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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연구논문 주제발표(문유미, 강상규, 김상배, 전재성, 최정운, 하영선)
 

2006-07-10 
2005년 10월 29일 전파연구모임

장소: 세계정치연구소
참석: 하영선, 최정운, 전재성, 김상배, 구대열, 양승태, 강상규, 문유미

0. 하영선 선생님 여는 말씀

- 전파모임 10년.
- 전파연구의 젊은 세대 중심 체제로의 변화.
- 내년초 유길준(서유견문) 다시읽기 단행본 출간을 구체적 목표로.

1. 문유미 - “유길준의 국가, 정체 및 군권에 대한 관념과 그 변화”

국가/군권에 대한 제언이 중첩적으로 드러나면서 혼란스러운 부분 있음. 이것을 유길준이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가.

유길준의 <세계대세론>이 매우 급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음. 그래서 후쿠자와 <문명론지개략>을 다시 읽음. 후쿠자와는 국체와 정체를 분리해서 사고. 황통-만세일계와 군주정이 문명과 같이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다는 애매모호한 이야기. 1875년 출간 당시 유길준과 김옥균도 읽었을 가능성 높음.

1880년대 초반 세계대세론에서는 유럽에서 정치체제의 개혁과 ‘자유’의 긍정이 세계대세를 바꾼 핵심적 계기였다고 보고 있는 듯 하다. 세계대세론에 나타난 이 인식은 후쿠자와의 다른 저작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고방식인가?

김옥균의 <갑신일록>은, 임금을 자기편으로 확보하는 일을 중시하면서, 민씨 문중을 명백한 정치적 적대자로서 바라봄. 이 때 군주는, ‘국체’와 연관된 존재가 아니며, 개화세력의 정치일정을 위해 이용하거나 제한해야 하는 존재. 조선왕조의 전통적 군권/신권에 대한 관념과 정치관행이 개화세력의 정치의식과 맞물리면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

세계대세론에서 보이는 유길준의 정치의식은 <서유견문> 단계에 와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가 아니면 보수화되고 있는가.

서유견문 앞/뒤에 나타나는 개화파의 저작과 서유견문을 비교연구하고자 한다. 갑오개혁에서 “군민공치”라는 절충적 이론으로 봉합되었던 개화파 혹은 개혁세력과 조선 전통국가의 권력 및 군권 사이의 갈등은 갑오 이후 격화되어 일종의 ‘대결적’ 관계로 귀결된다고 본다. 복잡하고 방대한 개화에 대한 유길준 및 개화파의 저작에서 이런 정치적 경향성을 읽어내는 것이 teleology는 아닌가?  

양승태: 발제문의 ‘teleology’와 ‘보수적’이라는 용어에 대해 설명해 달라.

문유미: --> 일진회 연구하면서, (후기 민족주의 운동에 있어) 국가 및 관료에 대해 대결적 자세가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런데 개화파에 대해, (전기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국가권력과 대결하는 점에서, 후쿠자와에 비해 급진적이었다고 독해하는 것이, 혹시 후기의 경향을 전기에 투사하는 것은 아닌가, 주의하고 있음.
--> 세계대세론보다 서유견문에 와서, 민권보다 군권을 옹호하는=보수적인 입장이 강화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 가지고 있음.

하영선: 유길준 세계대세론에 대한 기존 연구가 별로 없음. 그런데 세계대세론이 중요한 것은, 갑신정변 한 해 전에 나왔다(1883년)는 점. 국내정치=군민공치/ 국제정치=양절 두 가지 다 결국 갑신정변의 실패에 의해 후퇴할 수밖에 없음. 83년에 일본체류 끝나고 막 쓴 세계대세론과, 갑신정변 겪고나서 쓴 이후 저작들의 주장은 달라질 수밖에. 1881년 신사유람단이 ‘군민공치’를 처음 소개. 군민공치 이념 자체가 유길준이 최초로 들여온 것은 아님. 문유미 박사의 오늘 프로포절에서 의미있는 연구 나올 수 있다고 생각.

