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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국, "속방의 정치사상사"
 

2005-04-18 
장 소: 세계정치연구소
일 시: 2004년 5월 29일
발 표: 강동국, "속방의 정치사상사"
참 여: 최정운, 하영선, 김영호, 구대열, 마상윤, 김석근, 김봉진

-발표-

(발표문 참고)


-토론-

김봉진: 저의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음. 양절체제가 늘 문제인데, 나도 조금 성급하였지만 양절체제는 "양절에 대한 비판 논리"라고 생각한다. 발표자는 양절체제에 대한 비판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가?

강동국: 비판의 논리이지만 비판하는 부분은 청의 '속국-속방론', 두 체제를 연결하는 청의 논리를 끊기 위한 논리가 양절체제임.

김봉진: 나의 논리와 크게 다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강박사가 ‘속방-속국론’ 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여 양절체제를 섬세하게 설명한 점은 인정하나 그것은 결국 양절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강동국: 유길준의 의도대로 양절을 써야 함. 김봉진 박사님 논문에서도, 유길준이 말하는 양절체제만을 양절체제라고 쓰고, 김봉진 박사님이 말씀하시는 양절은 '속방=속국론'이라고 써야 한다고 생각함.

김봉진: 유길준이 양절체제를 지속적으로 찬성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강동국: 사실. 청을 배척하는 이유에서 지속적으로 찬성했음.

하영선: 양절은 인정하지만 속국이 아니라 속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유길준에 대한 평가는 "겁쟁이"일 수도 있음. 김옥균이었으면 양절이 아니라 일절로 가자고 주장했을 것. 하지만, 표현만을 보고 찬성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그보다는 현실인정. 이렇게 볼 때, 김영작 선생은 유길준을 naive liberalist로 평가 했지만, 유길준은 겁많은 현실주의자로 봐야 할 것임. 청에서 빠져나와서 서구 쪽으로 가자는 것의 조심스러운 표현.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유길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차이 아닌가? 원문을 그대로 따르면 강박사 논의가 선명한 것 같음.

김봉진: 유길준이 그 당시의 조청관계의 현실을 ‘양절’ 로 파악한 의도가 무엇이었는가. 내 생각은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고, 강박사는 유길준이 현실은 ‘양절’ 로 파악했으나 단지  청국측의 ‘속방-속국론’ 만을 비판했다고 보는 것. 다시 말하지만 후자의 비판은 결국 전자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강동국: 유길준의 텍스트에서 양절체제는 속방-속국론에 대한 비판논리로서의 양절체제.
유길준의 논리는 청에게 양절체제를 따라달라고 주장한 것. 저는 양절체제라는 용어의 사용을 문제삼는 것.

김봉진: 속방-속국론을 비판하는 논리였지, 양절체제는 비판하는 것이 아니었다. 공존하는 것인가?

하영선: 유길준은 힘의 역학에 따라 양절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즐거워서 하는 양절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있음.
김봉진 박사는 양절을 굉장히 확대한 것, 강동국 박사는 양절을 굉장히 좁게 해석.

김봉진: 그러한 지적은 인정하지만 결론은 결국, 현실을 파악하는 개념틀로서 양절이라고 인정. 양절체제는 곧 ‘속방-속국론’ 을 비판하는 현실의 논리. 양절체제는 변질된 조공체제 즉 청국측의 ‘속방-속국론’ 을 포함한 체제를 가리킴. 그렇다면 유길준의 ‘양절체제론’은 결국 양절체제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닌가?

김영호: 질문이 있는데, 속방과 속국의 차이? 구분 짓는 근거?

강동국: 속방, 속국, 번속은 중국 안에서는 다 같았음.
일본에서 에도시대 이후 속국은 서구적 의미의 종속관계.
기표와 기의의 차이가 생김(만국공법 번역).

구대열: 지배-종속의 문제는 역사적인 것. 굉장히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

김봉진: <만국공법> 에 설명되어 있음.

김영호: 한자로 방과 국의 차이.

강동국: 큰나라/작은 나라의 차이.

