대사의 중차대한 테마. 10년 전 쓴 논문(“제국주의와 언론: 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에서 처음 문제의식 가짐. 이태리 통일에서 착안. 왜 일본이 우리나라 계몽운동을 압살하지 못했는가. 의병운동에 전계층이 총망라하여 참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mass movilization과 social communication 이론만으로도 설명 가능.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 이전. 중국에 대해서는 차머스 존슨이 쓴 시기.

문유미: 대중동원이 일본의 경우와 우리 경우는 완전히 다름. 정치학적으로 매우 중요한데,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언어능력과 시간이 워낙 방대함.

최정운: 민족주의 문제도 연동됨. 민족주의 언어가 처음 등장하는 때가 대원군 시기. “이천만 겨레” 등이 대원군 시절 신재효 노래에 등장. 홍종우는 자원보고 등 chauvinist 적 이야기를 꽤 함. 단재 등 민족주의 담론과 연계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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