양승태: 조선시대의 왕이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 군권과 신권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

문유미: 후쿠자와 <서양사정>과 <서유견문>이 얼마나 유사한지?

하영선: 후쿠자와 전집을 보면, 서양사정 말고도 서양에 대해 소개한 글이 여러편 있음. 그런 것들과 자세히 대조해볼 필요. 그리고 유길준이 대전향을 하게 되는 것은, 박규수를 만나 <해국도지>를 받으면서임. <해국도지>나 <영환지략> 등을 보고 초기적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뒤에 일본 가서, 이보다 훨씬 정밀한 글들을 접하게 됨. 따라서 두 가지 경로가 있다고 생각. 1840년대 이래 중국의 서양소개서들+유길준이 일본 체류하던 시절 일본의 서양소개서들 양쪽의 영향.  

문유미: 한성순보를 봤는데, 세계대세론의 주장이 간략하게 실려있음. 한성순보를 낸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회고록을 보면, 한성순보 발간 및 내용에 대한 매우 자세한 사정을 적고 있음.

강상규: 유길준이 1856년생이므로, 세계대세론 내던 당시는 18세. 일본에 가서 후쿠자와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임오군란을 겪은 상황을 고려해 보면, 유길준은 후쿠자와 영향을 상당히 받았을 것. 갑신정변을 겪은 뒤에는 <세계대세론> 때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신중해질 수밖에 없음.

문유미: 문명론지개략과는 확실한 차이를 보임.

양승태: “국체를 nationality로 정의”한다는 의미는?

문유미: 정체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국체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nationality를 국체라고 번역.

양승태: 후쿠자와는 문명론지개략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를 쓰거나, 이에 대한 관념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은지?

강상규: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에 의해 이미 일본은 국체 관념이 강하게 서 있었음. 아직 ‘민족’ 관념에 의해 상대화될 여지를 허용하고 있지 않았음.

2. 강상규 - “고종과 유길준”

- 유길준에게 사상가로서 주목할 측면도 분명 있지만, 현실정치에서의 유길준을 고찰할 필요. 정용화의 글을 인용해서, 유길준의 생애를 시기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음.

첫째, 전통유학 교육을 받다가 박규수의 문하에 들어가 과거를 포기하고 개화파인사들과 교류를 갖는 초기 유학교육과 신학문의 접촉기.
둘째, 조사시찰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하(1881.5-1883.9)에서 일년 반 가량 유학하고 이후 2년 남짓 미국에서 유학(1883.9-1885.9)했던 해외유학시기.
셋째, 귀국한 후 7년간의 유폐 생활 뒤에 서유견문 출간, 1907년 일본 망명까지의 시기.  

(시찰단에 있다가 유학갈 수 있었던 사정에는 고종의 허락 있었음.)
(고종이 유길준에게 매우 큰 애정을 표시하고, 양위 후 유길준에게 개인적으로 상을 내림.)
신학문을 일찍 접한 젊은 청년 유길준과 군주 고종의 내밀한 관계.  

양승태: 재미있는 주제지만, 한 시기로 좁혀야 하지 않을지? 그리고, 고종이 유길준에 대해 짜증을 낸 때가 갑오경장 시기 아닐까? 맡겨두었더니 상투까지 잡으려 한다는 식으로. 갑오경장 시기 고종과 유길준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면 어떨는지?

최정운: 유길준은 매우 이중적인 인물.

양승태: 갑신정변 때 유길준 혼자 살아남은 것 아닌가?

강상규: 박영효는 먼저 도망가고, 어윤중, 김홍집이 모두 다 맞아죽었으니, 중요인물 중에는 유길준 혼자 살아남은 격.

구대열: 고종과 유길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서술한 자료가 있는지, 아니면, 자료를 통해서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맞물린다는 식으로 유추해석하려고 하는 것인지?

강상규: 갑오경장에 대한 일본측 기록 있음.

양승태: 고종과 유길준 관계에 대해 (본국에 보낸) 일본측 첩보보고가 있을텐데.