김봉진: 변질된 조공체제와 ‘속방-속국론’ 의 차이가 무엇인가? 변질된 조공체제를 비판한 논리로서의 양절체제. ‘속방-속국’ 이라는 개념이 혼란스럽게 쓰이고 있음 (이를 정리하기 위한 논문을 집필하겠음). 속국이나 속방을 둘러싼 당시 번역의 근거를 댈 필요가 있음.

강동국: 두가지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용어를 뽑아낼 필요가 있었음. 일본에서 만국공법 번역의 과정 그리고 그 이전에서부터 속국이라는 단어가 서구적 식민지의 의미로 쓰임.
그 이전을 대표하는 단어로서 자의적으로나마 속방을 꼽음.
적어도 일본에서의 사전 등을 볼 때, 속국에 대한 정의는 확실함.

김봉진: 당시 일본측의 정의 만으로 속국이나 속방의 개념을 이해해서는 약점이 있을 것으로 보임. 속방은 ‘tributary state (조공국)’ 을 의미했으나 이것이 개념의 혼란이나 현실적 필요에 따라 ‘vassal or dependent state (가신국가 또는 종속국)’ 으로 해석되기도 했음.

강동국: 조공국은 일본에서 거의 잊혀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속국의 대척의 의미로서 속방이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됨.

김봉진: 강박사의 속국이라는 개념에 대한 연구 설정은 좋음. 다시 첫번째 질문으로 회귀.
변질된 조공체제와 속방-속국론의 차이는 무엇인가. ‘양절체제’론은 현실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는가.

최정운: 이미 청일전쟁으로 끝난 상태. 이 논의를 남겨놓은 이유?

김봉진: 현실과 논리를 구별해서 생각하는 것.

강동국: 서로 양절체제라고 의미하는 것이 다름.
저는 "재답청사조회"는 양절체제를 논리기반으로 청의 논리를 반박한 것이라고 생각함.
여기에서 비판의 대상은 속방-속국론이고, 양절체제론에 의하면 두 체제는 서로 다르다고 주장함. 박정양 공사에 대한 처벌이 유야무야 되는 것이 결론으로 나옴.

구대열:텍스트를 두고 해석의 문제가 계속되는데 카부르나 비스마르크는 국가의 지위에 관심을 쏟았지 통일은 생각도 안 함. 역사는 이 사람들을 통일의 일등공신으로 평가함.

김봉진: 내 결론은 변하지 않음.
내가 ‘양절체제’ 자체를 현실 비판이라고 확대해석한 이유 세 가지.
1) 양절 자체가 가치판단적인 말이며,
2) ‘국권’ 이란 논문에는 양절체제에 관한 서술이 빠져있음. 유사한 이야기는 있음. 또한 그 논문 속에는 청하고의 관계를 의식해서 만약 증공국이 수공국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조공관계를 파기하는 것이 가하다라고 서술되어 있음. 이 말 속에서 양절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이 보임
3) 데니의 <청한론>을 보고 쓴 책이라는 점. 당시의 조청관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된 <청한론> 에는 양절에 대한 설명 없음. 이 <청한론>을 참조했고 그 일부를 번역하여 ‘방국의 권리’ (와 ‘국권’) 을 서술한 유길준이 그 속에 ‘양절(체제)’ 라는 용어을 껴 넣은 이유는 명확하다. 즉 <청한론> 은 현실의 ‘양절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음. 원래의 조공체제로 돌아가든가 해야지 지금의 상태는 불가하다는 것.

하영선: 유길준은 절제된 현실주의자. 유길준의 글로는 강박사가 말한 만큼 썼지만, 속마음은 김봉진 박사가 말한 정도였을 가능성이 매우 큼. 왜 유길준은 여기까지밖에 못썼을까?
이 글을 쓴 1887년,88년은 청의 영향력이 정점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양절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음.

최정운: 서유견문의 동기나 목표가 무엇인가? 현실적인 개혁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서양의 언어체계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음. 즉, 있는 그대로를 한번 그린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음. 양절체제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이런 것이 있었다고 말한 것. 마음은 모르겠지만 그의 서술은 과학적인 언어형태로 쓰고 있음.

하영선: 수공국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하고 있음. 앞부분과 말투가 다름.

최정운: 서양적 언어로의 전환이 목표였다고 보임.

김영호: 중국의 천하질서에서 자주는 대내적인 면에서 자주를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무엇?

