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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겐이치로, "On the study of accultration of clothes"
 

2005-10-24 
* 전파모임 2005년 4월 30일 (토)
* 장소: 경기도 수지 하영선 교수님 서재
* 참석: 하영선, 최정운, 김상배, 구대열, 김봉진, 남궁곤, 손열, 문유미, 김용직, 장인성, 김용덕(부처), 히라노(부처)
* 발표: 히라노 겐이치로, On the study of accultration of clothes, its significance and possibilities: A review of Hyung Gu Lynn article  

0. 하영선 교수님의 발표자소개

1995년 고마바의 인상적 만남이후 각별한 인연
1998-9년경, 한일 개념사 연구회 교류.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한학기 강의.

히라노: 국제대학원 영문저널 2004년 3호는 특집호였는데, 저에게도 특별. Lynn의 논문. UN대학이 주관했던 문화변용과 국가관련 프로젝트에서 명치시대 의복의 서양화라는 테마를 연구했었음. 의복이라는 구체적 문화요소 얘기가 개념사 연구와 어느 정도 매치될지 걱정과 기대.

발표논점 세 가지. 1. 근대화로서의 의복의 문화촉변(접촉과 변용). 식민지에서의 의복의 문화촉변. 2. 린의 논문에 대한 감상인데,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의복변화가 의외로 장기간 걸쳐 이루어졌음 3. 문화촉변연구 또는 개념사에서 젠더 연구를 도입할 필요성

린 논문의 요점. (발표문 참조) (린 논문 초록 참조)
1. 식민지시대에 한국 민족정체성과 전통복식이 재결합되었다.
2. 의복을 둘러싼 언어변화가 시작되었다
3. 식민지시대의 억압/대항 이분법의 한계
4. 사회경제 구조의 변용
5. 의복선택과 의미에 있어서 젠더의 시각화

1과 3의 결론부분에 주목. 린은, 식민지지배가 의복에 민족성을 주었고, 자본주의화가 의복에 근대성을 주었다-그것은 식민지의 지배자/피지배자가 공유하는 것, 이라고 함. 발표문 2페이지의 인용문 참조.(린 87p.)

린 논문의 의외성 세 가지.
1. 전통의복을 입는 것=대외저항 표시 아니라는 주장. 이분법에 대한 비판. (린, p.81-4,발표문 2) (린, p.80-3)
2. 한국에서 의복변화가 대단히 장시간 걸렸음, 개국이후-식민지통치기까지 계속적 변화, 의외. 구체적으로, 특히 식민지시대 이전에 시작된 의복변화가 전국화된 것은 192,30년대이며 그 원인이 공업화라는 주장. 이전 연구에서 메이지 일본의 의복변화는 대단히 빨랐다, 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일본 경우에도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음.
3. 남녀 의복변화 간 차이가 존재했으며, 그 차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

린의 논문은, 처음엔 꽤나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데, 중반부로 가면서 다소 맥이 빠짐. 어쨌든 이 논문을 통해서, 의복의 변화가, 개인에게도 국가에 있어서도 체제변화의 상징, 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했음. 첫부분의 체제변경 시기를 다룬 부분은 대단히 자극적, 긴장, 재미있었는데, 사회경제 구조변용을 적용해서 의복을 다루는 부분은 다소 김이 빠지는 느낌 받았음.

따라서, 초기부분에 중점을 두고 소개하겠음.
크게 두 시기로 나누면 초기: 식민지화 전 18?0-1910년. 제 2기: 1910년 이후.

첫째 초기의 경우, 선교사, 외교관들이 양복의 전달자이자 문화운반자로서 큰 역할 했다는 것이 인상 깊었음. 일본의 경우, 막말 시대 내전상황 속에서 군복이 변화함으로써(서구화) 의복변화가 시작되었음. 메이지 천황이 명치 2-3년경, 양복으로 제복을 갈아입고 사진을 찍고, 각료들에게 양복을 권장함으로써 관료들 복색의 서구화.

