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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세계대세론>
 

200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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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7월 1일 전파모임 *

* 장소: 경기도 수지 세계정치연구소
* 참석: 하영선, 구대열, 양승태, 최정운, 신욱희, 김상배, 김봉진, 이옥연, 문유미, 박성우
* 내용: 유길준, <세계대세론> (유길준전서 3권)
* 발제: 하영선, 김상배

1. 하영선 교수님 발제 (아래 첨부파일 참조)

- <세계대세론>은 1883년 저작으로 추정됨.

* 18-9세기 당시의 공간관(空間觀)에 대한 기본적 사전지식이 요구됨.

- 세 개의 지도. (1) 김사형, 이무, 이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1402)
(2) Matteo Ricci, <곤여만국전도>(1602)
- (1)번 지도의 경우, 아마 송/원의 화이(華夷)도의 영향 받았을 것. 조선이 매우 크게 그려져있는데, 송/원의 원본보다 조선의 크기를 확대했음.
- (2)번 지도의 경우, 마테오 리치가 중국을 중심에 두고 그렸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이외의 나머지 세계가 그처럼 크다는 사실에 당대인들은 곤혹스러워했다고 전해짐.

- 마테오 리치 지도는 제작된 지 1년 후인 1603년에 바로 조선에 수입. 우리 공간관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 (3)번 지도, <천하도>. 조선, 중국, 일본 동양삼국만 사실에 기반해 그려져 있고, 나머지는 거의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의 땅들. 그 와중에 위도, 경도가 표시되어 있음. 보건대, 일반 레벨에서는 17-8세기에 이런 식의 공간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됨.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행록 등을 보아도 그렇고, 마테오 리치 등 청에서 들여온 ‘과학적’ 세계지도에 기반한 공간감각도 중첩적으로 존재.

- 일본의 경우, 아라이 하쿠세키의 <채람이언>(1713). 구라파의 각종 사실들을 모아서 낸 책. <서양기문>(1775) 등이 일찌감치 간행되었음. 조선정사가 일본에 갔을 때, 아라이 하쿠세키가 거론하는 서양의 국명/지명을 못 알아들었음.

- 중국의 경우, 마테오 리치.

- 17세기에는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가 중요했다면, 19세기에는 위원의 <해국도지>가 중요. 해국도지는 그냥 지리서가 아니라, 해국의 진입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전략개념에서부터 시작됨. 서양 지리를 소개하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겠음. 책의 구성은, (1) 임칙서 등이 서양서를 일정부분 번역 (2) 종래 중국에 있던 서양에 관한 정보들을 수합. 중국 중심적인 태도는 견지. <영환지략>(1848).

- 니시카와 조겐, <증보화이통상고>(1708). 일본의 경우 난학+마테오리치로부터의 정보가 합쳐지면서 이러한 “지구만국일람지도”를 그려내게 됨.

- 후쿠자와 유키치, <당인왕래>(1865), <세계국진>(1869), <장중만국일람>(1869). 모두 간략한 핸드북. 그리고 <서양사정>. 일본은 <해국도지>를 전파받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선보다는 그것에 덜 흥분, 덜 인용. 유키치의 <서양사정> 등에서도 인용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 서구에 갔을 때 모아온 백과사전 등. 이미 오리지널을 참조하고 있었던 것.

- 그렇다면, 1883년 유길준의 <세계대세론>이 참조하고 있는 것은? 해국도지인가, 아니면 후쿠자와 유키치인가.
- 최한기의 <지구전요>(1857)와 유길준의 <세계대세론>은 일정 부분 차이를 견지.  