강동국: 추상적 개념, 애매모호. 왕조에 따라 다름. 이성계가 자주를 인정받았음에도 명이 간섭, 그러나 청은 불간섭. 지금의 관념으로 구분하기 힘듦. 간섭이 있는데도 조선이 자주라고 우겼던 이유는 19세기까지도 그런 애매모호함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음.

최정운: 결론에서 이야기한 긴 그림자. 지금까지의 함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주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강동국: 북한이 남한을 사대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 한 예.

최정운: 당시 독립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마상윤: 독립국에서 사대주의로 넘어갔다고 하는데, 그 연결이 분명치 않음.

최정운: 후쿠자와는 조선을 바보로 생각함.

강동국: 그는 조선은 청나라같은 놈들이라고 생각.

최정운: 그 이후 조선의 유전인자를 탓하는 것. 독립을 정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개화 문제로 봄. 종자개량의 문제.

김영호: 결론이 짧은데, 구한말부터 20세기까지 역사를 관통해서 볼 때, 힘이라는 것이 미국으로 집중되는 양상. 지금부터 미국이 주권을 무시해도 별 말을 할 수 없음. 양절을 이런 의미에도 사용할 수 있지 않는가?

강동국: 다음 연구과제가 사대주의. 특히 신채호의 사대주의론을 중심으로 볼 생각임.

최정운: 1880년대까지 한국의 국제적인 모습은 두 가지였음. 자국의 위치에 대해서도, 상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모호하고 불분명한 상태. 따라서 민족주의적 사고가 확고하지 않았음.

김영호: 양절론으로 설명하면서 유길준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강동국: 문서 안에서 만국공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절체제 자체를 해결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김영호: 유길준이 사용한 ‘체제’의 의미? 양절체제에서 체제라는 말의 의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대자소를 의미하는가?

강동국: 유길준은 체제를 사대자소/만국공법 양쪽 모두에 사용하고 있음. 그러나 둘 사이에 예(norm)라는 공통점이 있음.

김봉진: 체제가 국제적인 의미었다는 근거는?

강동국: 통문관지 p.125.

김영호: 종래의 것은 조공체제/ 서양의 것은 국제체제라고 부르는 것임. 그러므로 유길준의 양절체제는 구체제를 의미하는 것.

강동국: 요즘 국제정치 이론의 system은 norm을 의미하고 있지 않으니까 오히려 pattern을 의미함.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

김석근: 양절은 적극적 정의라기보다는 설명하는 과정에서의 개념.
기본적으로는 방국의 권리가 있고 그 아래에서 양절이 등장. 양절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 없다고 생각함.

김봉진: 김박사님은 저와 의견을 같이 한다고 생각함.

김영호: 만일 그렇다면 유길준의 사고는 매우 근대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음. 방국도 굉장히 근대적 의미의 국가.

최정운: 마지막에 양절 이야기를 왜 빼지 않았겠는가? 질문 자체가 매우 근대적, 서양적.

김석근: 양절체제의 사상적 의미 설명 필요. 유길준은 이것이 양립가능하다고 보았는가?

강동국: 제 논문은 인물보다는 개념 중심으로 쓴 논문이라서, 유길준이 이렇게 생각했는가는 확실치 않음. 당시 동아시아 맥락에서 이런 의미를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함. 실학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로, 이런 해석을 붙인 것.

김영호: 후쿠자와의 문명론은?

강동국: 이전 시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김영호: 자신의 문명을 완전히 버린 것.

강동국: 후쿠자와의 기본적 입장은 유교를 완전히 버리고 밖을 취한 것임. 철저한 배제.

김영호: 문명개화는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음. 강박사의 논문은 당시의 현실, 후쿠자와 유기치의 주장과 비교해 볼 때 유길준이 논한 양절체제의 사상적 의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아닌가?

강동국: 김교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평가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고, 여기서는 다소 다른 의미에서 보고자 함. 근대화의 입장에서는 부정적 평가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인식을 제공한 사람으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임.

김영호: 이러면 당위론적 입장이 되는 것 아닌가? 현실적 문제해결이 안될 것 같음.

최정운: 현실적으로는 후쿠자와를 존경은 하지만 따라가고자 하지는 않음. 유길준은 후쿠자와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음. 나름대로의 복합화를 생각하고 있는 것.