이에 비해 한국은, 고종이 양복으로 갈아입는 것은 갑오개혁 기간 중. 린의 논문에 따르면 1894-5년 사이. 그로부터 거의 11년 지난 1906년에야 관원들에게 양복착용 명령.

일본의 두 번째 특징으로, 해외로 나갔던 일본인들이 양복으로 갈아입는 현상이 현저한데, 한국인들도 그랬는지 알고 싶음.

린 논문 따르면, 처음부터 양복으로 (갈아)입는다는 행위는 진보와 근대(성)/ 배반자, 제국주의라는 대립축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는 주장인데, 이것은 린 자신이 일종의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음. 린 논문 요점 중 세 번째는 이분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인데, 이분법의 유효성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한편으로는 위와 같은 대립축을 주장하는 것이 일종의 논리적 모순 아닌가 싶음. 그 원인은, 논문의 방법론적 문제로서 1894-5년 갑오개혁 이전 기간의 고찰, 연구가 되어있지 않은 것 때문 아닌가.  

한국의 양복변화를 구조적으로 정리해 보겠음. 한국의 의복변화는 삼중의 대항구조 속에서 진행. 1. 동서양의 대립 2. 계층, 계급 대립을 포함한 신구의 대립 3. 한국과 일본과의 대항관계. 일본과 비교하면, 특히 일본에는 세 번째 대항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겠음. 대항구조의 ‘대항’은 문화적/정치적 대항으로 나눌 수 있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단한 방식으로서, 공-사적 자리에서 의복을 나눠입는 이중성 드러난 측면 있음. 그 연장선 상에서 남-여 의복간 차이, 시간적 거리 생김. 한국의 경우, 1,2,3의 대항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복=민족성 상징기능이 두드러졌음.

아마도, 논리적으로 생각한 것이지만, 이러한 한국의 대항구조로부터 나오는 이중성에 대해 일본 식민지배층에서도 모순이 발생했을 수 있다고 생각.

1905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 한국에서 취할 수 있는 의복정책은 논리적으로 1. 양복강제 2. 일본복식 강제 3. 한복 허용 4. 새로운 복장-개량한복 등-강요, 의 네 가지. 예컨대, 양복강제의 뜻은 첫째, 기능적이기 때문, 이라는 기능주의적 측면. 그를 통해 일본식민당국이 근대를 독점/ 점유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음. 둘째, 일본복식 강제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식민통치방식으로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 역으로 한복을 허용한다, 또는 강제한다는 의미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뚜렷하게 구별하려는 의도를 집어넣을 수도 있다고 생각. 실제로는 양복/일본복/한복 강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

시기적으로는 뒤의 일이지만, 한국인들 중 일부가 일본복을 즐겨입는 현상이 있었다, 2차대전 시절엔 몸빼 바지가 대단히 유행하고 강요되었다, 는 부분이 린 논문에 언급되는데, 한국정부 또한 해방 후에 몸빼 바지를 장려한 적이 있었음.

이야기가 좀 다르지만, 1876년 이홍장과 모리 아리노리 간 복장문제 다룬 대화가 매우 흥미로움. 이 속에서 모리는 철저한 기능주의 입장에 서 있음. 순전히 기능적이기 때문에 일본은 양복으로 복장개량한다, 고 주장. 그에 비해 이홍장은 복장을 일종의 제도로 보고, 제도를 그렇게 간단하게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 이 자료는 이전부터 여러번 읽었지만, 이번에 기능주의 vs. 전통적 제도보존주의의 대립으로 읽어보니 새삼 재미있다고 생각. 이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논쟁거리인데, 모리가 아무리 기능만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양복의 상징 기능에 대해서는 모리도 이홍장도 공통적으로 의식하고 있었다고 생각. 한편, 상징 기능이란, 첫째, 근대성 상징, 둘째, 민족성/반민족성 상징.