* 세계대세론 독해법

- 집필시기는 1883년. 유길준은 1881년 5월경 일본 갔다가, 83년 1월 초 박영효 귀국 때 함께 돌아옴. 박영효는 돌아오자마자 한성부윤. 유길준은 83년 2월, 외아문 주사로 발령. 중점사업은 신문을 내려는 것. 한성순보 발행에 유길준을 기용하려 생각하고 있었으며 유길준도 매우 관심, 전심전력 준비. 이광린 선생은 <세계대세론>이 이 때 준비된 것이 아닌가 추정. <세계대세론>을 보면 곳곳에 고친 흔적이 있는데, 그 고친 필적이 유길준이 쓴 <한성순보 창간사>(실제 실리진 않았음)를 고친 방식과 매우 유사. 고친 사람은 박영효로 추정. 박영효는 한성부윤에서 쫓겨나고 광주로 발령, 유길준도 외아문 주사에서 물러남. 1883년 7월, 민영익 따라서 미국행. 실제 한성순보는 83년 10월 김윤식 측에 의해 순한문으로 나옴. 유길준은 국한문혼용체 의도.
- 주 source는 서양서가 일본측 거쳐 들어온 것이겠으나, 당시 상해에서 발행되던 신문들도 함께 이용.
- 집필목적? pp.34-36에서, 개화를 4등급 구분(야만, 미개, 반개, 문명). 후쿠자와의 <세계국진>이나 <장중만국일람>에서도 개화 4등급 구분하는데, 용어나 문장이 다르다. 야만(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미개(아세아내지, 아라비아, 시베리아), 반개(아세아 동부와 서부, 페르시아, 터키), 문명(구주제국, 아메리카합중국). “우리의 장단점과 문명국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하여 아국개화진보를 모색하고자 함”.
- 주요목차. (발표문 참조)
- 정치 부분이 흥미로운데, 세계의 정치체제를 少人정치(군주전제, 군주전치, 귀족정치)와 多人정치(군민동치, 공화정치)로 나눈 뒤, 다인정치가 소인정치보다 善美하다고 함. 1883년 당시 위험한 말 아닌가? <서유견문>의 경우, 정부의 종류 구분 부분은 가토 히로유키의 책을 그대로 전재한 것. 그런데, <세계대세론>의 경우엔 후쿠자와 유키치의 것과도 일치하지 않고, reference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음.
- 개화는 가장 중요한 부분.
- 세계역사일반의 마지막 결론. “만일 천하사정을 알고 문명제국의 이익을 채용하여 아국의 부강을 도모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此篇을 검열하여 大發作大奮起하시옵”.
- 자유. <서유견문>의 방국의 권리와 인민의 권리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그에 비해 매우 초보적인 수준. 국권의 기본을 ‘병력’이라고 하면서 병력에 대한 설명을 한 다음, 그러나 ‘공법’도 필요하다며 간략한 설명 덧붙였음. 보건대, 유길준은 리얼리즘적 국제정치 인식이 다분히 있었음. 순진한 리버럴리스트라고 볼 수 없음.

2. 김상배 교수 발제

- 세계대세론과 서유견문의 목차비교. (발제문 참조)
- “종교는 정신에 속하고 기술은 형체에 속하니”(p.9)에서 유길준의 ‘기술’이라는 용어 사용에 주목. 중국에서는 여전히 테크놀로지의 번역어로 ‘기’ 사용.

3. 토론

하영선: 왜 제목이 ‘세계大勢론’일까. 유길준의 서술방식에는 중국모델과 일본모델 사이에 낀 조선의 고민이 반영되어 있음. <서양사정>과 <해국도지>를 비교해 보면, <서양사정>은 기본적으로 스탠다드가 서양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인 데 비해, <해국도지>는 서양을 적으로 놓고 싸우겠다는 것. 유길준은 이 중 서양사정 쪽의 입장을 취했음. 세계의 대세가 이러하니.

최정운: ‘세계’라는 말 자체가 기존 ‘천하’와는 대립되는 말. ‘勢’라는 말 또한 유교 전통에서는 부정적 어감. 그러나 세계는 이제 勢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라는 천명인 셈.

하영선: ‘세계’라는 말은, 원래 불교에서 유래했는데, 18세기 들면 일본에서 많이 사용.

최정운: <세계대세론>이 인종, 종교, 언어, 정치, 의식거처, 개화의 각국차이(殊異)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도, 이렇게 서로 다르고, 따라서 더 이상 理가 통하지 않는 勢의 세계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주자학이 지배하고 있던 조선사회에서 이 책은 매우 논란적 주장을 담고 있음.

구대열: 고대에서부터 쭈욱 논하고 있긴 하지만, 유길준은 이 책에서 몇 가지 중요한 자기 포인트를 제시하고 있음. 유럽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 개화의 길로 나아갔다든지, 개화의 요체는 실사구시라든지.

문유미: 제가 기억하기로는,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국체가 바뀌면서” 개화로 나아갔다, 고 하고 있음.

양승태: 서양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태조를 기원으로 해서 년도를 매기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한국 중심적인 시도.

문유미: 19세기 말의 민족주의와 비교하면, 고구려나 고려 이야기는 전혀 안 나오고 태조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도 특이. 유길준의 역사적 연속성에는 고구려나 고려가 들어가 있지 않음.

구대열: 중국을 ‘지나’라고 한 것은, 일본의 영향이긴 하지만, 확실히 중국 중심적 천하관으로부터의 이탈을 드러냄.

하영선: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도 그렇고, 언어전쟁에 매우 민감한 사람. 국한문혼용체 사용을 주장했고, 개화를 하기 위해서는 말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

문유미: 후쿠자와 유키치나 가토 히로유키같은 경우, 군주와 민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소개를 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위계에 대해서는 다분히 보수적인 인상을 받게 됨. 그런데 유길준의 경우, 정치체제론에 방점을 강하게 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다수정치가 ‘대세’이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매우 혁신적인 주장. 애국계몽운동가들이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교육을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이미 노출된 소리나 했던 데 비해, 유길준같은 초기 개화사상가는 오히려 정치개혁이라는 제대로 된 문제의식에 집중.