하영선: 갑신정변 때는 스기무라 보고가 있음.
현재까지 국내 사학계에서 기존연구 가장 미비한 부분은, 89-94년 재야 낭인시절과 망명 11년. 활빈당과 유길준의 관계. (김용구 선생님 자료집에 활빈당 관련 자료 상당수 있음.) 김옥균의 경우, <김옥균과 일본> 등을 통해 웬만큼 다 밝혀져 있는 데 비해, 유길준의 일본망명시기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적음.

강상규: 유길준은 박영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유길준이 명성왕후 시해에 대해 일정부분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유길준을 용인하고 기용했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

하영선: 스기무라(杉村濬)가 쓴 갑오경장 보고서. 군국기무처 내 친일 대표선수들(안경수, 김가진)에 대해, 스기무라가 진정한 친일 여부를 의심했던 것으로 보아, 역으로, 이 시기까지도 일본이 아직 완전히 세력장악을 하지 못했음을 짐작. 그러니 유길준은 친일이라고 단순화하기엔 무리가 있음.

3. 김상배 - “지식 개념의 수용: 유길준을 통해서 본 동아시아 지식질서의 구조변동”

유길준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지식의 개념사 내지 사회사.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생각하던 지식과, 16-17세기 서구 지식은 다르다. 서구 지식의 동아시아 도래는 정치/권력 현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 아닌가 함.    

<세계대세론>에는 지식에 대한 부분이 없었는데, <서유견문>에서는 서양학문에 대해 상당 부분 할애. 외유로 돌아다니면서 이 부분을 많이 깨닫고, 군사 질서 뒤에 있는 서구의 지식체계를 알게 되는 것 아닌가.

(1) 유길준의 근대지식에 대한 이해 vs. 전통지식관
(2) 근대지식에 대한 실천 전략으로서의 교육관/ 연구관
(3) 유길준에게 근대 ‘지식국가’ 개념이 있었는가의 문제

이렇게 세 가지를 논구하려고 함. (자세한 내용은 발제문 참고)

(1) 오늘날의 지식이라고 하면, 기술지식(실용적 지식+하드웨어/인프라)->문리(文理)지식(인문/사회/자연과학적 지식)->이념지식 순서(종교관, 시공간관, 규범적 지식)로 생각하는데, <서유견문>에 논의 순서는 역전되어 있음.

토론꺼리: 유길준은 지식을, 독자적인 실체를 갖는 축적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문과 인쇄술, 지식의 전파와 계몽, 지식 인프라에 대한 인식.

(2) 유길준의 근대 교육관-지식 입국의 방편
- 교육의 세가지 명목: 도덕교육, 재예교육, 공업교육

(3) 유길준의 근대 지식국가관-권력관과 연관
- 개화한 정치의 6가지 요결 중에서 언급.
- 지적재산권과 국가.
- 교육과 국가의 역할.

양승태: 智와 知의 의미를 구별할 근거가 있는지? 유길준에게 있어 <서유견문>은 서양학문체계를 베낀 것처럼도 보이는데, 이것을 지식 개념의 수용이라고 독해할 수 있는가?

김상배: 김봉진 선배의 말에 따르면, <서유견문>에는 후쿠자와에게서 보이지 않는 창작의 부분이 있다고 하니.

최정운: 두 가지 경계할 점. 유길준이 --의 개념을 알지 못했다, 고 말하기.(바보들의 역사) 두 번째로는 --론의 단초가 이미 그의 사상에 들어있다, 고 말하기.(예언자들의 역사) 둘다 현재주의적 견강부회. 조심.

개념이란 무엇인가? ‘지식’의 definition을 놓고 self-conscious하게 논할 때 개념을 논할 수 있게 되는데, 유길준의 사고전개방식은 전혀 그런 게 아님. 그렇다면 우리가 유길준을 논할 때 개념을 어떻게 말해볼 수 있는가?

실제로는, 기술적 부분보다 윤리적 이야기가 마구 들어오는데....

김상배: 유길준에 들어오면 이전 동도서기론자들의 한계가 깨어지고 있는 듯 하다.