다시 돌아가서, 일본이 취할 수 있었던 의복정책 네 가지. 그러나 일본은 실제로 그 네가지 중 어느 것도 강제하거나 실행하지 않았음. 그처럼 철저한 정책의 부재 속에서, 한국인 스스로 한복의 민족성을 선취한 것이 아닌가 싶음.

이상, 전기에 대한 부분 정리해보았음. 린 논문 후기에 대한 부분은 시간상 생략.
린 논문에 의하면 특히 1920년대에 한복이 저항의 심볼로 등장했다, 고 함.

다음으로, 맨처음 발제한 2.3.번 요지에 대해서. 2. 의복의 변화에 대단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라는 논점. 구체적으로는 도시엘리트 경우 의복변화가 빠른데 비해, 농촌의 경우 느리다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 백년 이상 걸린 의복의 변화. 이와 관련, 의복이라는 구체적 대상의 변화와 개념의 변화를 대비해서 말씀드리겠음. 사회전체를 보면, 의복변화는 계층적으로 장시간 걸리지만, 개인적으로 의복의 변화는 어떤 계기, 의 순간적 선택. 이에 비해, 개념 그 자체는 서서히 변하고 반드시 명시적이 아닌 비명시적 전환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음.

개인의 경우 의복변화가 순간적-절대적 전환, 이라고 한 것과 모순될지 모르겠으나, 의복의 경우는 양복->다시 전통복으로 갈 수도 있는 왕복성, 이 있는데, 개념의 경우엔 그것이 불가능.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경우, 공-사석에서 나눠입는 것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음. 그러나 한국의 경우 양복의 선택은 그러한 왕복성 없이, 절대적 선택이었을 가능성 높다고 생각함.

* 린 논문에 대한 반론.

나 자신의 문화촉변론에서 문화요소는 다기능성을 가지고 있는 소여(所與)라고 생각. 많은 문화론자들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 여기에서 문화요소의 다의성 발휘됨. 이에 비해, 린의 경우 의복이란, 전통적으로 계층적 표상의 하나로서, 계층의 차이를 드러내는, 계층마다의 고정된 표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표상이 차이로서 주어지는 것이 근대화 이래의 변화, 라고 주장.

문화요소의 다기능성, 다의성이 개념사 연구 내지 한국문화연구에 도움을 줄 여지가 있지 않을까, 에 대해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음.

* 마지막으로, 젠더에 대한 문제.

특히 이점에 있어서는 개념사 연구에 대한 시사점이 크지 않을까 생각. 린 논문에서 여성에 대한 복장문제가 한 장 정도 할애되어 있는데, 아쉬운 점은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고,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지 못함. 그러나 여성복장문제를 지적한 것 자체가 좋은 도전.
  
여성 복장의 경우 보다 느리게 변하는데, 이는 메이지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것이 일종의 근대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식민화된 여성을 소비하고 지배하는 남성의 권리”(린 논문 속)로서의 근대의 성격. 린 논문은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치마저고리가 식민지 저항의 한 상징이었다는 점. 둘째, 여성의복변화가 한국사회 계급의 변화를 상징하기도 한다는 지적. 셋째, 식민지 지배자의 엑조티즘의 한 상징이었다는 지적.

여성복장의 변화를 보다 구체적으로, 예컨대, 여성/남성복장의 변화를 따로 분리, 대비해서 묘사할 수도 있겠고, 먼저 변화한 남성복장이 여성복장에 미친 영향, 그 역의 영향 등을 서술해 준다면 더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

개념사 연구 속에 젠더의 시점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묻고 싶음. 많은 정치, 국제관계의 관념 속에 연구자의 편견이 들어가 있고, 따라서, 근대, 문화촉변 연구에 젠더시점 도입의 필요성을 린 논문 통해 느꼈음.

문유미: 형구 린은 박사과정 선배인데, 캐나다 사람이며, 하버드에서 지역연구 석사 후, 박사과정을 밟았음. 어머니가 일본분이고 아버지가 한국인. 지금 UBC(Uni. of British Columbia)에서 한국학 가르치고 있음. 남양군도에서의 일본식민정책에 대한 논문들 있음.