김봉진: 사대주의에 대한 파악. 대부분의 개념이 2-3중으로 빌려쓰였다는 점에서 동양 전체의 개념사를 보는 것이 어려운 작업. 근대화된 전통 개념에는 근대적 시각이 노정되어 있음. 오늘날은 ‘근대의 초극’ 보다는 ‘근대의 주문 혹은 저주’ 를 초월할 필요가 있음.

최정운: 우리나라가 독립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썼는가? 청일전쟁 때 일본사람들이 쓴 문서에 있는 말을 고종이 읽은 것. 독립은 유교질서에서 의미가 없는 말이었음. 후쿠자와 유키치의 독립과 우리나라의 독립과는 다르지 않을까? 한국의 독립은 매우 이념적으로 쓰임.

구대열: 민주화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김봉진: 갑신정변 주역들은 ‘독립’ 이라는 용어을 씀. 그 때는 청에 대한 반역을 함의했음.

강동국: 실제로 청이 '독립반주'논의를 하자 한국측은 일본에서 들어온 개념이라고 변명함.

김봉진: 김윤식은 '특립'은 잘못된 개념이라고 비판함(1897년에 1884년을 회상하며). 그러나 청일전쟁을 계기로, 다시 말해서1894-95년을 기점으로 써도 되는 말로 바뀌게 되는 것. <독립신문> 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

김영호: 최근 우리의 자주-동맹 논쟁에서 미국은 자주파를 independent로 번역함.

강동국: 자주는 막말에 큰 의미변화를 보임. 원래 자주는 독립과 자유를 포괄하는 것이었는데, 이후 독립과 자유 개념이 커가고 자주는 독립의 유사어로서 희박하게 쓰이기 시작함. 1876년에 자주는 일본에게는 독립, 조선에서는 속방의 자주를 의미함. 자주는 조선에서도 이전부터 자주 쓰임.

김봉진: p.3 후쿠자와의 비판.

강동국: 갑신정변을 전후하여 후쿠자와가 사대당에 대한 시각을 바꿈.(사설) 단선론적 발전관에서 후쿠자와는 조선을 정치적으로 사랑하게 됨.

김봉진: 일본은 후쿠자와의 신화에 빠져있음, 기원은 마루야마.

최정운: 그 전엔 이토 히로부미였음.

김봉진: 나카무라 마사나오, 우치무라 칸조(기독교계) 혹은 지방의 사상가들 다수, 우리가 봐서 좋은 사람들은 다 방계에 속했음. 후쿠자와는 초지일관 탈아론자, 문명개화론자였으며, 청과의 연대를 말한 적이 없음.

구대열: 1870년대 전에는 이야기 한 적 있지 않은가?

김봉진: 그러한 시계열적 사상 변화는 신화에 불과. 처음부터 후쿠자와은 탈아론자였음.

강동국: 갑신정변을 도운 이유는?

김봉진: 조선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듯한 사설 있음. 그러나 청과의 연대를 주장한 적은 없음. 조선과는 시한부, 조건부 연대 가능성을 생각함. 이를 ‘조선과의 연대’ 라고 해석하는 것은 과장.

구대열: 일본에서는 아시아연대론의 계보가 있었음.

김봉진: 그러나 후쿠자와와는 관계 없었음.

구대열: 조선에서 사대는 원래 나쁜 의미가 아니었음. 그렇다고 부정적인 의미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

강동국: 유교적 입장에서 생각한 것임, 병자호란 이후에는 상상의 사대관계를 만들어 냈음.

김영호: 후쿠자와는 왜 관에 못들어갔나?

강동국: 들어갈 뻔 했으나 1881년 정변으로 국영신문사장이 되지 못함.

김봉진: 후쿠자와는 스스로 정부에 들어갔으면 찬밥 신세가 됐을 것을 알았을 것이며, 어쩌면 리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지략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임.

하영선: 개인적 코멘트를 하자면, 강동국 박사 논문의 깔끔한 정리는 좋으나 깔끔한 게 약점이 될 수 있음. 국가를 대표하는 언어의 선택은 일종의 전쟁 상황이었음. 약간 교과서적인 서술이 보임.

최정운: 전쟁이나 진배없는 1880년대를 깊이 생각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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