양승태: 지식의 분류는 언제나 존재론을 바탕에 깔고 있음. 그런데, 과연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서양지식 수용의 비판적 틀거리로 기능할 존재론을 가지고 있었는가? 의문. 그냥 베껴다 나열하고 있는 건 아닌가.

구대열: 관련해서 참고할 만한 책으로, 미국에서, 지식의 역사 2권짜리 나온 것 있음.  

문유미: 개화기에는, 유식/무식의 기준이 급변.
유길준은 서양지식이 우위에 있다, 고 무비판적으로 주장했던 것일까?

하영선: 오늘날 시점의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김상배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중요함. 단, 유길준이 박규수를 만날 때까지 배우던 전통적 지식체계에 대한 일정한 이해가 있어야 자의적 해석을 피할 수 있음. 유길준의 행적으로 보아, 그는 바보가 아님. 그런데 왜 이리 엉성하게밖에 수용이 안 되는지, 밝혀주는 것이 유길준 이해의 핵심. <서유견문>14편에서 개화의 6요소를 주목. 이 자체는 후쿠자와의 <문명론지개략>을 그대로 따왔음. 그런데, 그것을 따온 이유가 무엇일지?

일단, 주자학적 지식 체계를 알도록 합시다. 양계초의 <청대학술개론>. (번역본도 있음)

왜 유길준은 (양계초처럼) 전통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근대적 지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균형감각을 가지지 못했는가? 자체가 논구할 만한 주제.

4. 전재성 - “유길준의 군사사상”

<서유견문>에서 관심가는 부분은 군사. 9편의 양병하는 제도, 13편의 서양 군제의 내력. 베낀 것인지 몰라도 상당히 서양군제를 잘 이해한 듯.

서구 군사의 전파가 현상적인 군사부문 이면의 보다 본질적인 국제정치, 국내정치, 과학지식의 부문을 담고 있었다고 볼 때, 서구와의 충돌의 접점에서 군사사상을 형성한다는 것은 군사와 이를 뒷받침하는 전체 국제, 국내 부문의 총체적 인식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일.
(1) 유길준이 개화파들이 주장한 대로 군사개혁에 대한 복안을 가지고 있었는가?
(2) 개항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무력의 중요성. 갑신정변도 마찬가지. 과연 어느 정도 통합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역추적해서 서술하려는 것이 글의 목적.
- 근대국민국가의 완성태 속에서의 군사의 위치라는 측면에서 내부적 연계성이나 포괄성을 보여주는 부분들.

연구는 세 파트.
(1) 군사와 강병 분야에 대해 직접 논의하고 있는 부분.
(2) 간접적인 군사부문의 발전을 논하고 있는 부분.
- 정치체제론
- 그 당시 다른 논자들의 강병책
(3) 1880년대 말 조선의 국내외적 상황과 군사상태를 살펴봄으로써 유길준 사상의 평가
- 전파한 쪽(서구)과 당한 쪽(조선)의 군사력, 구조적 조건
- 전파당한 쪽(조선)의 파편화된 인식을 어느 정도 유길준이 극복하고 있는가.

양승태: 유길준의 논의 이외에 당시에 주목할 만한 군사서는 없었는가?

문유미: ‘무(武)’에 대한 인식이 일본-전통적으로 폭력적 문화-과 조선 매우 달랐음. 조선에서는 ‘군사’라는 것이 의외로 추상적 이념을 뒤에 깔고 있음.

구대열: 비단 조선 뿐 아니라, 주자학적 왕도지향의 전통에서 전쟁/ 군사에 대한 뿌리깊은 부정적 의식이 중국에도 존재.

최정운: 1880년대 말 이미 군사문제에 대한 한, 외부적 제약도 있고, 내부적 재정도 없고, 고종도 포기한 것이 아닌가.

구대열: 군사 문제에 대한 외국의 영향력은 시기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전재성: 청의 영향은 청일전쟁 이후에는 별로 없었고, 1884년부터 94년까지는 일본, 94-96년 러시아, 97-1903년까지 광무개혁의 시기가 고종의 자주적.