최정운: 중학생 때인 60년대 후반에 어머니가 그때까지 한복을 입고 계시다가, 양복으로 갈아입을까 말까 무지 고민하시던 기억이 남. 한복을 입은 자신의 이미지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인생의 선택이었으리라 생각되지만, 과연 이것이 젠더적 문제이었는지는 의문. 사회적 계층의(부의?) 표상이라는 측면이 더 강함. 그런데, 우리 역사에 있어서, 정말로 “편하기 때문에” 즉, practicality가 복장 선택의 실질적 기준으로 작용했던 적이 있는가? 한국에서는 한복이냐 양복이냐가 언제나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었는데, 일본에서 과연 모리 아리노리의 말처럼 기능성 때문에(만) 양복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하는 강렬한 의문을 가지게 됨.

히라노: 저희 어머니도 같은 고민을 하셨는데, 어쨌거나 끝까지 양복을 입지는 않으셨습니다. 최선생님의 어머니께서 어째서 그토록 고민하셨을까,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최선생님께 다시 묻고 싶고. 60년대까지도 양복을 안 입던 여성분들이 꽤 많았는데, 급속한 근대화에 대한 일종의 반대쪽 균형추로 존재했다고 생각함.

양승태: 실용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가 걸려있음. 반드시 의복으로서의 기능성 뿐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위상을 드러내주는 효용성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고 봄.

최정운: 모리노리가 하는 말에 따르면 노동하기에 양복이 더 편하다고 하는데, 한복을 입던 사람은 한복을 입는 것이 더 편하지 않겠는가.

장인성: 양승태 교수님이 말씀하신 실용성까지 포함해서, ‘유행’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의복이라는 것이 자발적 선택인지, 아니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존재하는지. ‘유행’이란 하나의 콘텍스트이며(=기능성+표상 등등), 이 콘텍스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복을 선택하게 됨. 히라노 선생의 문화촉변론에서도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가 권력. 사회적 관계 속에서 변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의복변화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봄.

히라노: 기능주의, 라는 말은 썼지만, 기능성 practicality이라는 말은 사용한 적이 없고 따라서 그걸 염두에 두지는 않았음.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어머니들의 의복변화의 고민을 보면, 사실상 그 고민 자체가 의복변화의 기능성에 반한다는 것.(의복변화가 기능적이지 못함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순간이 되기도 함) 양승태 교수님이 지적한 바, 실용성에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기능성, 상징성, 미적 기능-은 나 자신도 문화요소의 다의성, 다기능성으로 지적한 바 있음.

최정운: 선택을 은연중 불가피하게 만드는 콘텍스트,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자장’으로서의 문화권력이 존재하는데. 양복을 입은 사람을 ‘개화의 병신’으로 백안시하다가, 언제부터인가는 그것이 너무나 정상적이 됨. 그 과정을 형성한 것이 서양 세력....일텐데,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과정을 practicality로, 그리고 그것을 힘의 원천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영선: 왜 바뀌었나,를 묻기 이전에 체계적인 의복도입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음. 그 경우, 네 개의 기본요소를 정해야 함. 첫째, 정치성의 문제. 둘째, 경제성의 문제. 셋째, 기능성의 문제. 넷째, (젠더 문제와도 연결되지만) 심미성의 문제. 19세기를 생각하면, 역시 첫 번째 변수가 중요함. 권력성, 정치성의 어떤 형태가 의복에 작동했으며, 어떻게 작동했길래 일본은 빨랐고 조선은 상대적으로 늦었겠는가.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서 설명할 때, 두 개의 예를 들고 싶음. 히라노 선생은 세가지로 구분. 1. 동-서 2. 구-신 3. 한국-일본. 유길준은 1888년 <서유견문>에서 서양식 의복과 행태에 상당히 부정적 태도. 왜? 전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측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만큼 깊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 다음으로, 박규수의 환재집 보면, 제일 긴 부분이 의복에 대한 논의. 1841년. 조선의 예송 논쟁의 중심 또한 옷입는 예에 대한 것. 박규수는, 중국의 고전으로 돌아가 복색을 새롭게 할 것을 주장. (서구화가 아닌 반대방향)

그렇다면, 정치성 중에도, 동-서, 구-신에 대한 한국의 태도가 일본과 사뭇 달랐음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어야 함.