최정운: 1910년까지의 개화운동사를 보면 개화사상이 점차 거세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 아님. 그런 점에서 유길준이 후대의 유대치 등보다도 오히려 radical.

김상태: global standard를 무조건 추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적 standard에 대한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듯.

최정운: 한국의 생존, 에 대한 절박한 문제의식이 깔려있음.

김봉진: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에 ‘아세아’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 1. 세계대세론이라는 제목. ‘세계’는 불교도입과정에서 번역어로 등장한 것인데, 이 ‘세계’가 근대적 의미로 조선 및 일본에서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가는 저도 모름. 유길준이 최초였을 수 있겠음. 그러나 일본에서 들여왔다는 것은 분명. ‘勢’=權道. 1881년 후쿠자와 유키치가 <시사대세론> 씀. 이 시기는 후쿠자와가 이미 국권팽창론자로 넘어간 시기인데, 이 시사대세론만은 국권확립론, 위기의식, 수비적 논조로 되어 있음. 유길준이 <시사대세론>을 보면서 공감할 만한 여지가 많지 않았을까. 내용은 연관성이 없으나, <시사대세론>을 읽고 <세계대세론>이란 제목을 고안해 내었을 가능성도 있음. 그러나 어쨌든 후쿠자와의 <시사소언>이나 <병론> 등에서 드러나는 제국주의적 팽창론의 영향도 일정 부분 받았고, 그것은 <세계대세론>의 ‘자유대략’의 병론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2. <세계대세론>이 한성순보의 기사로 기획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의문. 하나의 저작으로 준비되었다고 생각. 지구와 세계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보수/개화를 떠나 당시 지식인이라면 공유. 한성순보에도 천문학 꼭지 존재. 유길준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을 당시의 경응의숙(게이오) 및 근처 대학 강의록을 뒤져보아야 함. <세계대세론>은 당시 일본 학자들의 주된 의논을 종합해서 정리한 강의노트에 기반해서 쓴 것 아니겠는가. 그 당시에는 천문학이나 인문지리가 정치학의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던 것.

3. 정치체제를 5분류하는 것은 가토 히로유키 <입헌정체략>을 따랐음. (후쿠자와는 4분류) ‘君主專治’라는 용어도 가토 히로유키의 용어. 다인정치-소인정치도 가토의 것일 가능성 높음. “자유대략” 부분은 후쿠자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면서도 후쿠자와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었다고 생각. 여기에서 ‘인권’이란 말은 후쿠자와는 사용하지 않았던 말. 매우 흥미로움. 병력 부분에서 사용되고 있는 통계는 후쿠자와의 <병론>(1880)에서 따온 것. pp.99-102는, <서양사정> 첫편의 “외국교제”를 거의 그대로 번역한 것. 물론 첨가한 부분이 있음.

하영선: 그러므로, 유길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70년대 후반과 1880년대 초반의 후쿠자와 저작들을 잘 읽어볼 필요가 있음. 또한, 다시 확인되는 바는, <서양사정>과 <해국도지>, 일본모델과 중국모델 중 유길준은 <서양사정> 쪽을 선택했다는 것.

구대열: 아쉬운 것은, 어째서 정세분석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이렇게 피상적인 사실들의 기술에 그쳤는가 하는 것.

최정운: 무엇보다도, 경제에 대한 서술이 없음. <서유견문>에도 ‘물산’은 있지만 ‘경제’는 없음.

김봉진: 그것이 당시 조선 개화의 한계. 그러나 선구자로서 유길준에게 모든 것을 요구할 수는 없음. 단어 하나에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숨어있다고 보고, 세세하게 읽어줄 필요 있음.

하영선: 1869년 후쿠자와의 <서양사정>을 보면, 지금 유길준의 <세계대세론> 읽는 것처럼 초보적인 수준이라는 생각이 듦. 그런데 불과 12년 뒤에 나오는 <병론>은 탁월한 전략서. 그런 걸 보면, 처음 시작은 미약할 수밖에 없음.

문유미: 개화운동도 그렇고, 애국계몽운동도 그렇고, 이것을 하나의 ‘學’으로 볼 수 있겠는가. (cf. 일본의 난학) 당시 상황에 대한 서술 수준이고, 분석이 이루어진다고 보기 어려움.

양승태: 분석이 이루어질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음.

하영선: 사실, 학자들이 아니었음. 유영익 선생은 유길준을 ‘지식 관료’라고 분류했음. 학자-관료-정치인의 경계에 서 있었던 경계인?

문유미: 유교 사회에서 전통 유자들이 수행했던 역할과 유사. 반드시 새로운 것만은 아니었음.

하영선: 같은 박규수 문하생 그룹에서도, 김옥균, 박영효 등에 비하면 유길준은 정치성이나 행동력이 떨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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