강상규: 연갑수 선생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책 연구>을 보면, 70년대 무위소를 둘러싼 (대원군과 구별되는) 고종의 군사정책에 대한 이야기 나옴. 홍영식과 서재필이 군사파트 담당하면서, 서재필은 도야마 군사학교 가서 실제로 군사훈련 받고 들어옴. 통리기무아문에서 군사파트 매우 강조. 적어도 이 시기에는 외교론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음. 81년 영선사 보내면서 배워오라고 한 것도 청의 군사기술이 핵심.

임오군란 겪고 나서 들어온 청의 속방화 정책 속에서 조선의 군사문제가 가지는 의미.

양승태: 재정은 어땠는지?

강상규: 갑신정변 때 이들이 제거한 정적은 수구파보다 오히려 온건개화-친청파. 어떤 면에서는 집안싸움으로 개화파의 세력을 감소시킨 측면. 갑신정변 이후로는 군사 부문의 중요성이 현실적으로 포기됨.

구대열: 군사고문으로 왔다가 돌아간 외국대장이 본국에 보낸 모종의 문건이 있을 것. 중요한 참고자료.

하영선: 19세기에 대한 양대 의론. 한쪽 극단에는 그들은 바보였다. 다른쪽 극단에는, 무던히 노력했다. 우리가 이들 사이의 균형점을 제시해야 하지 않나.

첫째, 이들은 전적으로 무지하지 않았다.
1881년 청에 영선사 갔을 때,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군사기술 배워오는 것. 더더군다나 쿠데타 세력인데,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없었다면 말이 안 됨.

둘째, 그러나 이들에게 한계가 있었음은 분명.
어째서 당시의 standard에 접근하지 못하고 결국 non-actor로 전락했을까?
고민을 인정해주되, 그 고민이 왜 결실을 맺지 못했는가.

64년 되면, 대원군도 key는 군사, 라고 생각. 그러나 여전히 전통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함. 64-73년은 신헌을 시켜 다산의 군사론을 연구한 10년. 그에 비하면, 개화파는 근대군사에 대한 초보적 생각 분명히 있었음.

80년 논쟁. 부국과 강병 중 어느쪽이 우선인가. 강병을 하려니, 돈이 없다. 김옥균이 1883-4년 300만원 차관 들이려 했던 목적은, 군사개혁. 고종이 몰랐겠는가.

그러한 군사개혁 프로그램을 수행코자 했는데, 그것이 안 되었던 이유를 밝혀주어야 하고, 유길준도 그 속에서 위치와 의미가 파악되어야 함.

강상규: 1881년 영선사로 청에 가면서 김윤식이 고종에게 올린 서한에서, ‘절검론(근검절약론)’ 주장. 강병보다 부국이 우선이다.

하영선: 결국 단기적으로 김윤식이 주장한 강병보다 부국이 우선한다는 부국>강병론이 이김.

문유미: 주진모 선생에 따르면, 갑오농민개혁 이후 진행된 군사개혁과 군비강화의 목적은 내부진압. 그렇다면 80년대와 90년대의 군사정책에 전환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혹은, 개화파의 군사정책에서 어떤 연속성을 읽을 수 있는가?

하영선: 90년대 상황에서 고종이 조직적 폭력수단을 장악하려는 것을 완전히 근대적 함의로 읽어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대외적인 의식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구대열: 실질적으로는, 진의 배치를 봐야 할 것. 얼마나 왕실이나 수도방위에 집중되어 있었는지.

5. 최정운 - “담론 전략으로서의 유길준의 <서유견문>”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제목처럼 서쪽을 유람하며 보고 들은 것을 전하기 위해 쓴 글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글처럼 개화의 우선순서와 목표을 서술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생존전략을 제시한 글이냐 하면, 그렇게도 볼 수 없다.
80년대/90년대와 1900년대 개화파의 변화. 더욱더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실천적 행동에 대해서는 한 발 물러선 자세에서, 당시 조선에서 벌어질 개화 또는 광범위하게 정치.사회 모든 논의에서 사용될 담론적 기반을 전통 주자학으로부터 서양적 디스코스로 대체하겠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본다. 그간 조선에서는 모든 정치. 사회적 문제를 논의하는 담론적 기반은 당연히 주자학 내지 유학이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개화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 국한문 혼용체.
- 시간과 공간을 서양적으로 재구성하겠다는 구도.
- 서양 논의에 대한 분석적 논의가 없는 것도, 오히려 이질감을 숨기려는 전술적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6. 하영선 - “유길준의 국제정치학: 양절체제론”

유길준 담론전략 중 고도의 실천전략으로 연계되는 지점이 몇 개 있다.-> 국민공치, 양절.