히라노: 나 자신의 기본적 입장은 근대와 탈근대의 중간쯤. 탈근대적 입장에서 복장이란, 표상이며 선택일 테니 오늘의 논의는 재미없는 것일 수도 있음. 요는, 시대 또는 콘텍스트 속에서의 선택이라고 해도, 왜 그것을 선택했는가를 알고 싶기 때문에, 탈근대적 논의와는 일정한 차이를 견지함.

린 논문에서, 의복= 전통적으로 고정화된 계층 차이를 드러내는 표상이라는 주장에 대해, 나의 의견은 다른가라는 질문을 쉬는 시간에 문유미 박사께 받았음. 전통적으로 복장이 계층에 따라 달랐다는 사실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 변화에 있어서, 복장의 다의미성, 다기능성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어떠한 복장을 선택하고 변화해 갔는가에 대한 린의 일면적 설명에는 저항을 느꼈음.

김용덕: 일본의복은, 한복보다 훨씬 형식성이 강함. 사무라이 복장이라든가. 일본의 전통시대 사무라이들은 실질적 지위 뿐 아니라 의례적으로 맡고 있는 지위가 있음. 그리고 이들의 복색은 교토에서 앉는 자리의 순위를 나타냄. 그런 면에서, 한국의 의복하고는 관념이 다르다고 봄. 사무라이는 몇 등급까지는 어떤 옷감을 입을 수 있고가 모두 세세하게 정해져 있었음.

하영선: 부르디외적 distinction으로서 의복의 기능은 우리쪽이 훨씬 심했음.

최정운: 다만, 폭력적 규제는 일본쪽이 심했을 수도 있음.

히라노: 김용덕 선생 말씀에 동감하지만, 모리 아리노리로서는 그런 형식성을 일거에 부정했다 하겠음.

하영선: 우리처럼, 일본에서 의복을 놓고 정치적으로 치열하게 싸운 적이 있는지?

히라노: 일본의 경우에도, 복식문제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음. 쥬신구라 등 처음 벌어진 사단의 원인이 복식, 의례였기 때문에. 그러나 여전히 중국, 조선쪽이 그런 경향은 더 강했음.

양승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복장의 변화는 없었는지? 조선에서는 정책적으로 복장개혁이 시도된 사례가 있는가?

최정운: 일본 국민의 복식변화에 국가적 캠페인 등 정치권력의 강제가 얼마나 개입했는지?

히라노: 모리와 이홍장의 회담에, 조선인이 끼어있었다면, 조선인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듣고 싶습니다.

최정운: 조선인은 절대 이홍장 편이고, 아마 이홍장보다도 더 보수적이었을 가능성 큼.

히라노: 명치시대에도 의병이 일어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복식개혁에 대한 크고 작은 저항들이 있었음.

김용: 개화에 대한 저항은 사실상 그 당시 일본에서는 불가능했음. 1870년대 중반부터는 개화-양복을 입는 것-는 대세였기 때문에 그 방법에 대해 논쟁했지 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음. 서민들의 반대는 경제적 부담에 기인했음.

장인성: 와후쿠라는 말과 한복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고 의식되었을까. 한복은 비교적 최근에 근대 이후에 생긴 말이라고 생각. 적어도 188-90년대까지 옷에 대한 명칭은 치마, 저고리, 두루마기 등 개별적이었을 것이고 총칭으로서 한복, 이 있었을지. (양승태: “양복”이라는 말은 언제 나왔을까) 어떤 것이 올바른 복장인지를 규정한 것은 전통적으로 유학자들. 박규수가 논한 ‘심의(深衣)’-유학자의 복장. 주자가례,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생각 등에는 문명담론의 요소가 상당히 개입되어 있었음. 복식= 민족성+문명성. 이 부분이 양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남궁곤: 의복은 신분의 문제이자, 산업의 문제.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의복의 코드와 산업화 국가의 의복 코드는 다른 것이 아닐까. 젠더 문제에서도,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사적 영역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복 변화가 늦었던 것이 아닐까.

의복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현상의 반영물이라고 한다면, 일제시대 독립운동, 저항의 상징으로 의복은 얼마나 기능했을까. 상당수 독립투사들은 양복을 입었음. 한복을 저항/순응의 이분법으로 포착할 수 없음.

패러다임 전환기에, 의복이 과연 얼마나 그 시대문화를 대변할 수 있는가. 의복보다 다른 문화변수가 더 설명력 큰 것 아닌가. 의복은 흥미롭긴 하지만, 패러다임 변화의 반영물로 의복에 집착하는 것은 대표성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

김봉진: 남궁곤 박사의 그 질문은 어느 정도 린의 논문에서 대답이 되고 있다고 봄.

히라노: 의복도입사 이론화 작업에서 하영선 교수님 지적한 네 가지 요소 중, 오늘 발표는 세 번째 기능성에 중점을 두었음. 오늘은 형구 린 논문에 대한 리뷰로 발표를 했는데, 원래는 문화접촉 현상에서의 정치적 기능에 대해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걸 그랬음. 정리하자면, 한국의 경우 저항의 구조가 삼중구조였다라는 것. 하교수님이 지적한 네 번째 요소가 심미성인데, 젠더 문제는 심미성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고 봄. 정치성, 경제성 등등에도 깊은 관련 있을 것.

한국의 경우, 의복은 민족성보다 문명/비문명의 문제와 관련이 크지 않을까, 라는 장인성 교수의 지적. 민족과 문명의 표상 문제, 에 있어서 문명/야만의 기준이 무엇인가?

장인성: 유학자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려는 표상으로서의 의복. 서양에 대해서 야만, 이라고 했을 때는 양복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양 자체가 야만, 이기 때문에 양복이 그 표상으로 기능. 그런데, 유학자의 아이덴티티가 변할 때, 그 표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의복은 얼마나 그 표상으로 기능하고 있는가. 이것은 의복이 민족의 표상인가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음.

문유미: 히라노 선생님은 형구 린의 논문에서 양복에 민족성/문명의 표상성을 막바로 주는 것에 대해서, 일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음. 선생님의 문화촉변으로는 어떻게 설명? 선생님은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일정한 선택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측의 선취, 가 있었다고 했는데.

식민지 시대에 일본통치자들은 스스로를 근대의 담지자이자, 천황 및 일본적 전통의 담지자라고 천명. 이러한 양가적 설명 방식에서 발생되는 모순 속에서 식민지 한국에서 복식이 고도로 정치성을 띠게 되는 콘텍스트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그렇게 볼 때, 선생님의 설명보다는 형구 린의 주장이 더 설명력이 있지 않은가. 혹은, 선생님의 설명방식이 보다 정교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히라노: 저 자신은, 린의 논문에 대해 비판적이라기보다 상당히 호의적인 입장. 그의 논문에 자극받아서 나의 논문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향후의 과제. 오히려 식민지 상황에 적용된 린의 방법론을 일본에 대한 나의 연구에 적용시켜도 좋을지,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음. 린 논문에 있어 ‘접촉’과 ‘선택’의 부분을 일본 케이스에서 실증적으로 연구해보고자 함.

히라노 유키코 여사: 헤이안 시대(6-10세기)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 복장이 더 간소했음.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비천한 사람들. 오늘날은 유니클로와 청바지의 시대. 헤이안 시대에는 복색에 의해 신분 차가 세세하게 드러났으나, 그렇지 않은 오늘날이 더 좋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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