(1) 기존 논의들은 reality의 재구성을 필요로 한다.

김봉진-강동국 논쟁의 핵심은, 강동국 박사는 유길준이 양절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없다는 것이고, 김봉진 박사는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양절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나의 의견은: 유길준은 양절체제를 긍정적 또는 부정적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사용하고 있다.

당시의 4가지 담론.
속방자주. (천하질서 하의 전통적 관계)
속방속국. (청측의 입장. 임오군란부터 가시화)
속방자주 독립국. (유길준이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
독립국. (일본)
똑똑한 유길준에게, 원세개의 강국정치 시작되는 시점에서, ‘독립국’이라는 말은 맞아죽을 것이므로 선택지 아님. 청이 요구하는 속방속국은 망하는 길이므로 역시 선택할 수 없음. 청을 적당히 달래면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이중의 게임은, 속방자주 독립국의 길. 담론상의 용어 선택에 불과한 듯 보이지만, 당시로는 상당히 위험한 실천.

(2) 주변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던 담론싸움의 맥락 속에서의 의미 파악. (한중일 비교 근대 국제정치학史적 접근)

최정운: 유길준은 이중적 사람. 내면의 ego는 김옥균 못지않게 급진적이나, 험한 세월을 견디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감추는 것이 <서유견문>의 기본적 목적. 행동이 움츠러든 상태에서 ‘말’만이라도 변혁하겠다는 의도. 유길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알고 있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또한 의외로 적게 알고 있었다. 의도된 이중성이 분명히 존재.

양승태: <서유견문>의 전략적 의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유길준이 서구근대사상을 얼마나 깊이 이해했는지는 별개의 문제. 소위 ‘이중성’이 얼마나 과연 얼마나 의도되었으며, 얼마나 심원한 깊이를 가졌는지.

김상배: <서유견문>에서 제기한 문제가 갑오경장에서 실현된 부분은 없는가?

최정운: 단발령을 공포시킨 것이 유길준. 헤어스타일이 뭐가 중요하느냐고 말해 놓고는, 막상 상황에 닥치면, 깎어! 라고 jerky하게 반응하는 것. 그것이 유길준 스타일.

김상배: 결과적으로 물화되지 않은 것에 대한 정당화 담론.....

최정운: 방국의 권리, 국권론에서 나라란 무엇이냐에 대해 설을 품. 그리고 나서는 유교적 국가론을 덧붙임으로써 두 이질적 논의를 섞어버림. smuggling 의도.

구대열: 내무장관일 때 유길준이 최초로 국한문혼용으로 된 칙령을 일반백성들에게 공포. 단순하게 담론의 제기가 아니라, 고종의 행동을 통해서, 자기의 행동을 통해서 실현했다는 점에서 유길준의 언어변혁의 의도가 간접적으로 입증되고 있는 것.

최정운: 20세기 초반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에는 유길준의 언어가 상당히 많이 인용됨.

김상배: 서유견문 서문 이외에 유길준이 국한문혼용체 사용이나 언어 변혁에 대해 쓴 글이 있는지?

지식 전파 메커니즘으로 신문 등을 사용하는데, 그 소프트웨어가 언어인데, 그 언어를 바꾸겠다는 고민은, 대중계몽 파급력의 제고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 있음.

구대열: 한문, 순한글, 국한문혼용의 선택과 변화는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이 있음. 이는 비단 일반 민중만이 아님. 예를 들어, 순한글에서 국한문혼용으로 다시 바뀌는 데에는 양반 전통지식인 계층에의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고려가 존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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